예술인류학

예술인류학 7주차 후기 및 공지 : <이미지의 삶과 죽음>

작성자
한역
작성일
2019-06-26 22:45
조회
145

1.'물질성'에 대한 저항

이미지의 물질성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물질이란 그저 인간의 감각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것들을 가리킬까요? 인간의 지각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언제 어떤 시대,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듣고 만지는지를 고려하지 않고 물질성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미술작품을 향유하는 것은 귀족들의 문화였고, 특히 19세기 이후로는 부르주아들의 취향이 반영된 문화였습니다. 여기서 미술품의 물질성은 소유자와의 관계가 반영된 물건, 즉 상품에 가깝습니다. 부유한 의뢰인의 요청으로 작품이 제작되었던 과거의 유화들에는 유독 아름다운 정원과 농장의 풍경이 펼쳐진 대저택, 화려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풍성한 식탁, 당당하고 우아한 자태로 앉은 인물을 그려낸 초상화가 많았습니다. 존 버거가 말했듯, 서구의 유화 전통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가 당장에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촉각성,  그것을 갖고 싶은 욕망을 환기해줍니다. 이미지의 물질성은 그것을 소유할 수 있는 물건으로, 사고 팔 수 있는 상품의 성질과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죠.

이처럼 무엇인가 소유하려는 감각과 긴밀하게 연결된 예술품의 물질성은 1960년대를 거치면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으로 전락한 예술의 운명을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한 예술가들의 노력이 다방면으로 전개된 것이죠. 먼저 개념미술이 있습니다. 조셉 코수스가 1965년에 발표한 <하나이면서 셋인 의자>라는 작품에는 의자를 지시하는 세 가지 형식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바로 ‘평범한 접이식 나무 의자’, 그런 의자를 찍은 ‘사진’, 그리고 ‘chair’의 정의를 확대한 ‘글귀’입니다. 여기서 작가는 세 가지의 ‘의자’를 통해 ‘이 중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의자의 형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렇다면 이 모습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코수스는 특정 대상(의자)을 거론할 때, 어떤 대상과 그것을 지시하는 텍스트가 어떻게 연관성을 가지는지, 이 중에 어떠한 형태가 그것을 지시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듭니다. 아울러 이것은 예술의 본질을 물건(상품)에 귀속시키지 않고 '컨셉'(개념)으로 정의합니다.

미니멀리즘 운동을 이끈 예술가들은 아예 가공되지 않은 재료를 그대로 전시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일례로 댄 플래빈은 전시공간의 벽면에 산업 소재로만 여겨졌던 형광등을 전시 공간에 설치하던 작가였습니다. 여러 개의 반짝이는 불빛에 의해 빛이 닿은 공간이 만들어지고, 그것은 꺼짐과 동시에 소멸하게 됩니다. 과거에 예술 작품의 존재감은 액자나 칸막이 같이 일정한 프레임 속에서만 느껴졌는데, 플래빈의 작품은 빛이 닿는 벽과 바닥까지 예술 작품의 영역을 확장시킵니다. 한편 도널드 저드의 작품은 아예 공장에서 생산된 무쇳덩어리를 벽면에 설치해놓았습니다. 재료에 가해진 예술가의 창조적인 흔적을 제거한 물질에는 아우라가 없습니다. 작가의 유일무이한 흔적을 느낄 수 없는 작품은 '그것을 누가 만든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저항합니다. 미니멀리즘 예술을 단지 형식적 단순함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미니멀리즘 예술과 개념 미술의 '탈물질화'와 더불어 이탈리아의 전위 예술가 그룹(아르테 포베라)은 물질성 자체가 언제든지 생성하고 변이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미술관에 한 무리의 말을 전시해놓고, 이들이 배설한 오물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관람객들은 얼굴을 찌뿌린채 코를 막거나 전시장을 서둘러 나왔다고 해요. 그들이 표현했던 실재성은 살아 움직이는 나머지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실재성'입니다. 한편 우리나라의 '이불' 작가는 물고기에 바늘을 꽂아 예쁜 구슬로 장식한 작품을 전시하면서, 그것이 썩어가는 과정과 냄새까지도 전시했습니다. 소유하고픈 감각에 연관된 실재성이 영원함과 변치않음을 욕망한다면, 이들은 그러한 실재성 자체가 아니라 생성하고 소멸하는 차원의 실재성, 더럽고 불쾌함을 안겨주는 실재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죠.

2.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크리스토-장 클로드 부부는 특정한 장소를 중심으로 공공미술을 시도했습니다. 이들은 강, 나무, 독일의 국회의사당, 퐁뇌프 다리 같은 장소를 천으로 감싸는 포장 작업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미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면 그곳을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새삼 질문하게 됩니다. 그곳에 놓인 사물의 원래 모습은 어떨지, 매일 지나다니던 그곳에는 어떤 건물과 자연물이 놓여있었는지, 작가는 왜 하필 그곳을 천으로 가려놓았는지 .. 여기에는 맨날 그 자리에 있어서 우리의 눈에 익숙했던 것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는 경험과 비교적 잘 안다고 생각했던 대상이 갖는 새로운 의미에 대한 고민이 동반합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사실 잘 보이지 않았던 어떤 것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 그렇다면, 반대로 가시적이지 않은 것이면 정녕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책의 2장에서 드브레는 파묻힌 석관 위에서 해가 저무는 쪽을 마주보게 배치된 이집트의 비석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비석은 죽은 자를 태양과 매개하는 ‘열린 문’이자, 그를 태양이 상징하는 산 자들의 세계로 인도하는 이미지입니다. 드브레는 이것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믿음직한 것과 의심스러운 것 사이에 통로를 뚫으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집트 미술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인간은 죽음을 경험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이해할 수 없는 무엇으로 남겨두지 않았다는 사실이죠. 보이지 않는 세계,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를 매개해주는 이미지의 힘.

천으로 덮은 사물의 모습이 낯섬(타자성)이 그것을 더 잘 알 수 있게끔 해주는 계기가 되듯이, 인간의 지각은 ‘인간적인 것’을 넘어설 때 더욱 확장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스노우의 실험적 영화 <중심 지역>에서 지각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바람’입니다. 그는 카메라를 바람의 미세한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도록 설치하면서 인간적인 지각에서 벗어난 영상을 찍은 작가였습니다. 세간에 팝아트 작가로 널리 알려진 앤디 워홀도 다소 엉뚱하고 기묘한 실험적인 영화를 남긴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여덟 시간의 고정된 롱숏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을 촬영한 <엠파이어>와, 여섯 시간 동안 잠자는 남자를 계속 촬영한 <슬립> 같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스노우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마치 무중력 상태를 구현하듯 빙빙 돌고, 화면에는 어디가 땅이고 하늘인지 분명하지 않은 순간들이 펼쳐집니다. 워홀의 작품도 기이합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이것은 대체 무엇을 찍고 있는지, 그렇게 찍은 것을 본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지, 카메라는 무엇을 찍고 화면에는 어떤 다른 것들이 찍히고 있는지 궁금할 정도로 말이죠. 자칫 시시해 보일 수 있는 소재가 던지는 다양한 질문들, 그것을 매개하고 있는 카메라의 존재감은 분명 예사롭지 않습니다.

3. 디지털 이미지의 탈주선

<이미지의 삶과 죽음>을 쓸 당시에 드브레는 그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다소 우려어린 시선을 보이곤 했습니다. 특히 송출되는 신호를 그대로 반영하는 텔레비전 이미지에는 그것을 수용하는 익명의 시청자들이 전제되어있을 뿐, 이미지 하나하나를 낯설게 볼 수 있는 계기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디지털 이미지라고 해서 꼭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이유는 없을 겁니다. 수많은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낯선 감각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들의 실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Tristan's Ascension>은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을 뒤집어쓴 인간의 몸이 서서히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몸의 동작은 마치 시간의 선형적인 흐름을 거스르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승천하는 것 같고, 마치 중세 시대의 성화에서 다뤄졌던 부활하는 그리스도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혹은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이 결국은 무無로 환원되는 과정을 구현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시간을 역행(되감기)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순리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새로운 시대의 기술이 생겨났기에 이미지를 실험할 수 있는 영역도 함께 생겨났음을 말해주는 사례가 아닐까싶습니다. 채운샘은 특히 빌 비올라의 전시회는 한번 시간 내서 가볼만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정말로 인상적이었는데, 기억했다가 나중에 그의 전시회가 열리면 꼭 가봐야겠습니다.

후기가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앙리 르페르브의 <리듬 분석>을 읽고 들었던 생각과 질문을 과제로 써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관희 선생님이 맡았습니다. 이번주 목요일날 5시 30분에 뵙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체 2

  • 2019-06-27 09:47
    '회화'보다 '이미지'라는 말이 저에게는 더 익숙한 것 같습니다.
    상품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는 예술가들의 실험이 불편한 '실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거나,
    더욱 낯선 감각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되었군요.
    한역쌤, 늦은 밤까지 후기 쓰시느라 애 많이 쓰셨어요.

  • 2019-06-27 13:20
    이집트 비석에 대한 부분은 정말 놀랍네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 보이지 않음을 인식하려는 노력. 그것이 이미지의 힘이라는 점을 배우고 갑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질문'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