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3학기 9주차(10.2)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9-27 21:48
조회
112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영원히 회귀했으면 좋겠는(틀린 용법입니다만) 한가위 날씨가 이어지네요. 3학기도 벌써 8주가 지났습니다. 읽은 책이 점점 쌓여 가네요ㅎㅎ. 크게 변한 것도 없는데 한 해가 지난 것도 같지만, 돌아보면 다른 것 안 하고 이 책들을 정신없이 읽어갔다는 시간이 주는 힘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판에 박힌 일상에,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이런 비일상적인 글자들과 말들을 읽고 나눌 시간을 도입하는 일은 분명 뭔가를 건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가을날처럼 선선했던 수업을 스케치해보겠습니다.

아마도 가장 전도하기 어려운 가치이기 때문인지, ‘의지의 자유’에 대한 비판은 니체의 모든 저작에 꼭 등장합니다. 자유의지는 단지 있냐 없냐의 사변적 주제가 아니라, 사물과 사건을 실체적으로 보게 하고 행위 뒤에 행위자를 상상하게 하고 나아가 그것들에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만드는 우리 인식의 고질적 습관입니다. 그 착각은 우리가 사물을 생성적인 것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자유의지를 비판하면 반드시 찾아오는 반문이 있습니다. 그럼 모든 것은 수동적으로 규정되기만 하는가? 하지만 니체는 이것은 그냥 자유의지 개념을 역전시킨, ‘의지의 부자유’ 개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저희조에서 얘기 나왔던 숙명론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외부와 분리된 주체가 상정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일어난 현상을 결과로 두고 그것을 일으킨 원인이 그 현상 앞에 분리된 채 존재한다고 전제된다는 점은 똑같습니다. 여전히 경계를 가진 항으로서의 현상들이 영향을 주고받는 꼴이지요. 이번에 읽은 <인간적인2> 2장에는 이런 상식들을 넘어가게 해주는 값진 구절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항상 여러 가지 구속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오랜 습관으로 인해 사슬의 무게를 더 이상 느끼지 않을 때에만 자신을 자유롭다고 간주하다면 어떻게 될까?”(228쪽)

이것은 의존과 독립, 구속과 자유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의존하고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자유롭고 독립적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때 마음대로 하는 것 같아 자유의지를 떠올리지요.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항상 사슬들의 구속 속에 있으며, 다만 익숙해져 있기에 그것들의 관계를 구속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서의 구속은 억압이나 괴롭힘의 의미가 아니라 관계, 즉 접촉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모든 터치를 벗어난 순간에도 중력 속에 있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곧 허기지고, 의도치 않는 생각들이 피어나는 등의 ‘작용’ 혹은 ‘대사’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접촉은 항상하고 영원하지만 단지 그것이 우리의 감각과 인지 작용에서 문제로 출현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자유롭다는 것은 사슬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의 상태일 뿐이지 사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사슬 없는 자유 혹은 독립은 환상이고 기만이며 심지어는 습관화된 반응이 굳어졌다는 점에서 병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이처럼 감수성이 결핍된, 가장 가까이서 일어나는 일들을 문제로 사건으로 반성과 고민의 기회로 느끼지 못하는 둔감성이 무척이나 위험할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니체도 말했지요. “개개인의 거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무기력함은 이러한 결여에서 유래한다는 사실을 잘 생각해보라.”(223쪽)

다시 존재론으로 돌아와서, 니체는 우리 자신의 행동과 인식은 모든 현상이 부단한 흐름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우리는 이런 흐름을 흐름으로 보지 못하고 경계선을 긋습니다. “우리의 습관적이고 부정확한 관찰이 한 무더기의 현상들을 하나로 보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이름 붙입니다.”(229쪽) 그리고 이 사실과 다른 사실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붙여 각 사실들을 분리시키죠. 즉 어떤 가치들과 사물들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라고 간주합니다. 따뜻함과 차가움, 선함과 악함, 파란 것과 느린 것, 나와 나 아닌 것. 하나의 사실이 동일한 것으로 존재하며, 그것은 다른 사실들과 대립된다는 근본 오류, 즉 분별이 일어나는 것이죠.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 모든 것은 정도 혹은 비율의 차이일 뿐이지 질의 차이가 아닙니다. 이것에 대한 무지와 부주의로부터 주체에 대한 환상과 자유의지에 대한 환상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니체가 말하듯 이것은 원인을 잘못 추리하는 것입니다. 의식적이고 자의적인 방식의 추론이지요. 뭐라도 붙잡고 싶고 그럴 때 안심되기 때문에요.

세상은 한 무더기의 현상들, 원인과 구분되어 있지 않는 결과들, 행위자 없는 행위들,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닌 매번 법칙을 구현해내는 운동들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힘은 매 순간 마지막 결론을 이끌어내기 때문”(<선악의 저편>, 44쪽)입니다. 일어나고 있는 일들 바깥의 여백, 꽁쳐놓고 있는 여분의 힘, 여기보다 더 넓은 선택지로 남아있는 가능성은 없습니다. 힘들은 매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며, 세계는 매 순간 완성되고 있기에 필연적입니다.

자유로운 의지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윤리는 무엇일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면 되는 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까요? 니체는 말합니다. “운명과의 싸움은 하나의 환상이다. 그러나 그 운명 속에서 체념하는 것 역시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 이 모든 환상들은 운명 속에 포함된다.”(270쪽) 자유를 누린다는 생각이 환상인 것 못지않게 부자유를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도 환상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할 때의 나는,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상상된 주체-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니체는 그보다 ‘주체 복합체로서의 영혼’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세련된 상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신체 자체가 세포들과 미생물들의 공산적 산물이듯 의지 역시 복합적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여기서의 윤리는 대체 어떤 의지가 언제 어떤 조건들과 더불어 성장하고 또 쇠락하는지 곰곰 질문하고 더듬어보고 실험해보는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남들의 생각이나 혹은 이전의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비판하고 반박하는 일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어떤 집게가 지금까지 자신을 이 당파나 종교에 붙잡아 놓았는지 분명히 통찰하고 또 어떤 의도들이 자신을 그곳으로 내몰았든 그것들은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제는 또다른 곳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통찰하는 것뿐이다.”(282쪽)

집게를 통찰한다는 것은 단지 외부 구조를 분석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문제는 여러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배치 속에서 자신의 행동과 감성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 내가 가치라고 느끼는 것 진실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을 형성하는 담론적이고 비담론적인 지형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욕망은 거시적인 정책이나 제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종교, 이미지, 미디어, 가족, 종교, 성, 장소 등 온갖 힘들이 우리 마음에 미세한 진동들을 가합니다. 디테일이 생명입니다. 분석이 신중하고 디테일한 만큼 도주할 길도 보입니다. “생활 양식의 설정, 하루 일의 할당, 교제를 위한 시간과 선택, 직업과 여가, 명령과 복종,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각, 식사, 수면, 반성적 사색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바람직하며 무엇이 우리에게 해로운가를 알”아차리는 일(223쪽), “의, 식, 주, 교제 등을 편견 없는 보편적 반성과 개선의 지속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222쪽). 변화의 시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디테일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마음>이었습니다. 죽음을, 그것도 자신이 결심한 죽음을 앞둔 사람의 고백, 그것도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그러나 거리는 충분한)에게 털어놓는 고백에는 최대한의 진솔함이 묻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진솔함이 팩트는 아니겠지만, 선생님은 자신의 마음을 스쳐가는 진동들과 그 모순적이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한 변화들을 최대한 낱낱이 들어내고 있습니다. 저희는 죽음을 포함한 이런 과정이 선생님에게는 일종의 자신의 적막에서 이뤄낸, 어쩌면 적극적이라 할 수 있는 진일보가 아닐까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꽉 막혀 있던 자신의 세계를 열고 간 중요한 작업으로서의 쓰기, 그리고 그런 쓰기를 가능하게 한 외부이자 바람구멍이 된 ‘나’와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아, 물론 K와 선생의 죽음이 도주선인가 아닌가, 그에 앞서 도주선은 과연 그저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잘 풀리지 않긴 합니다. 루쉰의 소설도 그렇고, 저의 상식으로는 편협하게 해석되거나 해석이 턱 막히는 마음의 풍경과 죽음의 장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풀리지 않고 조금은 찜찜한 구석도 많은 소설이었지만, 왠지 다시 찾아보게 될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곧 올라올 난희샘의 후기를 참고해주세요!

다음 주 공지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 286쪽~366쪽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명암> 100절(현암사 기준 298쪽)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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