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NY 3학기 10주차(10.9)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10-05 16:23
조회
102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제목은 너무나 탁월한 것 같습니다. 거기 담긴 모든 이야기가 우리와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어서(19세기 독일 작가들은 좀 어렵긴 합니다만ㅎㅎ), 무얼 가지고도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어서입니다. 저희는 이번에 문체에 관한 이야기부터 음악가, 기계, 자연사 등에 대한 주제들을 이야기 나눠 보았습니다.

우선 기계에 대한 니체의 생각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역사적이고 관점주의적인 사유를 시도하는 니체에게는 어떤 대상도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쁘지 않은데요, 기계나 기술 문명에 대한 생각도 그렇습니다. “기계는 그 자체로서는 최고의 사고력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조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저급하고 사고력이 결여된 힘만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때에 기계는 그렇지 않으면 잠들어 있었을 엄청난 힘을 대체로 풀어놓게 되는데 이것은 틀림없는 일이다.”(<인간적인2>, 364쪽) 기계나 기술, 제도와 서비스는 우리를 더 이상 사고하지 않아도 되게 합니다. 한 선생님은 업무 시스템 기술이 우리 자신이 직접 품을 들여 정보를 모으고 조직하는 능력을 저하시킨다고 말하셨는데요, 이 말에 모두가 공감을 했습니다. 확실히 기계는 우리를 무능하게 합니다. 촘촘하고 빨라진 교통망, 실시간으로 울리는 카톡과 SNS, 모든 것을 코앞으로 가져다주는 배달과 택배 서비스, 인터넷 사전 등이 우리 자신의 손과 발과 머리의 역량을 크게 하는가 하는 질문에 쉽게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구속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지요. 우리는 반응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은, 이것은 분산되던 우리의 에너지를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조건이 되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계 문화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문화가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무능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런 와중에 우리는 무엇을 새로 할 수 있게 되었는가? 여가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진부한 상식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그렇게 확보된 시간은 모두 그림자 노동이나 다른 시장 컨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빨려들어 가니까요. 척도를 양적 시간이나 금전으로 설정해서는 곤란합니다. 니체의 방식 빌리자면 스스로에게 저 질문을 던질 때 기준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입니다. 즉 그 기술이 자기 자신의 건강성 및 역량의 증가로서의 기쁨을 확보하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가. 우리를 얼마나 고귀하게 하는가. 깨어있게 하는가. 이것들이 척도입니다.

기술과 인간의 역량의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늘 내일의 것이 아닙니다. 이미 플라톤의 시대에서부터 구술이 아닌 문자를 활용하는 배움에 대한 경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말을 하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글자라는 기술을 가지고 읽고 쓰려 할 때 게을러진다는 것이죠. 지금의 저희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조차, 백스페이스를 눌러가며 키보트를 두들이지 않고는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펜으로 쓰는 일은 어색하고 조금 힘이 들죠. 두 방식 사이에는 생각의 속도나 정돈의 정도 뿐 아니라 설명 안 되는 감성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물며 붓으로 쓰거나 파피루스에 쓰는 경우는 얼마나 달랐을까요. 저희는 읽고 쓰는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문체 이야기로 넘어갔습니다. 니체에게 문체는 단순한 글의 형식이 아닙니다. 문체는 그 사람의 사유의 방식을 그대로 담아내는데 사실 이것은 고유한 신체적인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문체를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의 양식을 바꾸는 것이지요. 완전히 다른 게 살게 되는 것이죠. “더 훌륭하게 글을 쓰는 것은 동시에 더 훌륭하게 사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87절) 저희는 니체가 문체를 바꾼 사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방만하고 화려한 문체보다도 더 심플하고 담백한 문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습니다. 니체는 그리스 예술가들의 표현법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대중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도 더 적게 소유하기를 바란다.—(...)그러나 그들은 적게 가지고 있는 그것을 더 잘 소유하기를 바란다. (...) 그들이 단어와 어법에서 일상적인 것과 겉으로 보기에 이미 다 써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을 얼마나 쉽고 세련되게 사용하는지를 바라보는 훌륭한 안목을 가지게 된다면 찬탄하는 일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127절) 하나의 음, 하나의 붓질, 하나의 단어를 ‘더 잘 소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니체는 “모든 단어에는 자신의 냄새가 있다”(119절)고 했습니다. 어떻게 단어들을 조화시켜서 문장마다, 행간마다 고유한 향기 및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것이 니체가 한 고민이었고, 최근 저도 아주 조금씩 시작하게 된 고민입니다. 일상적인 용어고 누구나 말하는 단어인데 거기에 고유한 강렬함을 집어넣는 일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아주 심플한 단어만을 사용하는데도 누구보다 큰 울림을 주는 달라이라마 같은 분들의 말, 짧고도 간결한 문장들에 격렬한 힘을 담고 있는 로렌스의 글 등이 떠오릅니다. ‘밥과 김치 같은 글쓰기’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명암>은 어떤 소설보다도 저희를 웅성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미세하고도 집요한 심리묘사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는데요.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의 마음에 떠오르고 사라지는 작은 물살들 하나하나를 하이퍼리얼리즘적으로 뜯어보고 있노라면 과민해진 신경에 병이 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우리는 우리의 욕구만을 알 뿐이지 그렇게 욕망하게 된 원인은 모른다고 말했는데, 소세키는 정서들이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기 이전 차원까지도 잡아내려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 조에서는 오노부와 여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습니다. 오노부나 요시카와 부인이 힘을 느끼는 방식은 독특합니다. 그들은 남자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의 다룬다는 것은 제압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허락하고 봉사하는 방식으로 행해지는데요, 특히 오노부가 쓰다에게 펼치는 공세가 그렇습니다. 저희는 이것을 음(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희생하고, 인내심 있고, 유순하고, 케어하고, 세팅함으로써 상대가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지요. 오노부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느니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 여자다움(기름기)이 사라진 삶은 끔찍한 생존이라고 여기지요. 한편 쓰다는 어떨까요? 쓰다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더러운 꼴과 치부를 보여주는 일을 그 무엇보다 싫어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이 굽실거려야 할 사람과 무시하고 경멸해도 좋은 존재 사이에서 표정을 바꾸며 살아가지요. 그런 자들의 마음의 파동이 피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우리 마음 안에서도 끝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채운샘은 <마음>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모든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고, 모든 관계는 삼각관계”라는 헤겔의 말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마음>의 선생이 하숙집 아가씨와 잘 될 확률은 적었습니다. 선생은 계속 재고 의심하며 우물쭈물 했을 것입니다. 그의 열망은 K의 등장과 함께 점화되었습니다. 욕망은 늘 이런 식입니다. 제3자가 개입해서 빼앗고 훼방놓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없이 그 불은 타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욕망은 언제나 타자의 존재 혹은 타자의 인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인정욕망이라는 말은 단순히 칭찬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념이, 우리와 비슷한 방식으로 느낀다고 추정되는 타자를 경유해서만 성립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단지 ‘나의 끌림’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순진한 믿음입니다.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어디 대놓기 부끄럽지 않은 사람, 남들이 인정할 만한 사람을 더 사랑합니다. 욕망은 전혀 개인적이지 않지요. 특히 소세키 소설을 읽다 보면 더 많이 느껴집니다.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파장은 전부 외부에 의한 것입니다. 가장 강력한 외부는 돈, 가족, 이해관계, 진실, 인간성 등이지요. 니체라면 도덕, 종교, 학문, 여성과 어린아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했을 것들입니다. 순수하고 내밀한 욕망은 환상입니다. 소세키를 따라 시도해야 할 것들이 있다면, 우리 마음이 그토록 미세한 긴장 속에서 일어났다가 가라앉음을 우선 이해하는 것, 그 다음엔 어떤 제3자들이 우리 안에서 풀무질을 하고 있는가를 하나 둘 따라가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매몰되는 일과 자기 자신 혹은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일에서 조금씩 놓여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다음 주 공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2> 430쪽(끝)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명암> 188절(현암사 기준 584쪽 끝)까지 읽고 이야깃거리를 준비해옵니다.

-길진숙(지산) 선생님의 ‘소세키와 루쉰’ 특강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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