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3학기 5주차 후기

작성자
이진아
작성일
2021-09-01 11:01
조회
89
주체의 해석학을 우리 시대 나의 윤리 발명과 연결시켜 읽기

절차탁마 3학기 5주차 수업에서 채운선생님의 강의에서 저에게 중요하게 다가온 것은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읽을 때 자기 배려, 자기테크놀로지를 고대 그리스 로마라는 철학사적 관점에서 매몰되어 읽지 않고, 지금 우리시대 나의 윤리와 자기테크놀로지 발명을 위한 사례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라는 것은 대개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는 관계의 질서들이 교육과 훈육을 통해 우리에게 내면화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몇 십년 동안 내 안에 내면된 이 질서들에서 스스로 자유로와지기란 결코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들을 스스로 해체하기 위해서 먼저 그러한 실상을 보고, 이해해야 하고 해체한 질서의 잔재를 치운 다음 새로운 자신의 질서를 세우고 재구성해 일련의 자기기술로 신체와 정신을 변형시키지 않으면 저 바깥의 거대한, 익숙한 질서가 보내는 유혹의 손짓을 뿌리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런 공부를 통해 그런 자기기술을 하나씩 발명해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래는 8월 25일 3학기 5주차 채운선생님의 강의 요약입니다. 

주체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훈육, 교육 등을 통해 어떤 일정한 조건 속에서 학생, 부모 등등 관계를 주체로 내면화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을 읽을 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나를 주체화하는 것이 한 예다. 주체가 이미 고정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화 과정이 있는 것이며 이것이 푸코가 주목한 지점이다. 신자유주의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주체를 구성해내는 일련의 실천들, 테크놀로지들이 있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 작동하는 방식이 아주 구체적인 테크놀로지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가 분석한 것은 권력 테크놀로지다. 근대가 학교, 공장, 감옥 안에서 작동하는 신체적 배치들(신체적 길들임)과 더불어 독립적으로 또는 상호 영향을 미치며 가는 담론적 차원들이 있다. 이런 조건들 속에서, 우리는 학생, 근대 학생으로 길들여진다. 신체적으로 길들여지고 동시에 정신이 순화되는 것이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사회의 복잡한 권력 관계들을 내가 내면화하는 과정이다.

들뢰즈 식으로 푸코를 해석하면 사회에는 수많은 규정성들이 앎의 형태로 존재한다. (시-비, 과학-비과학, 어떤 것(노동, 사랑, 인간 등등)에 대한 무수한 지식들의 배치가 있으며 있고 이는 말들의 장이라 할 수 있다. 표상과 지식은 우리의 신체가 관계를 맺는 양상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 안에서 접혀진다.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지식의 배치, 물질적 차원의 배치들,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외부적인 것들을 저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주름을 접어 넣는 것이다. 같은 시공간에 살아도 각 신체와 정신 속에 주름잡아 넣는 방식은 다 다르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다.

푸코가 말하는 ‘자기’는 self, 주체이지만 ego(자아, 자의식)는 아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즐겨 쓰는 ego라는 개념을 주의해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에고는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고유한 것으로 연상된다. 그러나 푸코는 ego에 대해 말한 것이 아니다. 원래 주어진 자기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외부적인 것들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기, 자기 고유성이란 없으며 자기가 맺는 관계가 자기다. 스피노자와 연결시키면, 독특한 실재singular thing는 이미 변용의 산물이다. 독특한 실재 자체가 변용들의 결과물인 것이다. 변용 전의 내가 있는 것이 아니다. A와B의 마주침에서 변용이 일어날 때, 그 변용은 A도 B도 아닌 어떤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A,B,C….등 더 많은 것들과의 복잡한 마주침 속에서 변용의 산물로서 자기를 체험할 뿐이다. 그 체험한 자기가 자기라는 관념, 신체이며 정서다. 그 변용이 아닌 고유한 자아ego가 따로 있지 않다.

니체에게서도 ich(나, I)는 자기 자신을 외부로 가지는 반면, self는 힘들의 장이다. 즉 나란 이미 관계들이다. 푸코가 이야기 한 자리란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들의 총체이다.

문제는 어떻게 그 관계(관계의 질서)를 변형시키는 실험을 할 것인가?이다.

스피노자가 하나의 합성된 개체(복합체)는 그것을 구성한 수많은 물체들이 어떤 운동과 정지의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을 때 이것이 지닌 실천적 함축은 무엇인가? 나라는 개체는 나를 구성한 무수한 신체적 관계 (예: 장기, 오장 육부와 음식과의 관계, 공기, 물과의 관계 등)를 바꾸지 않으면 몸이 바뀌지 않듯이, 정신도, 살아오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관념의 질서 즉 관념들의 관계성을 바꿔야 변화가 가능하다. A를 보며B를 떠올리는 것이 아닌 C를 연상하기가 가능할 때 관념의 질서가 바뀐 것이다.

현대정치학에서도 스피노자의 관점을 적용하면 사람들이 관계 맺는 양상을 변화시켜야 사회의 전체 비율의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다.

푸코는 주체화의 문제를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 즉 윤리를 말하고자 했다. 이는 스피노자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어떻게 살아야 좋은 삶인가? 서양의 철학은 이 질문과 더불어 시작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헤라클라이토스, 아낙사만드로스 등등 철학자들에 비해 소크라테스가 더 나아간 것은 지상에서의 삶을 중심에 놓고 어떻게 사는 삶이 좋은 삶인가의 문제를 철학의 문제로 본격적으로 가져왔다. 기존의 자연철학에서는 이 윤리의 문제가 중심이지는 않았다.

푸코가 이 문제를 다룰 때, 가치로운 삶, 좋은 삶의 기준은 역사 속에서 대체로 준거점들이 3가지였음을 보았다: 1)종교(선한 삶), 2)법(규범, 양심에 거리낌 없는 삶, 도덕, 사회의 규정성), 3) 근대의 과학지식(합리적 추론)이 그것들이다. 그런데 이들 준거점은 모두 외부에 있다. 푸코는 이 세가지 준거점에 의거하지 않은 윤리의 구성은 불가능한가의 질문을 던졌다. 즉 그는 다른 준거점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근대인에게, 자기 스스로 윤리 준거점을 마련하는 예로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주목했다. 그리고 이는 따라야 할 모델이 아닌 예이다.

스피노자 또한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의 질문을 품고 다뤄냈다. 그에게 윤리는 외부의 가장 윤리적으로 사는 집단을 찾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지 않았고, 그런 방식으로 철학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는 우리가 어떤 조건 속에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그 조건 속에서 정신과 신체가 규정될 수 밖에 없는가를 분석했고 그 조건으로부터 능동성을 사유할 수 있는가를 탐색했다. 스피노자는 조건과 무관한 자유의지에서 나오는 능동성이 아닌, 규정되는 것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지점을 사유하고자 했다. 자유를 어떻게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질문을 던진다. 필연적인 조건과 무관하거나 벗어나는 것이 자유가 아니다. 상호 규정된 조건의 필연성에 대한 인식 속에서 자유를 구성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 점에서 푸코도 유사한 점이 있다.

윤리적 삶에 대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이 자기배려라는 개념으로 압축되며, 푸코는 이 개념을 실존의 미학이라는 방식으로 이해했고, 이 문제가 4,5세기 무렵부터 서양에서 실종되었다가 19세기 철학에서 다시 복원됨을 주목했다. 19세기 댄디즘은 부르주아들의 상투적이고 진부한 삶에 환멸을 느끼는 것에서 출발한다. 보들레르를 포함한 이 시기 예술가 및 철학자들은 삶의 트랜드를 좇고 모두가 똑같은 삶의 양식을 추종하며 자기 고상함에 도취된 부르주아 사교계의 삶과 가치관을 경멸했다. 브루주아적 무리에 속하지 않으려는 일련의 시도를 삶의 디테일한 방식들부터 커다란 사유에까지 걸쳐 실험했다. 오늘 날은 이들의 삶의 실험은 사라지고 우리에게는 패션 양식으로만 남아있다. 푸코가 19세기 댄디즘에서 발견한 것은 무리에 속하지 않으려는 자기 테크놀로지였다. 그들은 실존의 양식 하나 하나를 발명하려 했고, 어떤 글, 생각, 옷, 사교의 대상, 연애의 방식 등, 삶의 모든 것에 대한 자기 테크놀로지를 갖는 것을 매우 중시했는데, 푸코는 이들 댄디즘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실행했으나 서양사회에서 오랜 시간 잊혀졌던 실존의 미학, 주체화의 문제를 재발견하게 된다.  

자기 배려는 몸만의 문제도 정신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자신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대한 변형의 실험이다. 이는 자기 테크놀로지 즉, 자기를 다른 방식으로 조형하려는 일련의 기술들이다. 기술은 모방이 불가능하다. 자기 삶에서 모든 관계를 바꾼다는 것은 각자 처한 삶의 조건에서 자기 기술을 연마하지 않으면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푸코는 <주체의 해석학>을 테마로 한 일련의 강의를 통해 외부에 준거점을 가지지 않는 윤리의 구성의 한 예로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사례를 가져왔고, 이들 사례를 근거로 윤리의 발명, 자유의 발명을 내 삶에서 실험해 보기 위한 디테일한 예들을 분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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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2 10:53
    문제의식을 갖고 텍스트와 만나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내용이 쉽게 정리되지 않는 책을 읽을 때마다 문제의식을 놓치곤 하는데, 이번에도 그 고질병이 도진 것 같아요.
    주체화, 통치성 등 푸코는 자신의 문제의식으로부터 텍스트를 분석하고 사유를 구축했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이 푸코에게 '자기에 이르는 기술'이었던 것 같습니다. 푸코를 통해 스피노자가 어떤 심정으로 철학을 했을지도 조금 짐작하게 되고요.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푸코의 매력에 이제야 빠지게 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