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3학기 7주차 공지 '일상과 윤리'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9-05 20:31
조회
72
오랜만에 뵈니 반갑웠습니다~ 줌 화면으로 뵈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만나니 더 반가웠습니다. 아참! 9월 6일을 기점으로 사적모임 기준이 달라진다고 하니, 맘 놓고 만날 수 있겠습니다. ㅎㅎ 다음 주에 다시 봬요!

다음 주는 대망의 7주차입니다. 우선 지난 학기 ‘내가 만난 스피노자’의 초고와 다음 학기 에세이의 문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텍스트는 《에티카》 4부 부록 전까지, 《주체의 해석학》 2월 10일 강의 전·후반부를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강의는 《주체의 해석학》 2월 3일, 10일을 합쳐서 해주실 예정입니다. 읽을 것보다는 쓸 게 많네요! 쓰기 지옥입니다! ㅋㅋ.. 모두 무사히 잘 마치시길 바랍니다. 간식은 윤순쌤께 부탁드릴게요~

《에티카》와 《주체의 해석학》을 같이 읽어서 그런지 ‘윤리’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스피노자와 푸코를 따라가면서 윤리를 고민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적합한 인식, 능동 정서를 얘기하던 스피노자는 어느새 4부 후반부에서 사회의 중요성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공동 사회에 기여하는 것 또는 인간들이 화합하여 살아가게 하는 것은 유용하다. 반대로 국가 안에 불화를 가져오는 것은 나쁘다.”(《에티카》 4부 정리40) 여기서 ‘불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쉽지 않았습니다. 글자 그대로 공동체의 결정에 반대하는 모든 것을 ‘불화’로 본다면, 부패한 사회에 대한 저항 역시 불화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결정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만이 화합이고 좋음일까요?

일단 정리54의 주석 “우중은 무서움을 느끼지 않으면 무서운 존재가 된다”는 구절을 참고하면, 사회에서의 불화-나쁨은 사회를 해체하는 우중의 존재 혹은 그것을 야기하는 부분의 과도한 욕망으로 읽힙니다. 스피노자는 일관되게 무법사회보다 공동의 선이 준수되는 사회가 더 낫다고 얘기합니다. 《신학 정치론》에서도 사회가 무너지는 것에 대한 공포가 느껴지죠. 그렇다고 스피노자가 무조건적 복종을 권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들뢰즈가 분석한 역량을 실험하는 두 가지 길, 작은 슬픔을 겪음으로써 더 큰 기쁨으로 이행하는 것과 작은 기쁨에 고착됨으로써 더 큰 슬픔을 겪게 되는 것을 참고해보면, 여기서도 화합과 불화를 좀 더 역동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니, 이어지는 정리와 주석들도 사회의 화합과 불화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신체의 한 부분이 과도하게 변용되는 기쁨으로서의 쾌함이 아니라 신체의 모든 부분이 동등하게 변용되는 기쁨인 유쾌함을 강조한다거나(4:43) 신체의 상이한 본성을 균등하게 그리고 동시에 지각하기 위해 현자는 여러 활동으로 감각을 실험한다거나 하는 것들이 그렇습니다.(4:45) 토론 중에는 유쾌함에 대해서 ‘밋밋한 즐거움’일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는데요. 지금은 다양한 것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하는 가운데 느껴지는 즐거움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변용하는 실험으로서의 유쾌함’과 ‘우중의 존재를 공동체에 복종할 수 있는 신민으로 전환하도록 노력하는 것’, ‘더 자주 화합하는 사회’ 이것들이 모두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주체의 해석학》에서는 ‘바람직한 관계로서의 우정’과 ‘직업으로서의 황제’가 윤리적 과제로 도출된다는 것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우정은 우정을 맺은 서로에게 유용해야 하고, 오직 유용한 한에서만 지속될 수 있는 관계 양식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유가에서 군신과 벗의 관계를 의(義)로 합한 사이라고 말하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이들의 관계는 하늘이 맺어준 부모자식의 관계와 달리 ‘의’가 합치하는 한에서만 유지됩니다. 따라서 서로의 ‘의’가 합치하는지 아닌지 끊임없이 점검하는 책선(責善)이 행해지죠. 처음에는 이게 엄청 엄격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저 우정을 ‘바람직함’으로 재단할 수 없는 특별한 무엇 정도로 여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대로 직업, 나의 생계를 꾸리는 활동에 대해서는 좀 하찮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상적이고 삶에서 중요한 것들에서 윤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어디서 윤리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윤리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영역은 국한되지 않지만, 적어도 윤리적 고민이 필요하지 않은 영역은 없습니다. ‘자기 배려를 통함으로써만 자기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조금씩 실감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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