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3학기 7주차 강의 후기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21-09-13 09:55
조회
118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을 읽고 있습니다. 푸코는 이 강의에서 서양의 주체가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로마, 기독교적 시기에 어떻게 다르게 주체화 되었는가, ‘자기 배려’가 각 시대에서 어떻게 작동했는가, 기독교적 시기를 거치며 근대까지 욕망과 쾌락이 어떻게 분리되고 쾌락을 포기해야하는(자기를 포기하는) 방향으로 자기 배려가 작동하고 있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계보학적으로 파헤칩니다. 푸코는 우리가 ‘자기’라고 하는 것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고, 그 방식이 각 시대마다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통해 현대인들이 내면의 비대함을 당연시 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와 헬레니즘-로마 시대에 목적은 달랐지만(정치적 목적과 자기라는 목적) 자기를 알고, 자기를 돌보는 ‘자기 배려’는 자기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삶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자기’를 고집한다는 점에서 외부에 열려있지 못하고 닫혀있어 불통이라는 점에서 해체해야 하는 무엇 쪽으로 생각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주체의 해석학』을 통해 ‘자기’는 해체되어야 하는 무엇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수양하고 훈련하여 구축하는 무엇, 제작(창조)하는 무엇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보다 긍정적인 방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채운샘 강의는 이 맥락에서 우리가 느끼는 쾌락이 죄의식을 가지고 금기시해야할 것이 아니라 활용해야할 것으로 푸코가 1975년부터 1985년 사이에 『성의 역사』 1권~3권에서 연구했다는 사실로 시작했습니다. 'guilty pleasure' 라는 용어만 보더라도 우리는 쾌락을 쫓으면서도 쾌락을 죄악시하는 이중적인 윤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푸코는 그리스 로마 문헌에서는 욕망과 쾌락을 분리하고 있는 지점은 찾을 수 없고, 단지 쾌락에 대해서 ‘자기’가 노예 상태인지 또는 해방 상태인지를 문제시 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의 역사』의 부제가 바로 ‘쾌락의 활용’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쾌락은 금지 항목이라기보다 활용해야 하는 항목입니다. 그들에게 쾌락은 지금과 같이 저속한 것이어서 금기시해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고대인들은 어디까지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가, 쾌락으로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 쾌락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활용할 능력이 없으면 쾌락은 소용이 없어지기 때문이지요. 쾌락은 그들에게 양생술의 문제였고, 이 맥락에서 쾌락이 어떻게 활용될 때, 자신을 위한 것인가를 사유했습니다. 자신에게서 생성되는 무엇, 그것이 쾌락이라도 자기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고대인들의 자기 배려가 느껴집니다. 그들은 쾌락을 문제 삼기보다 쾌락이 자기의 역량과 관련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성의 역사』에서 푸코의 질문도 ‘쾌락이 어떻게 활용되어야 자신을 위한 것이 되는가?’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정서는 금지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일어나는 정서의 활용이야말로 사유해 봐야할 지점이 될 것입니다. 푸코의 ‘쾌락의 활용’의 맥락과 결을 같이하는 들뢰즈의 생성의 관점에서 도출된 ‘되기의 윤리학’에서 우리는‘어떻게 우리 자신이 기쁨으로 마주치는 변용을 구성할 것인가’라는 들뢰즈의 질문을 볼 수 있습니다. 푸코와 들뢰즈의 질문들은 쾌락과 욕망의 긍정에서만 도출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주체는 무엇일 수 있을까요? 주체는 ‘나’로도 외부로도 환원될 수 없고, ‘나’와 ‘외부’가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낸 차원입니다. 그것은 만들어낸 차원이기에 재료의 고유한 물성과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의 관계인 독특한 실재입니다. 행동과 말로 드러난 자체가 바로 자기 자신 즉 주체이지요. 드러나지 않는 비대한 내면은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주체는 어떠할까요? 우리는 비대한 내면을 가진 외소한 근대인이기에 드러나지 않는 무엇을 찾는 작업에 즉 자기를 해석하는 작업에 힘을 과도하게 빼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숨어버려 해석해야 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육욕, 욕망, 음욕 등의 주요 요소들이 자리잡고 뿌리내리는 곳은 바로 자기 내부가 됩니다. 따라서 자기 포기 방향으로 윤리가 구성됩니다. 그리고 자기 내면이 생겨버렸기에 욕망이 내면화되었기에 현대의 정신분석학은 이 작업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욕망을 묻습니다. 이 과정에는 미학적 차원이 실종됩니다. 자기와의 관계가 실종됩니다. 자기를 구축하는 과정이 자기 수양을 통한 자기 배려의 과정이 실종됩니다.

그리스, 로마, 기독교에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주체는 구성됩니다. 외부의 힘과 맺는 관계성이 주체이기에 마주침에서의 변용이 중요합니다. 마주침에서 어떻게 주름지어 넣는가에 따라 주체는 달라집니다. 푸코에게 주체화는 내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양식의 문제’입니다. ‘자기 수양의 미학과 결부된 일정 형태의 엄격성과 자기 포기를 강제하고 진정한 자기를 해석할 것을 강제하는 또 다른 형태의 엄격성’이 고대와 기독교 주체화의 차이입니다. 고대와 기독교 이후의 주체는 다른 존재 양식을 가지게 됩니다. 이 존재 양식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효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그것은 바로 철학이 ‘표상의 점검’ 과 ‘내면의 검열(심판)’이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고대의 철학에서 ‘표상의 점검’은 모든 사건 속(관계 속)에서 자유롭게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출되는 윤리는 자기 배려 안에서의 훈련들, 기술들이 되지요. 반면 기독교적 윤리는 ‘내면의 검열’을 통한 선악을 심판하고 악을 금기시하는 훈련이 됩니다. 양자의 윤리가 ‘금욕’을 선택 했지만 분명히 다른 접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인은 자기를 위하는 방향으로 가는 구축의 윤리를 발명하는 접근이고, 기독교적 인간은 자기 내면의 죄를 심판하여 자기 포기의 방향의 윤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접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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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13 12:27
    '자기배려'를 얘기하는 와중에 나온 '윤리시학'이라는 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윤리'는 장인의 제작물과 같아야 한다는 얘기였죠. 흠... 처음에는 어딘가에 보여준다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하하;;
    <주체의 해석학>을 읽으면서 특히 '윤리(ethos)'라는 개념에 꽂히게 됩니다. 스피노자가 자신의 책을 'ethika'라고 이름 붙인 것도 이해가 될락말락 합니다. 이제야 조금씩 재밌어지는데 끝이 보이니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