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절차탁마S 3학기 9주차 공지 '주체와 진실'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9-17 16:36
조회
135
추석이네요! 하지만 마무리 짓지 못한 에세이 때문에 마음이 무겁습니다아... 코멘트를 받으신 분들, 아직 완성이 덜 된 분들께서는 9월 27일까지 메일로 보내놓도록 하죠...! 모두들 파이팅입니다!

다음 시간(9월 29일)에는 《에티카》 5부 정리15(216쪽)까지, 《주체의 해석학》 3월 3일, 10일 강의 전·후반부를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정희쌤께 부탁드릴게요! 그럼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요컨대 우리의 ‘문화’라 부를 수 있는 역사적 현상과 절차의 총체를 통해 어떻게 주체의 진실 문제가 구축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왜 그리고 어떤 대가를 치르고 사람들은 주체에 대한 진실된 담론을 시도하였던 것일까요? 즉 사람들은 먼저 미친 주체나 범죄 주체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른 주체, 다음으로는 말하고, 노동하고, 생활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우리라는 주체, 마지막으로는 성의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개별적으로 우리인 주체에 대한 진실된 담론을 시도하였던 것일까요? 이 세 주요 형식하에서의 주체의 진실 구축 문제야말로 내가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집요함으로 제기하려 했던 문제입니다.”(285)

 

이번에 가장 얘기를 많이 나눴던 부분입니다. 저는 여기서 ‘문화’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읽었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를 묻고 있었더군요.^^;; 푸코의 우리는 지금 시대에서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느냐는 질문이 계속 머리를 울리네요. 우리가 접근하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이고,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일까요?

기독교적 맥락에서 진실은 내면의 목소리로 간주됩니다. 사건을 일으킨 주체의 의도와 욕망 같은 것이죠. 그것의 출처가 사탄이든 그밖의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의 의도와 욕망은 지복에 이르는 데 있어서 방해가 됩니다. 지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신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어야 하죠. 따라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실 문제는 ‘자기 포기’와 연관됩니다.

진실 문제가 자기 포기와 연관된다는 점에서, 지금 시대의 진실 문제-대가의 관계 또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지적한 전문가들의 앎이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야기겠네요. 온갖 영역에서 합리적인 전문가의 앎이 판치고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아마추어의 앎, 각자의 경험 속에서 확립한 앎은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고 이론화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문가의 앎에 복종하려면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건강’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고, ‘미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떤 식으로 삶을 계획할 것인지는 이미 사회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본받을 수 있는 모델도 제한됩니다. ‘자기 포기’, 윤리 없음이야말로 고통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혹은 진실을 소유하기 위해 주체가 자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시대도 있습니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 로마, 헬레니즘의 문화였죠. 각 문화마다 차이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이 시대들에는 ‘자기 포기’라는 테마가 없었습니다. 설령 ‘금욕주의’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겪어야 할 주체의 자기 수행이었죠. 푸코는 헬레니즘 시대의 금욕주의, 그러니까 아스케시스(고행)가 ‘장비를 갖추고 소유하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스케시스의 과정이 육상선수적 훈련과 오버랩됩니다.

 
“따라서 타자나 자기를 초극하는 것이 관건이 아닙니다. (…) 훌륭한 운동선수의 훈련은 아주 기초적이지만 모든 상황에 적응할 수 있기 위해, 또 그것이 충분히 단순하고 잘 습득되었다는 조건하에서 필요하면 즉각적으로 운용 가능할 수 있기에 충분히 일반적이며 효과적인 동작에 대한 훈련이어야 합니다. 가능한 모든 상황에 필요하고 충분한 기본적인 동작의 습득이 적절한 훈련과 고행을 구축합니다. 그리고 ‘파라스케’는 우리 실존 전반에 걸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우리를 더 강하게 하는 데 필요 충분한 동작의 총체, 실천의 총체와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 현자의 육상선수적인 훈련입니다.”(349)

 

자발적으로 고행을 감내하는 이유는 타인보다 우월한 나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문제를 겪든지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적절한 대응 능력을 갖추는 것은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매뉴얼을 숙지하는 것과 다릅니다. 그것은 앞서 피지올로지아(자연학, 2월 10일 강의 후반부)를 분석하면서 얘기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제작된 자연에 대한 앎입니다. 여기에 보편적으로 인식해야 할 자연 같은 것은 없습니다. 앎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 주체가 고유한 유용함을 목적으로 조직하고 쓰임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푸코는 이런 종류의 앎을 ‘영적 지식’이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토론하다 보면 이분법으로 구분하게 되고, 그 중 하나만을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협소한 시야에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사실 대부분 같지만요!) 이번에도 그랬는데요. 굳이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두 가지 앎으로 ‘영적 지식’과 ‘전문가적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적 지식이 그 자체로 항상 주체에게 해가 되고, 결과적으로 나쁘기만 할까요?

사실 그렇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전문가들이 앎을 계속해서 밀고 나간 덕에 이만큼 편리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도 가능해졌으니까요. 물론 앎을 추동한 것도 전문가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살펴봐야겠지만요. 어쨌든 원자와 전자가 어떻다느니, 세계에 작동하는 힘이 어떻다느니 같은 이론들의 장점들도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주체이고, 그로부터 어떤 앎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숙고가 있어야겠죠.

전문가들은 전문가대로 이론을 발전시켜나가더라도, 비전문가인, 그러니까 아마추어이자 일반인인 우리가 그들처럼 지식을 탐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아갈 만한 어떤 새로운 이론을 개발할 의무나 사명감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저 어떤 상황에서도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되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한에서 어떤 종류의 앎을 소유할 것인지,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푸코의 분석을 따라가면서 철학의 목표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이 들고, 지금 하고 있는 공부들도 새로운 태도로 접근해야겠다는 소박한 다짐을 하게 됐습니다. 헬레니즘 철학자들의 이야기에서는 스피노자의 ‘선과 악, 유용함과 해로움’, ‘참고할 만한 인간 본성의 모델’ 같은 얘기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을 읽을수록 고대 중국 철학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사용된 에피소드들을 새롭게 해석하고 싶다는 욕구도 강해졌습니다. 새롭게 조명할 만한 에피소드들, 담론들이 참 많은 것 같단 말이죠? ㅎㅎ 일단은 방학 동안 푸코를 좀 더 세심하게 읽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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