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3학기 9주차 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21-10-01 14:40
조회
146
질문을 갖는다는 것, 자기의 질문을 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지평 속에 자신을 놓는다는 것, 문제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탐색한다는 것,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푸코의 문장들은 여전히 수려합니다. 아름답게 다가오는 문장들에 줄을 긋다 보면 학우들 말처럼 한바닥 가득 줄을 치게 됩니다. 그의 문장들에 심취해 읽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자신 때문에 막막해지곤 합니다. 어떤 것도 자신의 문제의식 없이 접하다 보면 손에 잡힐 듯 말 듯 모호함만 남아 길을 잃곤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부끄러워지는 요즘입니다. 이렇게 강의를 하고 글을 쓸 수 있는 그의 탁월함이 단지 재능만이 아니라 그의 수련과 연마에서 비롯되었을 거라고, 공부의 길에서 한없이 겸허해질 수밖에 없는 저로서는, 참으로 그가 희귀하고 고귀하게 다가옵니다.

‘파레시아’, 왜 푸코는 죽는 순간까지 이 문제에 천착했을까요? 그가 인생의 마지막 화두로 든 이 문제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솔직하게 말하기, 이게 뭐 힘든가, 스스로를 솔직한 사람이라고 여겨왔던 저로서는 처음 이 개념을 접했을 때 이것이 철학적 개념일 수 있는가 의문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느끼는 대로 다 말하면, 생각하는 것을 직설적으로 말하면 솔직한 것이라고, 내가 아는 것이 진실이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라는, 이런 생각은 언제부터 출현한 것일까요, 푸코는 이렇게 질문을 시작합니다. 사실 솔직하게 말한다고 할 때 그 솔직함은 어떤 기준에서 비롯된 것인지, 내가 느끼는 것이 옳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별로 고민을 안 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왜 푸코가 그토록 자기 진실의 주체 문제에 집중하는지 처음에는 낯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푸코의 문제의식의 핵심이 결국엔 진실과 주체의 관계, 참된 담론의 주체화의 문제였고 그것은 자기와 맺는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주체가 자기 진실과 맺는 관계는 윤리적 관계에 대한 문제이자 진실을 실천하는 문제가 됩니다. 진실과 갖는 윤리적·실천적 문제라는 것은 그것을 말함으로써 직면하게 되는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기도 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하기’, 사실 이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에 푸코가 주목하는 고대 헬레니즘 로마 시대에 파레시아는 스승의 의무였습니다. 침묵과 경청의 의무는 제자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스승과 제자의 의무가 전도된 것이 기독교와 자본주의에 이르러서입니다. 말하기의 주체가 제자나 듣는 사람이 된 것도 그렇습니다.

푸코가 니체의 계보학을 가져오는 것은 지금 우리의 전제와 관념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낯설게 볼 수 있는 다른 시대, 다른 조건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고대로 회귀하자는 것이 아니라 고대에는 지금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것들이 어떻게 정의되고 행해졌는지를 봄으로써 지금의 문제들을 다르게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자본주의라는 서양의 사고와 감성을 지배하는 두 가지 근본적 축에서 벗어나서 지금의 문제를 본다면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을까? 진실을 현시하는 것, 진실을 말하기와 실천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 고대 철학의 세계입니다. 기독교와 자본주의 바깥에서 보면 자기와의 관계가 문제화되는 방식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푸코는 그 과거를 통해 어떻게 우리 시대의 담론과 실천을 넘어갈 수 있는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진실과 주체 문제를 그토록 고민했던 푸코를 따라 주체화의 문제를 생각해봅니다. 나는 왜 이런 관념과 정서를 갖게 되었을까, 왜 이런 방식으로 외부에 반응할까, 내가 이렇게 듣고 말하고 쓰는, 이렇게 먹고 자고 걷는 이 모든 방식이 결국 나이며 주체화의 문제입니다. 예속된 주체로 살고 있는 나를 살펴보는 것, 자신의 변용 방식에 대한 고민과 탐색, 어떻게 다른 나가 될 것인가, 어떻게 다르게 관계 맺을 것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은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순간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위할 것인가의 문제인 것입니다.

내가 나와 맺는 관계 이것은 결국 내가 다른 모든 것들과 맺는 관계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다른 것들 타자를 경유하지 않고서는 나와의 관계 맺기는 가능할 수도 없습니다. 파레시아의 핵심은 자기배려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내면에 주의를 기울이고 열심히 생각해서 자기의 내면에 대해 안다고 하더라도 자기배려의 기술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진실이 실천될 수 있는 공동의 장, 함께 말하고 듣고 훈련할 수 있는 타자의 장이 필요합니다. 나만의 은밀한 정체성, 내 욕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 품행을 규제하는 것, 자신의 표상과 의식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실과 주체의 관계는 자기만족적 나르시시즘이 아닙니다. 진실은 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외적인 품행 가운데 현시됩니다. 신체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현시되어야 합니다. 발화의 주체와 행위의 주체는 그렇게 일치되는 것입니다.

비판으로서의 철학, 진실하다고 믿는 바를 말해야 하는 의무 그것이 비판으로서의 철학이 가지는 권리이자 의무이며 역량이라는 것, 철학을 비판으로서 정의했던 푸코는 그러므로 파레시아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리의 추구도 이론적 관조도 아닌 푸코가 말하는 비판으로서의 철학은 무엇일 수 있을지. 철학적 고행, 철학은 실천의 문제이며 고행을 통해서 형성되는 기술의 문제입니다. 고행은 결국 윤리의 문제이자 윤리는 삶의 기예를 발명하는 문제, 자신이 품행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철학이, 오늘날 철학이 무엇일 수 있는지, 철학을 공부하는 자의 삶은 무엇일 수 있는지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았습니다. 부끄럽지만 제자 학생이 아니라 여전히 하숙인이나 임차인으로서 머물러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일상에서 드러나는 품행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하루의 일상을 점검하는 일을 하찮게 여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철학을 공부하고 있는지, 잊은 듯 살고 있었던 이 질문 앞에 자신을 세워 보는 일, 이것이야말로 어느 때보다도 더 시급하게 저에게 요청되는 자세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공부의 정도는 따로 없다는 것, 독서 글쓰기 명상 산책, 읽고 말하고 쓰는 것,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사유와 연관시켜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실의 용기를 연마하는 길이자 철학적 고행임을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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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02 09:51
    '자기의 질문을 갖는 것'과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고민하는 후기네요! 푸코를 공부할수록 우리에게 왜 철학이 필요한지, 어떤 것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추상적으로 혹은 당위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공부하는 일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요. 무엇보다 지난 5년 동안 무엇을 말하고, 써야 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던 저 자신을 긍정하게 됐습니다! 스승의 말을 경청해야 할 의무를 지닌 제자는 5년 동안 침묵해야 한다니 ㅋㅋ 웃기기도 하지만, 그런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저의 지난 시간이 꼭 잘못된 게 아니었어요. 물론 이제는 그 다음을 생각해야겠죠. 출발지점은 다르지만 현정쌤과 같이 고민을 발전시켜가고 싶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