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열 번 째 시간(7.21) 후기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20-07-25 17:26
조회
108
<담론과 진실>을 마지막으로 장장 10주에 걸친 푸코 읽기가 끝났습니다. 아직 어마어마한 푸코의 다른 저작들이 있으니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읽은 것과 세미나 때 토론에서 들은 것만으로도 굉장히 당혹스럽고 혼란스럽고...그럽니다. 세미나 시간에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하다가 일어난 혼란스러움을 다 정리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쓴 후기가 되었습니다.

푸코의 책들을 읽고 세미나를 하면서 계속 든 생각은 내가 어떤 식으로 나와 관계하고 있는지,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나인지, 진실 혹은 진리를 무엇이라 여겼고 그 기준을 무엇이라고 여겼는지, 배운다는 것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내가 자명하다 여기고 내 기준에서 옳다고 여기며 했던 행위들이 자만과 기만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주체의 문제가 내가 진실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푸코가 자신의 연구는 주체의 문제와 연관된다고 했던 말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읽은 푸코의 저작들에서 저는 매번 통치성이 어떻게 주체의 문제와 연결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아 넘어가곤 했는데요, 이번에 읽은 <담론과 진실>에서는 푸코가 주체와 진실을 문제 삼는 부분을 읽으면서 제가 주체, 통치성, 진실 등의 개념을 각각의 개별적인 대상이라고 여기고 그 관념에 계속 무언가를 덧붙이려 했다는 걸 조금 알았습니다. 관념에 붙들려 있는 그 자리에서 푸코는 매번 다른 도주들을 제시하며 제가 설정한 주체와 진실의 관계를 뒤짚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담론과 진실>에서 푸코는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의 진실 말하기, 파레시아의 다양한 형태와 이를 둘러싼 담론들을 연구합니다. 푸코가 여기서 보고자 했던 것은 진실 말하기 개념의 변천사가 아니라 진실이 어떻게 구성되는가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요. 후자의 방식이 여전히 헷갈립니다. 저에게 익숙한 것은 진실이 무엇인지, 어디서 어떻게 탄생해서 변해 왔는가를 알아서 정확한 진실(?)을 내 삶에 적용하는 전자의 방식인데요, 4강에서 푸코의 관념사와 사유사의 비교를 통해, 변천사를 보는 것과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보는 방식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관념사는 한 관념을 그 탄생과 발전, 그리고 그 관념의 맥락이 되는 다른 관념들의 구축에 입각해”(200쪽) 분석하는 것이고, 사유사는 “아무 문제 없이 수용되고 친밀하며 조용했던, 아니면 적어도 논의의 여지가 없었던 경험의 장 혹은 실천의 장이 토론과 논쟁을 발생시키고 새로운 반응을 이야기하며 습관 실천, 제도의 위기를 발생시키는 방식에 대한 분석”(200쪽)이라고 합니다.

비기너스 세미나 초반부터 때마다 계속 강조한 말이 푸코의 책에서 어떤 정답이나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 말을 놓치고 이 말이 언제 생겼는지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변했는지를 추적하게 되는데요, 그러다 보면 끝이 없는 미로에서 헤매는 기분이 듭니다. 이것이 푸코가 말하는 관념사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념사가 문제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관념사는 문제 지점이 어딘지, 정답이 무엇인지 명증하게 가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계속 혼란 일어납니다. 명확하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마치 어떤 명확한 실체와 그 구성 요소들이 존재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잘 붙잡히지 않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변수들과 조건들과 별개로 어떤 정답이나 실체 같은 게 따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관념사의 방식은 나와 진리 간의 분리를 전제하기 때문에 나는 늘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이고, 진리는 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와는 달리 사유사의 방식은 고정 되고 절대적인 진실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가 어떤 것과 관계 맺는 방식을 문제 삼으면서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더욱 능동적으로 관계 맺는 길을 모색해 보게 합니다. 외부의 어떤 인식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해 고심하는 방식, 이러저러한 것들에 마음을 쓰는 방식, 아마도 광기, 범죄, 섹스, 자기 자신 혹은 진실을 돌보는 방식”을 보는 것입니다. 제가 ‘나’라고 여기는 것과 ‘진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보면, 실체적인 주체와 명증한 진실이 있다고 여기지만 이런 행위를 통해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구성되고 있을 뿐입니다. 행함으로써 주체가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진실에 앞선 나, 주체에 앞선 진리가 있다는 생각의 근거가 바로 이렇게 믿는 마음과 행위 외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정답으로서의 파레시아가 아니라 실천 속에서 구축해 나가는 진실 말하기와 탐구를 계속해서 일리치의 책들을 읽으면서 이어가 봐야겠습니다.
전체 2

  • 2020-07-28 13:50
    푸코는 진실과 주체와의 관계를 보기 위해, 파레시아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관념사의 결로 파레시아를 사유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당연하고 여겼던 행동들을 낯설게 봄으로써 파레시아를 행동해보려고 합니다. 어렵지만, 그러기에 재밌는 푸코와 파레시아. 다음번 일리치를 읽어가며, 우리에게 낯익은 것들이 낯설은 경험이 되는 단 한번의 경험을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깔끔한 1학기 정리 같은 후기 감사합니다.

  • 2020-07-28 15:54
    사유사와 관념사에 관한 부분에 꽂히셨군요~ 저는 이 부분을 푸코 자신의 방법론에 관한 설명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갔는데, 샘께서 각각의 문제틀에 담긴 윤리적 태도나 해석의 의지까지 읽어내고자 하신 부분이 제게 도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