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열 두 번째 시간(8.11)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8-06 23:03
조회
122
이번 주에는 채운샘의 《담론과 진실》 정리 강의 및 《ABC :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인트로 강의가 있었습니다.

채운샘은 이런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하셨습니다. ‘자기 배려’를 다른 말로 바꾸면 무엇일까? 저는 속으로 ‘아스케시스?’하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채운샘이 말씀하시려던 것은 ‘자기 통치’였습니다. ‘자기 배려란 다른 말로 하면 자기 통치다’, 저는 이 말을 듣고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배려라는 개념을 권력의 문제와의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점을 제가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우리가 지난학기에 읽었던 텍스트들을 상기해보면, 푸코의 고민은 ‘통치성’에 있었습니다. 그가 통치성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내게 된 것은 권력의 억압적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죠. 그리고 이런 고민은 푸코가 놓인 시대적 조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맑시즘은 권력을 억압적인 것으로만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기득권을 무너뜨리고 착취를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를 파괴하는 것을 저항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억압적 권력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소련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기대와는 달리 민중은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변신하지 않았습니다.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자 생산성은 늘지 않았고, 능동적 품행과 해방적 욕망이 펼쳐지기는커녕 공산주의는 자유에 대한 억압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에는 고유한 통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푸코의 말처럼 소련은 자본주의 문화를 의식적으로 부정하면서 ‘자본주의가 아닌 것’으로서 스스로를 규정했고, 동시에 소련의 엘리트들은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 온갖 기술들이나 포드주의와 같은 생산 시스템들을 열심히 수입했습니다. 괴물 같은 부르주아 권력과 싸우면서 소련은 그 자신 또한 괴물이 되어갔던 것이지요.

이에 푸코나 들뢰즈 같은 세대의 몇몇 철학자들은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합니다. 인간은 정말로 의식적이고 이성적이며 의식과 이성으로 세계에 참여하고 세계를 변혁하는 존재인가? 자본주의의 성공은 그 반대를 입증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거나 의식을 건드리는 게 아니라 욕망을 자극합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무한 경쟁을 욕망하도록 하고 오직 스스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스스로의 예속을 재생산하도록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느끼고자 하는 욕망과 힘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힘들은 때로는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라도 하는 스스로의 예속을 위해 싸우기도 합니다. 자본주의는 바로 이 지점을 성공적으로 공략했던 거겠죠. 인간이 이성이나 의식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면, 저항의 문제 또한 달라져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적들을 무너뜨리고 억압을 철폐한다고 한들 인간의 욕망과 품행이 저절로 능동화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또 인간들이 스스로의 예속을 욕망하는 한 의식과 이성으로 쌓아올린 유토피아는 금세 디스토피아로 돌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니까요.

그래서, 이제 저항의 문제는 의식적으로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공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의, 정치적인 것에서 내면적인 것으로의 이동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변혁’의 이미지를 바꾸는 것입니다. 저항과 변혁을 의식적 차원으로 환원할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이상’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환상을 현실로 옮기는 것, 현실이 장단을 맞춰주지 않을 때에는 얼마든 그것을 비난하고 비장한 슬픔에 정서에 사로잡힐 준비를 한 채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모든 면에서 충돌하면서도 한 가지 공유했던 것은 ‘산업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더 많은 재화를 생산해내면 그것으로 더 풍요롭고 이상적인 완벽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믿음. 저항의 문제를 무의식의 차원으로 옮긴다는 것은, 정치와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과 결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문제는 어떤 완벽한 외부 조건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다른 누군가(전문가)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화폐와의 관계, 국가와의 관계, 지식과의 관계, 공간과의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바꾸는 것(우리가 다른 것들과 맺는 관계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이 중요해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방적으로 길들여지지 않는 실존의 양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저항이 되는 것이죠. 푸코는 이러한 저항의 다른 이미지에 대한 영감을 이란 혁명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거기서 푸코는 혁명이 꼭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빼앗고, 자신에게 결여된 것(부, 권력)을 되찾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봅니다. 혁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의 품행을 규정하기 위한 행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고대의 자기 배려는, 푸코가 저항의 다른 이미지를 사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하나의 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자기 배려로부터 발견한 것은 바로 ‘영성’이라는 차원입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욕망, 실험, 저항 같은 말들을 자주 접하게 되고 또 사용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지극히 상식적인 차원에서(다시 말해 근대적 사고방식에 입각하여) 이해할 때 우리는 제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을 주체, 의식, 자아에 귀속시키기 때문이죠. 가령 욕망과 무의식의 변혁이라는 문제를 다시 의식에 귀속시키게 되면, 결국 이전에 욕망하던 것 말고 다른 것을 욕망한다거나 (프로이트처럼) 모순되고 억눌린 무의식을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한다는 식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때 자기 배려란 결국 주체가 상상하는 행복하고 안정된 몸과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리죠. 수행은 ‘웰빙’ 혹은 ‘힐링’으로 수렴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 즉 존재의 외부로의 열림이죠.

우리의 뇌는 일종의 수신기라고 합니다. 우주를 이루는 온갖 에너지들, 파동들, 힘들과 교류하는 수신기. 채운샘이 전해주신 예에 따르면 9.11테러 당시 쌍둥이 빌딩에는 평소의 1/3정도의 사람들만이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커다란 사건이 일어날 때에는 우주의 에너지장이 달라지고, 그것이 그 안에 속한 존재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죠. 사족이지만, 니체는 어떤 작용의 근본적 원인은 축적된 힘이며 특정한 작용이 일어나게 된 구체적 계기(가령 주체의 의지)는 그 작용에 있어서 단지 우연적이고 부차적인 역할만을 한다고 말합니다(배를 움직이는 것은 증기이지 조타수가 아니라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특정한 사건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원인-결과의 관계에 따라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운동 속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화되는 것이 됩니다. 또 우리의 무의식은 어떤가요? 진화론자들은 우리의 무의식에 진화의 전 과정의 흔적들(정보들)이 잠재되어 있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무의식은 ‘나’로 환원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도, ‘생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죠. 우주적 무의식!

이러한 존재론에 입각해서 볼 때 우리가 국부적이고 개별적인 의식만을 가질 때, 의식과 자아와 이해관계 같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차원들을 실체화하여 그것이 ‘나’라고 믿을 때 우리는 다른 모든 것들과 편협하고 너절한 관계밖에는 맺을 수 없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가 강제하는 중심적 가치들 안에서만 사유하고 욕망하고 관계할 수 있겠죠. 근대란 인간이 ‘나’로 축소되어온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데카르트는 인식주체로서의 나를 실체화했고(‘나는 나다, 이것은 의심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개인들을 그들이 속한 대지로부터 뿌리 뽑아서 ‘필요’와 ‘이해관계’에 종속된 경제적 외계인으로 만들었으며, 신자유주의는 경제인들을 관리되고 경영되어야 할 자본 그 자체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나다’라고 말하며 신에게 도전장을 내민 근대적 주체는 결국 자본이 되고 말았네요.

푸코가 관심을 가진 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나’를 고정된 항으로 놓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느낌을 모조리 자기화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근대적 버전이 한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영적인 차원을 경유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고대적 버전이 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철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들에게 공부하고 수행하고 배운다는 것은 어떤 정보를 습득하거나 기술을 연마하는 것(결국은 ‘나’를 강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게 배움이란 개체적 차원으로 환원되지 않는 우주적 무의식을 일깨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사유의 출발점은 자연학입니다. 이때의 자연학도 역사 ‘자연’에 대한 ‘대상적 앎’을 수집하는 것과는 무관하죠. 자연학이란 자기 자신이 다른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 있음을 이해하도록 하는 ‘관계적 앎’을 체화하는 것입니다. 고대철학에서의 양생 또한 자기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맞는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고대인들에게 ‘카이로스’가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도 우주 전체의 운동 속에서 자신의 활동을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아무튼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대인들의 자기 배려에서 ‘자기’란 의식이나 자아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으로 되어가고 있는 무엇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는 푸코가 고민한 무의식의 변형으로서의 저항의 문제에 핵심적인 힌트를 제공합니다. 무의식을 변형한다는 것은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우주적 관계 속으로 돌입한다는 것을 뜻하며, 그때 무의식의 변형은 단지 ‘나’를 더 나은 버전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출현시키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러한 관점에서 무의식의 변형은 ‘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주체가 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오직 공동의 장 속에서만 진실의 형태가 실현됩니다. 진실은 책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면에 감춰져 있는 것도 아니며, 서로 충고하고 점검하며 함께 각자의 삶을 조형해가는 관계 속에만 존재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일리치의 텍스트에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와 《텍스트의 포도밭》에서 일리치는 읽고 쓰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 그리고 정보화된 현대사외에 이르기까지 매체의 변화와 더불어 읽고 쓰고 말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활동으로 변이해왔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변화를 진보라고 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리치가 지적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손을 뻗을 때에도 사람은 글월을 향해 손을 뻗는다”(《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15쪽)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즉 우리가 텍스트와 맺는 관계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맺는 관계를 함축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손쉽게 텍스트를 전송, 저장하고 온갖 정보들에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앎을 바이트 단위로 환원하고, 기억을 의식으로 환원하는 지금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은 확대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구술문화에서의, 전승되고 매번 재활성화되는 것으로서의 앎과는 어떻게 다를까요? 지금 읽고 쓰고 말하는 활동과 더불어 우리의 품행은 어떻게 인도되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남은 텍스트를 읽어나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주에 읽을 분량은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128쪽과 보조자료 중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1, 2장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공통과제가 있습니다. 자유롭게 쓰시되 읽기, 말하기, 쓰기라는 텍스트의 주제와 우리 세미나의 큰 주제인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는 문제를 붙들고 가시면 됩니다.
간식은 수정샘과 보은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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