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4 열 세번째 시간(08.18)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8-16 17:40
조회
94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를 읽다보면, ‘문자’란 우리의 생각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투명한 매개 같은 것이라는 상식이 간단히 깨집니다. 일리치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낱말, 언어(모국어), 책 그리고 문자는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발명되고 발전해온 기술들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 어떤 글을 접하고 그것을 읽어내는 방식, 타인들과 또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방식은 이런 기술들과 더불어 변화되어 왔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리치는 질문합니다. 알파벳이라는 도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규정해왔는지를. 여기서도 일리치는 “도구를 적용 또는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현실을 형성하는지가 아니라, 도구가 우리의 생각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도구의 사용에 따라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질문합니다.

일리치는 먼저 ‘말의 문화’에서 ‘글의 문화’로의 이행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물론 단순히 문자가 발명되어 인간의 문명이 진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알파벳’의 발명입니다. 구술문화에서 언어는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이었고, 기억은 마음 속 서랍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전승 속에서 매번 새롭게 현실화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리만을 기록하는 알파벳은, ‘말’을 시간적 장으로부터 뽑아내어 영원한 공간 속에 밀랍처럼 고정시킵니다. 그리고 그는 12세기 중반부터 13세기 말 사이 유럽에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합니다. 그에 따르면 “이때부터 신뢰, 권력, 소유 그리고 일상적 지위 등은 알파벳이 수행하는 기능이”(61쪽) 됩니다. 이제 세계는 글자로 고정시킴으로써 완전히 소유할 수 있는 외부 대상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과거에 “소유라는 것은 엉덩이로 하는 것”, 즉 어떤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 땅을 깔고 앉는 것이었으나, 이제 사람들은 무언가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문서화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또 과거에 사람들 사이의 신뢰는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구체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효력을 지니는 ‘맹세’를 통해 보증되었으나 이제 그것은 기록과 서류, 문서로 된 증거물의 매개를 거칩니다. 이렇게 인간은 “글월을 켜켜이 쌓아 만든 케이크처럼”(16쪽)되기 시작합니다.

“나는 분수령을 따라 걸어가며 왼쪽과 오른쪽이 심오하게 다르고 대단히 대조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다. 성의 세계는 오로지 그 속에서 살아남아 싹틔우고 있는 그 나머지의 성별이 있는 덕분에 결속이 유지된다. 인공두뇌를 모형으로 삼는 세계, 컴퓨터를 감각 지각의 뿌리 은유로 삼는 세계는 위험하며, 그 한가운데에 텍스트 기반의 문자문화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동안만 의미가 있다. 수송체제는 사람에게 다리가 있어서 자동차로 걸어가 차 문을 열 수 있을 때에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병원체제는 사람들이 삶이라고 하는 전혀 수동적이지 않은 활동에 관여하는 동안에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나는 저 분수령의 한쪽 풍경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설교자로 보이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분수령을 따라 생각하고 탐색하며 걸어가면서, 비대칭적이면서 상호보완적인, 비대칭적이면서 서로 심오하게 다른 두 개의 영역 사이로 길을 찾아나가려 애쓴다. 한 눈을 통해서만 현실을 지각하면 생각은 죽어버린다.”(《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265~266쪽)

그런데, 알파벳이라는 도구에 대한 일리치의 연구에서 우리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그의 시선이 놓인 자리인 것 같습니다. 그는 ‘분수령을 따라 걸어가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리치 박사님, 가지고 계신 데이터가 뭐지요? 박사님이 따르고 있는 프로그램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어요? 박사님의 접근방법은 어떻게 기획하셨나요? 저에게 전달하고 싶은 내용은 뭔가요?” 일리치는 이렇게 질문하는 학생들과 마주하며 문자문화를 연구했다고 말합니다. 즉 그는 문자문화가 종식되어 가고 있는 하나의 분수령 앞에서, 문자문화가 탄생하고 언어가 ‘모국어’라는 인공물로 대체되는 다른 분수령들을 봅니다. 왜 이런 작업을 하는 걸까요? 그래서 문자문화를 보존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요,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요? 그래도 문자문화가 정보화된 (스스로를 컴퓨터로 여기는 사람들의) 사회보다는 낫다는 걸까요? 아니, 그는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분수령의 양쪽을 모두 살피는 것은, 한 눈을 통해서만 현실을 지각하면 생각은 죽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한쪽 눈으로만 볼 때 우리는 새로운 기술들과 그것들에 의한 변화들을 우상화하게 됩니다. 혹은 그것이 생기기 이전의 아름다웠던 과거를 우상화하게 되죠. 일리치가 택하는 방법은, 역사의 단절 가운데에 자신의 시선을 위치시킴으로써 오래된 우상들과 새로운 우상들에 현혹되지 않는 사유의 자유로움을 구사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를 끝까지 읽고, 보조자료 중에서 《언어 제국주의란 무엇인가》의 세 번째 논문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영아샘과 미영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