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4 열 네 번째 시간(8.25)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8-23 00:21
조회
131
이번 주에는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6, 7장과 결론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는 언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책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쉽게, 언어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투명한 매개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자체의 역사성과 정치성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지지 않죠. 언어는 도구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 중 하나죠. 우리는 언어로 생각을 하고, 대상을 인식하고, 대화를 나누고, 전쟁을 벌이고, 자기 자신을 인지하죠. 그리고 언어는, 다른 모든 도구가 그렇듯 그것을 사용하는 우리 자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합니다. 날개를 달고 날아 가버리는 말을 구체적인 시공으로부터 뽑아내어 영구히 보존하는 능력을 지닌 ‘알파벳’은, 기억과 자아와 진실의 개념을 출현시켰습니다.

이번에 읽은 부분들에서 저자들은 ‘문자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한편 문자문화 이후의, 새롭게 출현하고 있는 컴퓨터 문자문화의 전조들 혹은 징후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선 6장에서는 제프리 초서, 다니엘 디포, 마크 트웨인의 작품들을 분석하며 ‘허구’의 출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솔직히 이 챕터가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토론 때에도 대체 일리치와 샌더스가 별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 세 작가를 거론하며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 맥을 정확히 짚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희가 이해할 수 있었던 부분은 저자들이 진실의 영역과 허구의 영역 각각이 실체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었습니다.

“완전한 거짓말은 생각한 것을 말하기에 앞서 생각을 먼저 할 수 있는 자기를 전제로 한다. 생각은 기억을 하나의 글월로 인식할 때에만 형성하고 재형성하고 탈바꿈시키는 재료가 될 수 있다.”(130쪽)

오랜만에(?), 푸코의 《담론과 진실》을 복기해봅시다. 푸코는 고대세계에서 ‘진실’이란 데카르트적 명증성이 아니라 특정한 실천에 의해 보증된다고 말했습니다. ‘진실’이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의미의 ‘팩트’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자의 평판이나 품행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자신이 말한 바대로 살아간다는 것을 뜻했고,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품행을 조형하고 있지 않은 자에게는 진실에 접근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진실 되지 못하다는 것은 정념에 사로잡혀 자신의 품행을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뜻하지, 속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자신의 본심과 다른 무언가를 말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날아가버리는 말과 분리된 영구보존 가능한 문자적 기억과 행위와 사고에 앞서 먼저 존재하는 밑불과 같은 자기가 탄생한 이후에야 모순된 생각을 말한다는 의미의 거짓말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이란 안정된 내면과 자아의 형성을 전제로 하는 개념인 것이죠.

저자들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분석하며 거짓말의 탄생에 관해 이야기를 합니다. 초서는 최초의 작가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최초로 이야기를 발명했다거나 최초로 그것을 글로 남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최초로 추상적인 진실의 영역을 의식하면서, 작가로서 진실이 아닌 어떤 세계와 이야기를 창조해낸 사람입니다. 그는 전승되는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자, 악기의 리듬과 운율에 따라 이야기가 자신을 통해 펼쳐지게 하는 자가 아닙니다. 저자로서 거짓말의 능력을 사용하여 이야기를 자기 손가락에서 빨아내는 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창조자’를 자처한다는 것이 신성모독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문자능력을 이용하여 인물들과 사건들을 창조해내는 것은 창조주 신의 권한을 침범하는 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화자로서 “자신을 거짓말쟁이, 즉 속이려는 의도를 지닌 채 사소한 거짓말과 꾸며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139쪽)으로 내세웁니다. 어쩌면 이것은 소설의 기원에 놓여 있는 아이러니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는 어떤 이야기든 맘먹은 대로 꾸며낼 수 있는 절대적 권능을 지니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를 거짓말쟁이로 격하시키는 한에서만 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초서는 새로운 종류의 진실성, ‘자기’와 ‘기억’에 구속되는 진실성을 구성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러한 진실을 거짓의 영역 안에서 구축해야 했죠. 디포 또한 새로운 진실성을 구성합니다. 《역병의 해 일지》에서 그는 ‘말의 관료화’ 과정을 묘사합니다. 초서와 디포 사이에는 인쇄기의 발명이 있었습니다. 초서는 여전히 구술문화의 영향 하에서 자신의 작품을 청중/독자들에게 낭송해줬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디포는 자신의 소설을 ‘출판’했고, 그 소설 안에서 활자라는 실체로서 권위가 인증되며 ‘전염병처럼’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관료화된 언어를 다룹니다. 소설의 화자는 자신이 ‘역병의 해’에 관하여 관찰하고 기록한 바를 서술합니다. 그에 따르면 역병이 퍼진 해에는 신문이 없었기 때문에 관련된 소식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지만, 어느 순간 장관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진상을 파악하고 소식을 알리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리하여 역병은 소문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관료들과 전문가들의 공식적인 증언을 통해, 그리고 그들이 입증하는 숫자들 안에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와 더불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들은 진실의 능력을 상실하고 관료화된 언어, 활자로 인쇄된 말들에 복종하게 됩니다.

초서가 진실을 구성해낼 수 있는 문자능력과 신중하게 거리를 뒀다면, 디포는 관료화된 말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가져와서 역사적 허위를 구성합니다. 그러나 역시 여기에도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디포는 부정확한 숫자들을 멋대로 꾸며냄으로써 1665년에 실제로 영국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소설의 연관성을 흐려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실’이란 언어와 더불어 구성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즉 디포는 어떤 실체적 진실도 참조하지 않고서 그럴듯한 역사적 허위를 꾸며낼 수 있었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관료화된 말이 구성하는 ‘사실’은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단지 언어적 구성물일 따름이라는 겁니다.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가 더 없이 강렬하게 체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죠.

마크 트웨인은 한 발 더 나아가서 문자를 통해 문자능력의 함정과 한계를 드러냅니다. 그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허클베리는 올바른 철자법과 올바른 문자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는 교양인들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은 소설을 눈으로만 읽는 점잖고 교양 있는 독자들의 신경을 건드립니다(잘못된 철자는 눈으로 읽을 때만 불편을 야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허클베리가 적절한 문자능력을 갖추지 못하고서도 이토록 훌륭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허클베리와 짐을 등장시키며 독자들에게 문제를 제기합니다. “허클베리의 무지한 침묵을 통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자능력에 얼마나 강하게 속박당하고 있는지를”(154쪽) 보여줍니다. 우리가 문자능력에 속박되어 글로 표현되지 않는 말들, 적절한 문자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들을 없는 셈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우리의 귀에 닿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무지한 자들로 간주해버린 것은 아닌지. 그리고 또한 우리가 쓰고 있는 세련된 언어, 깔끔하게 정리되고 규칙이 잘 잡힌 언어로는 “자유에 대해 그리고 저 굽이쳐 흐르는 미시시피 강에 대해 글을 쓰기가 더 어렵지”(154쪽) 않은지 묻습니다.

토론 중 수정샘이 해주신 이야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제주도 사투리는 그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도 조금씩 다른데, 해안가로 갈수록 말이 덜 짧아진다고요. 바닷바람 때문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최대한 짧게 소리지르듯 소통을 해야 했고 그것이 굳어져 강하고 짧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주도 해안 사투리에는 미시시피 강은 잘 모르겠지만, 제주도의 바닷바람이 몰아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에 비해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은 참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구든 알아들을 수 있게 다듬어진, 교육된 언어. 정말로 이런 세련된 언어는 자유를 말하기에 부적합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끊임없이 ‘팩트’를 염두하고, 오류를 걱정하고, 익명의 독자/청자들 앞에서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언어가 자유를 논증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언어적으로 실현해낼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자기 언어를 갖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들이 모르는 전문용어와 참신한 지식들과 적절한 문장력을 갖추면 저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저의 무기가 될 언어를 갖출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던 것 같네요.

그리고 7장에서 저자들은 컴퓨터 문자문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문자화된 언어는 장소성과 신체성을 상실한, 그리고 그것을 포기함으로써 절대적 권위를 획득한 언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러한 문자화된 말들이 해체되어가는 징후가 뚜렷합니다. 저자들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새말(New speak)’, 그리고 ‘꽥꽥 일률’, ‘아메바 언어’ 같은 신선한 말들로 이 낯선 현상을 포착합니다. 그 중 저는 아메바 언어라는 개념이 흥미로웠는데요, 이는 에너지나 발전(development), 가성비 같은 말들처럼 전문용어로부터 파생되었으나 아무런 구체적 내용도 없고 상식적 지식이나 과학적 엄정함도 갖추지 못한 채 다양한 용법으로 분열해가는 단어들을 가리킵니다. 토론 중 우리는 지금의 인터넷 언어들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것들이 마치 아메바 언어나 새말과 닮았다는 것이었죠. 인터넷과 더불어 우리의 언어는 기이한 방식으로 변신했습니다. 격식을 차리지 않는 표준적이지 않은 말들이 끊임없이 생성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마치 문자문화에 맞서는 혁명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우리의 신체성이나 장소성과 무관하게 괴물처럼 자가 번식하는 인터넷 용어들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경험을 파편화하고 표준화합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이제 우리는 자기 언어를 갖기 위해 이중적 투쟁을 벌여야 하는 것 같다는 막막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표준화된 문자문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탈주를 자임하며 오히려 우리의 언어사용을 표준화하는 컴퓨터 문자문화와. 분명한 것은 언어에 관해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져야만 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남은 책들을 읽어나가며 문제의식을 더 구체화해보도록 합시다!

다음 주에는 《텍스트의 포도밭》과 보조자료에 수록되어 있는 《문해교육》을 읽습니다. 《텍스트의 포도밭》은 2장까지(~79페이지) 《문해교육》은 중간까지 읽고 오시면 됩니다(~38페이지). 공통과제 써 오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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