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4 열 다섯 번째(9.1) 시간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8-29 20:39
조회
126
얼마 전 오랜만에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었습니다. 김어준은 오프닝에서 자신의 여행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간단히 말해서 과거에는 런던, 파리, 뉴욕 같은 도시들을 보고 놀라워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그런 곳에 가도 한국과 서울이 그에 꿀리지 않거나 더 선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이번 코로나 정국에 특히 김어준이 그런 말을 많이 했죠. 이제 유럽이나 미국이 한국으로부터 배운다고. 이제 기준이 바뀌고 있다고. 그러면서 부정적인 뉴스가 많지만, 우리 한국은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는 (무슨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 포스터에 나올 것 같은) 말을 덧붙였습니다.

저는 김어준 정도 되는 사람(?)이 선진, 진보, 발전 같은 말들을 이토록 아무런 의심도 없이 쓴다는 것에 새삼 놀랐습니다. 김어준은 실체 없는 사대주의를 허물고 서양을 일종의 표준으로 삼는 뿌리 깊은 식민지 근성을 배격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선진, 진보, 발전, 풍요 등의 개념에 질문을 던지거나 그것을 전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럽이나 미국에 부여해왔던 가치들을 그대로 한국에 적용할 뿐입니다. 저는 이것이 전형적으로 분수령의 한 쪽만을 보는 사람의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관점, 하나의 가치기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기술, 도구, 문화, 삶 등 모든 것들을 하나로 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규정될 뿐 어떠한 대항적 품행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죠. 어떤 기술이나 제도, 시대적 조건 등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도록 하거나 하지 못하게 하는지는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형성하고 있는지는 질문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가치의 가치를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익숙한 통념들을 비트는 김어준의 도발적인 행보들이 어떤 당파성으로 귀결되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일리치는 훨씬 더 어려운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림자 노동》에서 일리치는 사회 형태를 선택하는 세 가지 차원에 대해 말한 바 있었죠. 일리치의 도식에서 x축에는 특권의 문제, “사회적 계층구조, 정치적 권한, 생산 수단의 소유, 자원의 배분 등 대체로 ‘좌’와 ‘우’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항목들”(《그림자 노동》, 23쪽)이 놓이고, y축에는 굳은 기술과 무른 기술이라는 기술적 선택지들이 놓입니다. 이 두 차원만을 고려할 때, 우리는 특정한 가치나 정치적 진영을 선택하고 고수할 수 있습니다. 분배와 복지, 나아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전문가의 통제가 아닌 기술과 도구의 민주적인 사용을 지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일리치는 여기에 z축을 추가합니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것은 ‘인간의 만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소유에서 만족을 찾을 것인가 행위에서 만족을 찾을 것인가. 우리가 z축을 고려할 때 평등이나 정의, 진보에 대한 상식적 전제들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결여하고 있는 한, 사회주의적 풍요와 자본주의적 풍요, 무른 기술과 굳은 기술 모두는 세계 안에 주거하는 우리의 자급자족적 역량을 탄압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분수령을 따라 걷는다는 것은 사유에 z축을 도입하는 것, 2차원의 상의 좌표 위에 표시할 수 없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고는 글 읽기에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귀에 들리도록 읽기,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읽기, 그리고 눈으로 읽기. 일리치에 따르면 이렇게 말한 사람은 그가 처음입니다. 이것은 후고가 분수령 위에서 사유하는 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후고는 읽기의 새로운 테크닉, 페이지를 구성하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구축되는 시기의 인물이지만 그러한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전유했습니다. 가령 지난 시간에 우리는 ‘자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후고는 ‘자신의 고향 땅의 달콤함에서’ 벗어나 자기 발견의 여행을 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봉건적 질서로부터 벗어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외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고, 후고의 가르침은 이러한 유행의 반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후고는 단지 유행을 반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책의 페이지를 통과하는 순례로 바꾸어놓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는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기존의 질서로부터 벗어나 곧바로 ‘나’라는 또 다른 영토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치유이자 모범인 지혜를 취하고, 보다 근본적인 우주적 질서에 접속하는 것으로서의 망명과 순례를 권합니다.

어쩌면 이런 지점들이 《텍스트의 포도밭》을 읽는 것이 어려운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아도 기억도, 지혜도 어떤 특정한 의미와 한 가지 용법으로 환원되지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분수령 위를 걷는 사유가들만이 우리 스스로 특정한 관점이나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사유를 구성하도록 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텍스트의 포도밭을 걷는 지적 순례에 계속해서 전심전력을 다 해봅시다.

다음주에는 《텍스트의 포도밭》을 5장까지(~144쪽) 읽고 <문해교육>을 끝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음주에는 채운샘의 개념 정리 강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럼 다음주에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으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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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1 13:06
    요즘 비기너스 세미나를 하면서 분수령이라는 단어가 계속 인상 깊게 남네요. 그 분수령을 따라 걸으면서, 어느 한쪽만을 보지 않을 수 있는 (다소 영적인?)힘. 일리치의 비판이 어떤 당파성으로도 귀결되지 않고 또 그런 만큼 자극적이지도 않은 것은 그 힘에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