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4 열 여섯 번째 시간(9.8)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9-06 16:11
조회
130
“자연의 모든 것이 하느님을 이야기하며, 자연의 모든 것이 인간을 가르치며, 자연의 모든 것이 그 본질적 형상을 재생산한다 ― 우주 만물 가운데 불임인 것은 없다.”(생 빅토르 후고)
“수도원에서 읽는 사람 ― 성가를 부르거나 글을 중얼거리는 사람 ― 은 행에서 말을 채집하며, 공적으로 사회적으로 듣는 분위기를 만든다. 읽는 사람과 더불어 이런 듣는 환경에 들어와 몰입해 있는 모두가 소리 앞에서 평등하다. 누가 종을 치든 아무런 차이가 없듯이 누가 읽든 아무런 차이가 없다. 렉티오 디비나는 늘 누군가 ― 하느님이든, 천사든, 들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모두 ― 의 코람coram, 즉 면전에서 하는 전례 행위이다.”(이반 일리치, 《텍스트의 포도밭》, 현암사, 129쪽)

후고는, 읽고 배울 의무를 보편적인 것으로 제시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독특하게도 폐쇄적인 성 베네딕투스 수도원의 전통이 아니라 로마적 시민 정신에 기반한 성 아우구스티누스 공동체의 전통을 계승합니다. 그리하여 “수도원 전통을 ‘탈 봉건화’”(128쪽)한 것이죠. 그러나, 배울 의무를 보편화하고 수도원과 사회의 경계를 완화했다고 해서 그가 근대적 의미의 평등을 설파한 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평등은 근대적 의미의 평등, 즉 모두가 똑같이 1의 기회와 권리를 지닌다는 식의 추상적이고 기계적인 평등이 아닙니다. 후고에 따르면 성직자와 평신도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본질적 형상의 현현인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합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는 각기 다른 욕망과 다른 역량을 지니지만, 각각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본질적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모두가 배울 의무를 지닌다는 것. 이것은 모두가 읽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즉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사처럼 진지하게 삶을 받아들이라는”(132쪽) 뜻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일리치가 말하는 자유와 평등의 이미지가 좀 더 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외부로부터 부여되거나 어떤 표준이나 동일화를 전제하지 않는 평등. 모두가 자신의 조건 속에서 스스로의 구원을 구성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의 평등. 일리치와 후고는 이러한 근본적인 의미의 평등을 믿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는 근대적 제도들이 전제하는 평등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한 제도들은 인간의 삶의 방식과 욕망을 평준화하고 능력을 기능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표준화된 모델에 따라 기계적으로 동등한 기회와 권리를 부여하죠. 그러한 의미의 추상화된 평등은 결코 실현될 수 없으며, 그것은 각자의 조건과 욕망에 결여와 차별을 재도입합니다. 읽기와 공부라는 것이 수사적 삶의 방식, 즉 본질적 형상을 실현하는 바람직한 삶의 모델과 결합되기를 그치고 삶으로부터 유리된 일종의 추상적 능력이 될 때, 그리고 모두가 갖춰야 할 보편적 기능이 될 때 그것은 자기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읽을 줄 아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차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어쩌면 이것은 교육의 역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지한 스승》에서 랑시에르는 앎이라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 소유될 수 있는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가진 자에 의해 갖지 못한 자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질 수 있는 무엇으로 간주될 때 교육은 끊임없이 불평등과 무능력을 재생산하는 과정이 되고 만다고 말했습니다. 교육의 과정 속에서 읽을 줄 모르는 자는 단순히 문해능력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지적능력을 비하하고 부정하는 시선 또한 내면화하게 된다는 것이죠. 후고가 말하는 읽을 의무, 그리고 그렇게 말할 때 그가 전제하는 사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종소리와도 같은 것으로서의 읽기, 진지하게 삶을 대하는 영적인 생활방식과 따로 떨어질 수 없는 배움은 그런 식의 (교육의) 역설을 함축하지 않습니다. 읽을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기능으로서의 문자능력을 획득하는 것도, 스스로를 끊임없이 무력화하는 보통교육의 논리를 내면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수도원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종소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조건 속에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영적인 생활방식으로서의 읽기에 동참한다는 것, 이것은 어떤 절제된 자유를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민호가 니체 후기에 써 주었듯이, 후고는 “완전에 이르기를 바라며 읽는 사람은 자유 시간을 활용하라고 요구”(95쪽)합니다. 그런데 이때 후고가 말하는 자유 시간의 활용은 ‘바카레’라는 용어를 함축합니다. 바카레는 ‘정해졌거나 자유로워진다’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데, 이 단어가 보여주는 자유의 이미지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방식에 동참하기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으로서의 자유의 이미지입니다. 읽을 의무에 동참하는 자는 어떤 우월한 능력이 부여해주는 더 많은 선택지로서의 자유를 갖게 되는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풍요가 제공하는 더 많은 여가시간으로서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일과 자유, 영적인 헌신과 세속적인 삶이 구분되지 않는 자율적이고도 유리됨이 없는 삶의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의존함이 없는 자유를 실현하게 됩니다.

“체누는 산사태를 암시한다. 나는 이것을 책이 일으킨 지진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후고도 그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인지했다. 그는 책의 구체제의 마지막 순간에 스투디움 레젠디를 새로운 이상, 시민의 의무로 제안하며 보편적 학습을 책과 나누는 대가 없는, 축제적인 교류, 자유 시간의 한가로운 교류로서 제안한다.”(132쪽)

다음 주 공지입니다. 《텍스트의 포도밭》을 끝까지, 보조자료 중 《검은피부 하얀 가면》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다음 주에는 채운샘 정리 강의가 있을 예정인데, 그와 관련하여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월요일 저녁까지 카톡방에 읽기와 쓰기에 관해, 앞서 읽었던 텍스트들에 관해 질문을 만들어서 올리는 것입니다. 숙고된, 핵심적인 질문을 고민해서 올려주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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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08 10:16
    중얼거리는 수사의 읽기가 말해주는 읽기의 평등이 재미있네요. 누가 종을 치든 그것이 일으키는 마음의 울림이 (제각각 다르다름에도) 평등하듯, 읽고 되뇌고 새기며 스스로 구원을 구성하는 생활에 참여하는 일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것. 뭔가 뜨끈해지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