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3학기 2주차 영화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0-03-16 19:18
조회
106
이번 시간에는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볼 예정이었습니다만, <러시아 정교>를 읽기도 했고, 그간 하도 들어온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누군지 궁금하기도 해서,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긴급수배 해서 감상했습니다. 러닝타임이 3시간 이상... 정말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CD가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들려오던 탄식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ㅋㅋㅋㅋ





<안드레이 루블료프>를 보면서 궁금했던 건 루블료프가 초반에 스승 테오파네스를 만나면서 했던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냥 제 짧은 감상으로는 흑백과 컬러로 나눠진 그 영화 자체가 믿음이 없는 세계/믿음을 회복한 세계로 보이기도 했고요. 루블료프는 테오파네스의 이콘을 보면서 어떤 믿음이 느낀 것인지? 문외한인 저로서는 잘 알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점점 진행되면서 이 사람이 세상에 대한 어떤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좀 알 것 같았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유다처럼 같은 민족을 이민족에 팔아버리는 지배자, 어리석음에 물들어 죄없는 사람을 고문하는 대중, 뜻을 함께하는 수도사들 사이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알력 등. 이 세상에 선함이란 있는지, 다시 말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 루블료프를 계속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저는 사실 이콘의 제작과정을 담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장르 특성상 이쯤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 당시 장인들의 협동, 세상이야 지옥같지만 어쨌든 할 일은 한다는 예술가의 표정 뭐 이런 것이 담겨 있을 줄 알았지요. 하지만 예술가는 러닝타임 내내 돌아다니며 번민하거나 성서구절이나 읊조리고 있고, 실력이 무척 뛰어난 그가 그렸다는 그림이나 기술은 조금도 나오지 않으니...사실 이것 때문에 힘들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술가 하면 흔히 생각되는 그 현란한 '쇼'가 없으니까요.

대신 이 영화에 있는 것은 땅에 내동댕이 쳐지는 예술가들입니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기구를 타고 올랐다가 결국 떨어지는 사람을 필두로 예술가를 상징하는 사람들은 계속 땅에 내동댕이 쳐집니다. 광대는 나무에 머리를 찧여 쓰러지고, 석공은 대낮에 숲에서 영주의 기사들에게 눈이 찔려 죽습니다. 재주와 기술이 영광은 커녕 목숨을 위협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시대를 사색하는 루블료프를 더는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제자들도 나옵니다. 결국 루블료프 본인도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르고, 그 참회의 뜻으로 데려온 백치 여자에게도 외면받지요. 예술가가 살아가기에는 아주 유감스러운 세상. 루블료프는 결국 더는 세상에 말을 건네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침묵서원을 합니다.

그런 루블료프의 침묵서원을 돌이키는 것은 중 제작자 보리스입니다. 이 영화에서 어떤 제작 과정이 나오는 유일한 것이 바로 보리스의 종입니다. 그는 까탈스럽게 종의 부조를 할 진흙을 찾고, 영주에게 은을 더 내놓으라고 배짱을 부리며, 동료 소년을 채찍질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의 비밀은 사실 종을 만드는 비법 따위 조금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보리스는 절박하게 매달려 어떻게든 종을 완성시킵니다. 그런 보리스를 보면서 루블료프는 어떤 강렬한 깨달음에 도달한 것 같습니다. 어떤 뛰어난 기술이나 재주가 있어서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지옥같은 세상을 구원할 아름다움 즉 선(善)에 대한 믿음이 예술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선(善)은 어떤 것일까요. 다시 맨 처음 나온 그 기구를 탄 사람의 시점이 떠오릅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기독교와 이단, 타타르인과 러시아인 등 구분과 위계가 두드러진 이 시대의 중력으로부터 그 사람은 멀어지려 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기구 위에서 바라본 시선을 보여주고요. 니체나 장자는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을 모두 높은 곳에 오르는 것으로 말했습니다. 공중에서 보면 지상의 위계는 의미를 잃지요.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소련이 지향하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어울리지 않는 영화로 지목당해 비판받았다고 합니다. 민중의 투쟁이나,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의 건설적인 움직임 대신 황폐한 러시아를 돌아다니며 방황하는 예술가의 고뇌를 다루고 있으니까요. 타르코프스키는 그런 장면 대신 루블료프의 이콘을 컬러로 상영합니다. 이 그림은 어떤 생산성과도 거리가 멀고, 그렇다고 여기에는 투쟁적이고 권선징악적인 '심판'도 없습니다. 셋이지만 어떤 위계도 없이 하나인, 성부 성자 성령의 따뜻한 조화와 아름다움만 있을 뿐인 이콘인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슬픈 특징 중의 하나는 오늘날 평범한 보통사람이 아름다운 것과 영원한 것에 대한 반응과 관계되는 모든 것들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현대의 대중문화 -의수, 의족, 의안의 문명-는 영혼을 기형화시키며, 인간들이 자신의 존재에 관한 근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점점 더 차단하고, 정신력을 소유하는 존재의 하나로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도 점점 더 가로막는다. 그러나 예술가는 유일무이하게 자신의 창조적 의지를 결정해 줄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는 진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예술가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이 믿음이 없는 예술가는 마치 장님으로 태어난 화가와 같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봉인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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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0 12:45
    <러시아 정교>를 읽으며 슬라브인들에게 아름다움이란 신의 선을 구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인간이 신일 수 없다는 겸손함에서 인간의 형상을 닮지 않은 모습을 표현하려 했다는 것도 흥미로웠고요. '창조성'을 강조하는 교리에서 러시아의 예술이 꽃필 수 있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타르콥스키의 인용문이 그걸 정확해게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