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소생러시아 3학기 3회차(3/26) 공지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20-03-23 12:01
조회
107
소생 러시아 3학기 3회차(3/26) 공지

3학기가 되면서 주제 글에 대한 논의가 많아졌습니다. 뭉뚱그려진 자기 고민을 더 보게 만들고 텍스트와 연결하도록 만들어 텍스트와의 긴장감은 높아진 것 같습니다. 코로나의 여파로 저희의 일정이 불투명해진 가운데 어쩜 예기치 못한 여행이 벌써 시작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드네요. 오늘은 시작한 이래 가장 최소인원이 모여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예상치 않은 병원행도 있고, 환절기라 그런지 몸살을 앓기도 해서 모두 조심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는 <러시아 정교> 나머지 뒷부분을 읽고,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보았어요. 오후엔 채운샘의 미학 강의를 듣고 간단한 조별 모임을 하고 정리하였습니다. 아직 조 편성이 완료되지 않아 다음 주 다른 선생님들의 주제 글을 보고 결정하여 필요한 책을 선정할 예정입니다.

러시아의 종교와 예술

종교만큼 인간의 행위를 규정하는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러시아의 정교는 러시아인들의 문화와 예술, 행동 양식을 구성하는 주요요소입니다. 무슬림들이 하루 5번 아잔 소리에 맞춰 기도를 올리고 쿠란의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과 엉뚱한 비교입니다만, 이 코로나 시국에 신천지 교인들도 교리로 믿음의 체계를 만들어 자신의 행위를 규정한 것이겠죠.

러시아 정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니케아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비잔틴의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것입니다.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가 988년 국교로 지정하면서 러시아정교로 자리잡았습니다. 비잔틴과 러시아 정교를 묶어 동방 정교라고 부르는 것은 서구의 시선이 다분히 개입된 것이겠지요.

러시아 정교는 ‘神人’이라고 하는 신과 인간에 대해 독특한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인은 ‘말씀의 육화’라는 개념을 강조하는데, 현실 세상을 신성과 인간성을 지닌 하느님과 함께 사는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삶을 신성화해 초자연적 은총만을 구하면서 현실 안에서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현세에서 구현하며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인간과 신의 철저한 분리라는 서방의 기독교와는 달리, 러시아인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케노시스(겸손)를 삶 속에서 실천하는 가운데 신성을 획득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신의 모습을 닮아 그것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테오시스) 해서 인간의 삶은 신의 은총과 그 모습을 따라 행하고자 부단한 노력해야한다는 인간의 의지를 인정합니다. 부단한 기도와 영적인 수련과 은총에 대한 희구뿐 아니라, 실천적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불가꼬프는 이를 ‘창조적인 그리스도의 모방’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창조란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는 자기 삶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인간을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메고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예술은 이러한 정교의 사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아름다움을 특히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건축과 이콘의 그림들을 통해 이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콘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방식으로 신의 영역을 평면화된 영적 리얼리즘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삼차원이 되는 순간 성상이 되기에 이차원의 그림으로 표현합니다. 이들에게 아름다움은 예쁜 것이거나 사실적으로 잘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의 덕을 표현하는 것이 아름다움입니죠. 인간은 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그 모습은 인간화 되지 않고, 오히려 기형적으로 묘사되거나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의 비례와는 다른 구도로 묘사됩니다. 그 아름다움이 인간을 지상과 천상의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곳에 살게 해 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프사용으로 찍느냐는 놀림에도 한 컷 올리고 싶어 꿋꿋하게 찍었습니다. 진달래가 피어있어 반가웠어요.  우리와 공존하고 있던 진달래 

 

예술과 노동

우리는 예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모차르트나 고흐처럼 위대한 예술가가 따로 있다고 보통은 생각하지요. 창작물의 저작권을 인정하고, 어떤 예술가의 작품이라고 칭하는 것이 우리에겐 아주 익숙합니다. 예술가의 길을 가기 위해선 정식 코스라고 하는 다년간의 훈련이 필요하고, 진정한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선 자신의 오리지널티를 표현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채운샘은 강의에서 이러한 우리의 보편적 관념을 깨트려 주셨는데요. 특히 혁명기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었는지를 통해서 말이죠.

러시아 혁명기 예술가들은 스스로를 노동자로 부릅니다. 예술을 노동자의 계급의식으로 무장하고 새로움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양식을 그대로 즐기기를 거부하고, 특히 회화나 조각같이 소유 가능한 작품을 거부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술 작업을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충만함’을 느꼈는가라는 지점입니다. 시를 쓰면서,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충만함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예술입니다. 자본주의는 영역별 전문성을 주요하게 생각해 전문가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이것과는 아주 다른 사유의 방식입니다.

노동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의 능동적 실천으로 이루어지는 예술 활동들, 함께 모여 시를 쓰고, 작업장에서 피아노를 치는 행위, 함께 벽화를 그리는 작업들입니다. 노동하는 공간과 노동하는 행위와 예술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죠. 자신의 삶의 조건에서 새로운 예술 양식을 발명하는 것, 언제나 새로운 기법을 발명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은 전시의 기법도 바꾸었는데, 인민과 예술가의 거리 없애고, 기다리는 예술이 아니라 인민 만나러 가는 전시와 공연을 기획하고 발명했던 것입니다.

이런 한에서 예술이 한 예술가에게 귀속된다는 사고도 당연히 없습니다. 이들의 작업은 대부분 그룹핑으로 이루어졌고 노동자-그룹이 예술가입니다. 걸작이라는 예술관도 거부합니다. 세계와 노동자의 구분이 없듯이 예술과 노동, 예술가와 관객의 거리도 해소해 삶을 분절의 관점이 아닌 ‘총체화’해 이해하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 역시 한 개인이 아니라 물질과 인간 사이의 관계 안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의 작업은 구성주의로 불립니다. 예술을 구성(construction)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죠. 구성주의는  예술과 건축에 널리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기계와 기술, 기능 등이 인간과 같은 범주에서 다루어졌는데, 미술의 콜라쥬 기법과 영화의 몽타쥬 기법도 그렇게 탄생된 것입니다. 서로 의미 없는 다른 것을 구조화하는 것에서 새로운 의미가 창출되는 기법입니다. 타르콥스키와 베르토프의 영화도 기존의 스토리 중심에 익숙한 우리에겐 아주 낯설게 다가옵니다. 혼재된 시간, 기계의 시선, 서로 다른 재료의 교차 등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지요.

예술혁명이란 결국 예술가의 존재 양식의 변화였다고 채운샘은 정리하셨는데요, 그들이 재료를 다루고 변화시키는 과정이 자신의 존재도 함께 변화하는 과정이었다는 설명이 깊게 왔습니다. 삶 속에서, 자신이 하는 일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를 바꾸어 내고다 했고, 그 과정을 혁명으로 삼았던 것이죠. 창작자로서의 자신을 개입시키지도 않고, 함께 조립하고 구성하는 노동을 통해 새로움을 조성해낸다는 겸손한 태도 역시 러시아 예술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시 쓰기를 ‘신선하고 새로운 노동’으로 규정한 마야꼬프스키의 시는 이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상기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마야꼬프스키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 재개제합니다. 처음과는 다른 느낌으로 읽혀지네요.

 

미학 강의 잘 듣고 올리기엔 민망한 사진이지만...

 

# 공지 합니다.

*읽을 것: 알튀세르의 논문 2개 <레닌과 철학>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과제: 주제 글을 심화- 어떤 문제의식에서 출발하는지가 잘 드러나게 반 페이지 정도.

# 간식: 현숙샘, 건화

 

시인-노동자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키


사람들은 시인에게 소리친다


「자네는 선반 작업장에서 일해야 하는 건데


시란 게 대체 뭔가?


헛소리지!


자네는 분명 노동 능력이 부족한 게야」


우리는


어쩌면


그 어떤 일보다도


노동을 더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나도 공장과 마찬가지


굴뚝 없는 공장이


어렵게 가동되듯


나 역시


굴뚝 없이는 곤란하다


당신들이 실없는 얘기를 싫어하는 것쯤은


나도 안다.


참나무를 베는 것은 노동이다


그렇다면


인간 참나무를 베는


우리 역시


노동자 아니겠는가?


물론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것은 신성한 노동이다


그물에 철갑상어가 걸려 있다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시인의 노동은 그보다 더 신성하다


물고기 대신 사람을 낚으니까.


용광로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시뻘건 강철을 담금질하는 것은 엄청난 노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게으르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어의 줄칼로 뇌세포를 연마하는데,


누가 더 고상한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를 선사하는


기술자인가


아니면 시인인가?


똑같이 고상하다


심장은 발전기와 똑같고


영혼은 복잡한 원동기와 똑같다.


우리는 똑같이


노동 대중에 속한 동지들이다


몸도 마음도 프롤레타리아


우리 함께


우주를 장식하고


우주에 우리의 행진 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자.


언어의 파도를 방파제로 막아 내고


일터로 가자!


신선하고 새로운 노동이여


게으른 웅변가들은


제분소로 보내자!


제분공들한테 보내자!


언어의 물줄기로 제분기를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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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3-23 21:52
    마지막 사진으로 저격당했습니다...잘 보시면 눈을 뜨고 있어요 0_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