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11. 몸이란 무엇인가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1-28 23:40
조회
736

11. 몸이란 무엇인가


나는 5살 어린 남동생 하나와 같이 산다. 동생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몸에 대한 태도다. 연구실에서 공부하다 밤에 집에 가면 남동생은 좁은 거실에서 스쿼트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고는 곧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몸 관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틈틈이 헬스장도 다니고 다이어트 정보에도 관심이 많다. 근육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는 단백질 가루가 있다는 것도 동생 덕에 알게 되었다. 감기가 걸리면 곧바로 병원에 가는 아이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가. 동생 눈으로 보면 나는 자기 몸을 ‘방치하는’ 인간일 것이다.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죽을 것 같이 아프지 않은 이상 ‘그러려니’이다. 살 찌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에 대해서조차 크게 관심을 쏟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몸에 일어나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왜냐, 내게는 내 몸 말고도 신경 쓸 것이 너무 많다! 다른 할 일들로도 버거운데 ‘몸’ 따위는 신경 쓸 수가 없다. 이런 태도에 대해서 딱히 문제시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천자문 한 구절이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恭惟鞠養 豈敢毁傷
공유국양 기감훼상. 공손히 키워주고 길러주심을 생각하니 어찌 감히 헐고 손상할까


내 몸은 내 멋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공손히 키워주고 길러준 것’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예전 같으면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모가 낳아준 몸이라고 해도 내 몸은 내 몸 아닌가. 그렇다면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가.’하면서. 이런 생각에 힘입어 나는 내 몸을 방치해도 좋다고 생각해버린 것 아닐까. ‘될 대로 돼라. 무슨 상관인가. 내 것인데!’. 남동생 역시 나와 통하는 바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될 대로 돼라’며 내팽개치지는 않지만 대신 자기 기준에 어긋나는 일이 몸에서 벌어지면 매우 힘들어 한다. 시험공부를 해야 하는데 감기가 걸려 방해가 되면 그래서 곧바로 병원으로 달려간다. 이것이 그가 몸을 잘 돌보는 방식이다. 나나 동생에게 몸은 대체 뭘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몸이 갑자기 어색하게 다가온다. 몸에 대해서 좀 알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恭惟鞠養 豈敢毁傷(공유국양 기감훼상)’. 사실 아직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몸, 이게 대체 뭐라고 함부로 헐고 손상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일까. 부모가 공손히 키워주고 길러주었다고 하지만 그게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그럼에도 ‘恭惟鞠養 豈敢毁傷(공유국양 기감훼상)’, 이 구절은 꽤나 겁나게 다가왔다. 몸에 대해서 알고자 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문구는 아닌가.


우리 몸은 그저 자기 편한 대로 부려먹어도 좋은 무엇이 아니다. 신경 쓰지 않거나 혹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닦달해도 좋은 것도 분명 아니다. 일단 그것은 근원상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사유물이 아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몸을 받았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 없는 무엇이 아니다. ‘공손히 키워주고 길러준’ 마음이 담긴 것! 갑자기 내 몸이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것 같다. 누군가 공들인 무엇인가를 함부로 누리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공손히 키워주고 길러준’ 마음이란 또 무엇일까. 부모가 자식을 낳고 기르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이야기인가. 고생이라고 말해도 그 사정은 복잡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내 부모의 삶을 이루고 있을 것인가. 또 얼마나 많은 마음들이 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과 함께 했을 것인가.


내 몸은 어떻게 지금 이렇게 있는 것일까. 내 몸이 내 부모로부터 왔다는 것은 그 몸의 소유주가 '부모'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의 삶이 내 몸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 그가 겪었을 많은 사건들과 더불어 내 몸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내 부모를 둘러싼 많은 만남들은 내 몸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 몸이 내 부모로부터 왔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딱히 반가운 가르침은 아니다. ‘身體髮膚受之父母(신체발부수지부모)’. 이 말과 함께 갖가지 가부장적 도덕이 강요되었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상하위계를 기본으로 하는 도덕이 바로 내 몸을 대하는 방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는 자들을 거부하는 마음으로 내 몸이 내 부모로부터 왔다는 명제도 거부하게 된 것 같다. 그럼에도 내 몸이 부모로부터 왔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다. 또, 무시해도 되는 말 같지도 않다.


‘恭惟鞠養 豈敢毁傷 (공유국양 기감훼상. 공손히 키워주고 길러주심을 생각하니 어찌 감히 헐고 손상할까)’ 이 구절을 다르게 받아들일까 한다. 내 몸이 내 부모로부터 왔다는 것은 내 몸이 낯선 삶들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다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이 이미 내 몸에 있다.  그리하여 내 멋대로 취급할 수 없는 일들이 내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어찌 감히 헐고 손상할까(豈敢毁傷)’. 내 부모를 대하듯 아니 아주 낯선 이를 만나듯이 내 몸과 다시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