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앓이

12. 봄이다

작성자
수영
작성일
2016-02-04 15:27
조회
488
12. 봄이다

겨울 풍경 하나가 그려져 있다.

陳根委翳 落葉飄颻 진근위예 낙엽표요
“묵은 뿌리가 땅에 쌓이고 덮이며, 떨어지는 잎이 이리저리 나부낀다”
(묵을 진陳, 뿌리 근根, 맡길 위委, 가릴 예翳. 떨어질 락落, 잎 엽葉, 나부낄 표飄, 나부낄 요颻)

가을·겨울의 흔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구절은 벼슬자리를 떠나 은거하고 있는 선비의 상황을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 이 구절 앞으로는 “동산의 풀은 가지가 뻗어 오른다(園莽抽條)”나 “비파 나무는 늦도록 푸르다(枇杷晩翠)”같이 싱싱하고 힘이 솟는 장면들이 있다. 세속을 떠나 공부하는 이의 즐거운 심사를 드러내는 것 같은 구절도 있다. “잡된 생각은 흩어 버리고 소요자적한다(散慮逍遙)”, “슬픔이 사라지고 기쁨이 온다(慼謝歡招)”. 그리고 이제 낙엽이 떨어지고 뿌리들이 썩어가는 모습들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陳根委翳 落葉飄颻 (낙엽표요 진근위예)"

이 장면을 마주하고 있는 선비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확신을 갖고 벼슬자리에서 물러났지만 ‘나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하며 씁쓸해하지는 않았을까. 우샘은 자연의 세대교체를 그리는 이 구절에 선비 자신의 마음이 투사되었다고 말해주셨다. 하지만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일단 ‘끝이 나는 계절은 슬프지 아니한가’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퍼뜩 놀랐다. ‘봄이 오지 않나?’ 게다가 오늘은 입춘(立春)이다.

“언제 봄이 온거야?!”싶었다. 하지만 태양과 지구의 운행으로 보자면 동지(冬至)가 끝나자마자 밤은 짧아지고 낮은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봄은 진즉부터 오고 있었던 것이다. 봄은 또 어느새 지나가고 다른 계절들이 이어지겠지만 말이다. “묵은 뿌리가 땅에 쌓이고 덮이며, 떨어지는 잎이 이리저리 나부낀다 (陳根委翳 落葉飄颻)”, 이 구절에 씁쓸하고 슬픈 마음을 투사할 것이 아니다. 선비는 단지 마무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더군다나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선비에게 시간은 완전히 열려있다. 어떻게 한 계절 한 계절을 보내고 어떻게 말년을 보낼지는 완전히 그의 몫이다. 떨어지는 잎과 오래된 뿌리들을 보며 그는 무엇을 떨궈내며 어떻게 새로 올 시간들을 맞이할지를 고민했던 것 아닐지.

지난 가을에 삼경스쿨에 입학하여 나름대로 첫 학기를 보냈다. 10월 중순에 시작한 《천자문》읽기는 지난주로 한 시즌을 끝냈다. 늘 그렇듯이 끝났다 싶으면 아쉽다. 가장 아쉬운 것은 암기숙제를 똑부러지게 해가지 못한 것?!(-.-;;) 특히 마지막 시간에는 다른 수업(불교N) 에세이 쓰기를 핑계 삼아 숙제를 팽개치고 말았다. 매번 예습복습도 제대로 못했다. 그럼에도 우샘과 학인들의 환대 속에서 매 주 즐거운 월요일을 보냈다. 을미년(乙未年) 복(福)은 내가 제일 많이 받았다고 조심히 고백해본다.

물론 늘 그렇듯이 끝난 것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일단, 이달 말에 함백에 가서 1000자를 몽땅 암기+암송한다. 또 내년에도 나는 천자문 공부를 이어간다. 어쨌든 한 마디가 분명 지나갔다. "陳根委翳 落葉飄颻 묵은 뿌리가 땅에 쌓이고 덮이며, 떨어지는 잎이 이리저리 나부낀다” 선비는 자연의 풍경과 함께 하나의 시간이 끝났음을 생각한다. 우리는 저 선비와 같이 자연의 풍경들을 마주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자리에서 나름의 풍경으로 한 계절의 시작과 끝을 알게 되는 것 같다. 공부하는 이에게는 책 한권이 끝난 것도 한 계절의 끝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마무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삼경스쿨에서 우샘은 1000자를 몽땅 암기+암송하라는 미션을 주셨다. 글자들이 나와 동학들의 몸에서 더 잘 썩고(?) 뿌리내리길 바라셨던 것이 아닐지. 이것은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되는 것 같다. 가을과 겨울 동안 나무는 잎을 떨군다. 뿌리는 썩어 흙이 된다. 우리 역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한다. 방법은 다 다르다. 하지만 새로운 계절은 새로운 마음과 행동을 부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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