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4월 8일 7주차 수업후기

작성자
오헌식
작성일
2021-04-10 13:56
조회
148
#1교시 – 명상

이번 명상시간은 호흡을 통해서 그 자체를 알아차리는 명상을 수행했는데, 호흡을 이용한 명상에는 세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번째 방법은 코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고, 이것에 집중해서 코로 숨을 들이쉬는 것을 들숨이라 하고, 숨을 내쉬는 것을 날숨이라고 하는데 지금 들이쉬고 있구나 내쉬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에 집중하는 방법입니다.

두번째 방법은 숨을 쉴 때 코 주위의 감각을 느끼는 방법인데, 코 주위에서 느껴지는 바람이나 피부에 와 닿는 공기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마지막으로는 호흡의 수를 세는 방법입니다. 한번 내쉬고 들이쉬는 것을 한번으로 해서 10회 정도 연습을 하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1부터 10까지 호흡을 하고, 다시 10부터 1까지 거꾸로 세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다른 잡념이 떠오르지 않고, 단지 숫자에 좀더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호흡을 통한 명상은 기초적인 명상이면서도 어디서나 쉽게 할 수 있고, 감정적으로 흔들릴 때 잠시나마 호흡을 조절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2교시 - 친우서 낭송과 입발제

이번 시간에는 게송65번부터 76번까지 발표하고 토론하였습니다. 모든 게송이 현실에 안락함이나 높은 지위나 아름다운 배우자와 생활 이런 모든 것은 일순간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윤회계를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주요 논의였습니다.

육도윤회라는 것은 일체중생이 자신의 지은 바 선악의 업인에 따라 천도, 인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육도세계를 끊임없이 윤회전생하게 된다는 윤회를 의미하는데, 우리 도반들이 이해하는 윤회는 육도윤회보다는 지금 생활이나 습관에 따라 나의 모습과 놓여 있는 상태가 윤회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습관이나 질투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윤회를 벗어나야 하는데,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성의 법과 보리심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공성의 법은 지혜이고, 보리심은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지혜를 갖추고 보시를 통해서 자비를 베풀면 조금이나마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논의 과정에서 한 도반님이 표현하신 윤회에서 벗어나기 싫다는 애교 섞인 얘기가 우리는 현실의 삶에 좋은 점과 사랑도 같이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3교시 - 중론 및 쁘라산나빠다 발제 토의

중론시간에는 인과성과 변화 게송1부터 게송14까지 발표하고 토론을 하였습니다.(쁘라산나빠다 책 순서로는 게송3번째부터 16번째에 해당)

도반들이 해석하고 발표한 것이 잘 이해 안되는 부분이 많아서 후기에서는 까리까의 분석을 올리는 것을 이해 바랍니다. 까리까 분석에서 보면

게송1

“자기로부터 발생하거나 타자로부터 발생하거나 양자로부터 발생하거나 무원인으로부터 발생한 존재들은 어떤 것도 어디에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붓다에 따르면, 이 네가지 이론은 영원한 존재 또는 영속적이며 실체적인 자아(tman)의 존재, 비존재,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것을 함축하고 있다. 나가르주나가 이 네 가지 방식으로 설명된 실재를 지칭하기 위해 bhava 대신에 bhva란 용어를 썼을 때 그는 똑 같은 의미를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첫 게송에서 나가르주나가 부정한 것은 형이상학적 존재(bhava)이지 발생(utpda)과 소멸(vyaya)의 특징을 갖는 경험적인 됨(bhava : becoming)의 개념이 아니다.

게송2

“네 가지 연(緣)이 있다. 인(因), 소연(所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 그러나 다섯째 연(緣)은 없다.”

나가르주나는 다섯번째 연은 없다고 힘주어 선언하면서 네 가지 유형의 연(緣)을 언급한다. 그러나 앞 게송에서 네 가지 인과 이론을 부정한 것과 비교해 볼 때 여기서는 네 가지 연(緣)을 범주적으로 부정하고 있진 않다. 그 이유는 아주 명백하다. 매우 학구적인 철학자였던 나가르주나는 첫 게송에서 언급한 네 가지 인과(因果) 이론을 붓다가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후기 불교의 제자들이 네 가지 연(緣)이론을 세움으로써 붓다의 연기(緣起) 개념을 정교하게 다듬으려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는 네가 연(緣) 이론을 완전히 부정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게송3

“존재들의 자성(自性)은 연(緣) 등(等)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성(自性)이 존재하지 않을 때, 타성(他性)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르주나는 직접 연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다루고 이를 타파한다. “존재자의 自性은 緣속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여기서 부정되고 있는 것을 안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가르주나는 일부 철학자들이 불교의 네 가지 緣 이론을 첫 게송에서 언급한 붓다가 거부한 이론 중의 하나에 의해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도 사상의 이 초창기에 연을 이야기한 철학자들은 불교도들이지 비불교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가르주나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의 관심은 이제 이 불교의 주석가들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지 비불교도들에게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불교도들 가운데 이 초창기에 현상(dharma)을 실체론적으로 해석한 유일한 학파는 사르바스띠바다 학파였다. 그들의 自性(svabhva) 개념은 위험하게도 인도인의 자아(tman) 개념과 닮아 갔다. 그러므로 나가르주나는 단지 네 가지 연을 실체론적으로 해석하는 불교내 사르바스띠바다 학파의 견해를 비판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셋째 게송에서 행한 범주적인 부정은 緣 속에 존재자(bhva)의 자성 곧 실체(svabhva)를 상정하는 사르바띠바딘의 견해를 겨냥한 것이다.

자성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나가르주나는 어떤 논증을 전개하는 것일까? 나가르주나의 방법 속에 임마뉴엘 칸트의 그것에 견줄 만한 변증법이 있다고 본 무르띠와 그 밖의 학자들은 자성과 타성을 이율배반으로 간주해 왔다. 이것은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처음 자성 개념을 논파할 때 그런 변증법을 쓰지 않았다. 나가르주나는 자성 개념이 타성 개념과 상대적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명증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한다. 상대성에 입각한 논증은 자성이 아니라 타성을 거부할 때 쓰인다. “자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 타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그가 인식론을 상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단지 자성만을 직접 인식론적 토대위에서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송4

“작용은 연(緣)을 소유하지 않는다. 작용은 연(緣)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연(緣)들은 작용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는 작용을 소유하는 (緣들이) 존재하는가?”

나가르주나는 작용과 연(緣)을 이야기한다. 이 경우, 작용도 연(緣)도 모두 부정되고 있다. 부정되고 있는 것은 그들 사이에 상정되는 일종의 관계, 즉 동일성을 강조하는 내속(內屬,실체에 대한 속성의 관계)이다. 영원한 실재로 간주되는 자성과 동등하다는 점에서 동일성이 부정된다. 차이성도 그것이 단멸(斷㓕)이나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하는 타성으로 인식되기에 만찬가지로 거부된다.

게송5

“이것들에 緣하여 (결과가) 발생하므로 이것들이 (결과의) 연(緣)들이다. 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것(결과)들이 발생하지 않는 한, 어떻게 이것들이 비연(非緣)이 아니겠는가?”

여기서는 연(緣)의 정의를 다룬다. 연(緣)은 그것에 의존해서 다른 것이 발생하기 때문에 연(緣)인 것이다. 그러나 나가르주나가 이 정의를 부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경험적으로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정의에 덧붙여지는 연역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연역된 것이란 이 의존이 영원하고 영속적이라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해서 의존하고 의존되는 것이 내속관계를 통해서 실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르주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것(결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것(원인)을 비연(非緣)이라 하지 않겠는가?”

게송6

“사물이 존재하지 않든지, 존재하든지, 그 사물의 연(緣)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연(緣)이라면 어떤 것의 연(緣)이며, 존재하는 것의 연(緣)이라면 그 연(緣)이 무슨 소용인가?”

나가르주나의 연(緣)에 대한 대략적인 비판을 마무리짓는다. 대부분 현대의 번역자들은 무엇보다도 artha(=효과, 결실, 결과, 果報, 한문으로는 果)란 용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탓에 이 게송의 중대한 의미를 밝히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정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는 결과의 발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거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결과의 발생인 것이다. 이것은 다시 사르바스띠바딘과 사우뜨란띠까가 제시한 因果의 동일성 이론과 비동일성 이론을 나타낸다.

게송7~10은 게송2에서 언급한, 사르바스띠바딘과 사우뜨란띠까가 해석한 네 가지 유형의 緣들에 대한 비판을 보여준다. 만일 dharma(현상)을 한정하는 sat(존재하는)와 asat(존재하지 않는)가 각각 나가르주나가 종종 쓰는 한정적인 “실체적으로 존재하는”과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면, 나가르주나의 비판의 성격을 납득하기가 쉬울 것이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나가르주나가 “저것이 존재할 때 이것이 존재하게 된다”는 붓다 자신의 진술을 비판하고 있는 듯한 게송10에서 특히 그러하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이 진술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그는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존재의 성격, 즉 “실체적 존재”와 다름없는 존재의 성격을 앞 행에서 분명히 했다.

게송11~14는 緣들의 결합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일과 같은 인과 이론의 몇 가지 다른 측면들을 다룬다. 아마도 나가르주나의 緣이론에 대해 온갖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바로 마지막 게송14의 결론적인 성격을 띤 행이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緣이나 非緣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자칫 이 진술은 나가르주나가 원인과 원인에 의존하는 결과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해석하기 쉽다. 이것을 단순히 원인과 결과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나가르주나가 이 장 앞에서 자성 곧 실체적 존재 또는 영원한 존재에 대해 말하고자 한 모든 것을 무사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다. 그가 연의 고찰을 시작할 때 밑에 깔고 있었던 기본 전제와 무관하게 이 진술을 해석하는 것은 합리적 근거가 없는 듯싶다. 결론인 즉 이렇다. 여기서 부정되는 것은 연에 의존하는 단순한 결과 또는 결과의 발생을 위한 연이 아니라 미리 존재하기에 영원하거나 아직 존재하지 않기에 존재하지 않는 결과이다. 똑 같은 부정이 단순한 원인이나 연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거나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결과를 산출하는 원인이나 연에도 적용된다.

“緣起” 즉 의존적 발생 또는 因果性은, 되풀이해서 말하건대, 붓다가 영원하고 영속적인 실제에 의지함이 없이 현상의 기능을 설명하려 할 때 쓴 원리이다. 달리 말하자면, 緣起는 緣起한, 즉 의존적으로 발생한 현상의 無常性을 설명해준다. 緣起한 현상없이는 緣起를 식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현상들은 의존적으로 발생하기에 無常한 것이다. 無常性은 변화와 운동을 수반한다.

 

* 불티모아 4월 22일, 8회 세미나 공지사항입니다.

 
  1. 명상: 이번 주는 호흡 명상을 연습해봅니다.


 
  1. <친우서> 376-417쪽 일독해 오세요. 입발제 순서는 아래 게송 번호입니다.


77-78: 김현화

79-80: 임길례

81-82: 김은순

83-84: 이경아

85: 오헌식

86: 고은미

87: 권영숙

88-89: 조은주

90-91: 이윤지

 
  1. <중론>과 <쁘라산나빠다>는 제2품을 읽고 맡은 부분을 정리해서 발표합니다.

<중론> 32-47쪽 <쁘라산나빠다> 180-233쪽 발표자
(2-1) (2-2) 180-186쪽 이윤지
(2-3) (2-4) (2-5) 187-192쪽 조은주
(2-6) (2-7) (2-8) 193-199쪽 권영숙
(2-9) (2-10) (2-11) 199-204쪽 고은미
(2-12) (2-13) (2-14) 205-210쪽 오헌식
(2-15) (2-16) (2-17) 211-218쪽 이경아
(2-18) (2-19) (2-20) 219-221쪽 김은순
(2-21) (2-22) (2-23) 222-226쪽 임길례
(2-24) (2-25) 227-233쪽 김현화
  1. 담주 간식과 후기는 설샘께서 준비해주시기로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체 4

  • 2021-04-10 14:51
    그 바쁘신 중에 이케 빨리 후기를 올려주시다니 수희찬탄하옵니다, 헌식샘! 까리까를 깜박하고 안 읽어 오신 분들이 많았는데 요렇게 정리해주시니 각 게송의 핵심을 다시 보게 되네요. ^^

    중론이 매우 어렵지만 저는 저희끼리 토론하는 과정에서 다들 '이걸 이해할 수 없을거야' 라는 두려움은 쪼금 넘어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차근차근 이해해보려 노력해가면 27게송을 마칠때쯤 저희 모두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중론의 사유의 방식'에 조금은 익숙해 있지 않을까요? ^^;; 자, 이제 2품으로 씩씩하게 고고~

  • 2021-04-10 15:13
    와우~ 헌식샘! 초스피드 후기 감사합니다.
    까리까 내용까지 믹스해서 잘 정리해 주셨네요.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중론의 사유체계ㅠㅠ 이렇게 저렇게 가다보면 어쩌면 돌파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래봅니다^^

  • 2021-04-10 18:22
    <중론>1장 주제는 ''무엇이 발생한다'' 는 것에 대한 고찰이었죠. 좋다, 옳다, 밉다, 괴롭다, 행복하다, 씨앗이다, 싹이다, 옷감이다, 실이다....이라고 인식했던 모든 정신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은 내가 그렇다고 실체화시킨 것일 뿐이었죠. 일상에서 숨 쉬듯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 연기를 보는 눈이 생기길 비나이다!

  • 2021-04-10 20:59
    <불티모아>에 유일한 청일점이신 오샘 후기 덕분에 다시 까리까나(중론)을 읽어보니 거기도 우리가 미쳐 몰랐던 보물이 있더군요~~
    샘이 깔끔한 정리 덕분에 접근하기가 수월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