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8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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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7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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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시 - 명상

이번 주는 지난주의 호흡 명상을 복습한 후에 후각 명상을 새로 배웠습니다. 냄새를 알아차림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죠. 향이 타는 은은한 냄새에 주의를 주니 산란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샘들은 향과 연관된 생각이 들었다가 다시 집중했다가 하셨다고 했는데요. 향이 은은하고 좋아서 그랬을까요, 다들 좋은 냄새와 연관된 기억들이 소환되는 것 같아요. 숙제는 잠깐이라도 냄새에 집중해보는 후각 명상을 해보는 것입니다.

#2교시 - 친우서 낭송과 발제

친우서의 게송 77부터 91까지 발제를 했습니다. 주로 축생계와 지옥계의 고통에 대한 게송이었는데요.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갈망으로 고통 받는 아귀가 너무 세세하게 설명되고 있었어요. 세밀한 지옥과 끔찍한 고통에 대한 묘사를 통해서 이래도 윤회의 삶을 거듭할 거냐고 묻는 것이겠죠. 길례쌤은 세밀한 고통의 묘사가 윤회에 대한 공포 외에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좀 더 생각해 볼 일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이승에서 겪고 있는 윤회 속의 고통이 이보다 덜하다고만은 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고통을 짜내어서 스스로 고통을 받고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짜내어서 그것으로 연명하는 아귀를 생각하면 후회하고 질투하고 남을 업신여기면서 살고 있는 자들이 아귀와 다르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이 구절이 마음에 닿았어요. “우리의 마음이 금강같이 단단하다면 지옥의 고통에 관해 어떤 소리를 들어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P384)” 지옥, 천상도 모두 마음이 짓는 세계이고 그 세계가 얼마나 생생한가도 그 마음에 얼마나 매여있는가에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교시 – 중론 및 쁘라산나빠다 2장 (去來에 대한 고찰)

묻고 답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정답인지 눈을 비비고 읽어봐도 헷갈리고 있었는데, 이 허우적거림을 아셨는지 채운샘께서 중론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강의해주셨어요. 후기는 채움샘의 강의를 중심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중론에서는 나가르주나의 명제나 주장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중론이 귀류논증에 의했기 때문입니다. 중론은 개념을 실체화해서 논리화시키는 전통적 논리학에 대해서  ‘실체가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그 전제부터 해체하는 전략적 논리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비가 내린다는 운동에 고전논리학은 ‘비’, ‘내림’이라는 언어적 개념을 실체화하는 것이 전제됩니다. 그 후 논리 구조상 진실의 여부를 따진다는 것이죠.  중론은 고전논리학이 의지하고 있는 이 언어적 개념의 실체성을 해체하는 것입니다. 정통적 논리학에서는 언어적 추론에서 참이면 실재에서도 참인 것으로 상정합니다. 개념을 실체화시키고 사실과 일치시키는 것일 뿐 사실의 참 여부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재에서는 어떤 명제도 반드시 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이 세계에서 그 어떤 것도 독자적인 실체성을 가질 수 없음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중론에서 언어 구조의 판단체계를 해체하는 전략을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론에서의 4구 판단의 체계가 깨지는 경험을 통해서 언어가 가지는 개념적 실체성을 깨뜨리는 동시에 그로 인해서 실체적으로 세계를 보는 관점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중론에서의 배움은 언어적인 표상 속에서 기존의 습에 따라 분별하고 판단하고 있던 것이 지혜를 통해 해체되는 것을 觀하는 반복적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언어의 관념적 실체성을 깨뜨리는 것만으로 우리의 사고체계를 뒤흔들고 삶의 조건들을 해석할 때 지금과는 다른 힘을 쓸 수 있을까하는 질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로 자신과 대화하고  타자를 해석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어로 짜여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언어적 사유체계를 가지고 세계를 구성하고 그 해석으로 각자의 믿음과 판단체계를 구축합니다.  우리가 보는, 믿는 세계는 사실 우리의 언어적 세계라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제가 가진 언어의 체계가 뒤흔들린다면 제가 보는 세계 자체가 흔들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사유가 바뀌면 우주가 바뀐다는 게 맞을 것입니다.

나가르주나의 비판은 언어 사용의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내재되어 있는 인간적 사고 체계가 불러일으키는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에 있습니다.  언어 체계에 녹아있는 전제 즉 인간의  무의식적인 믿음이 불러일으키는 잘못된 견해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각과 사유의 과정에서 오류를 불가피하게 내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인지매커니즘에 대한 것이며,  이러한 인지 매커니즘에서 언어를 실체화하면서 실재를 언어에 맞추기까지 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의 대상이 되는 것, 사유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 분절적 개념화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시간도 과거, 현재, 미래로 분절화해서 사유하고, 이런 언어적 체계를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후에는  마치 시간 자체가 흐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중론은 그런 의심되지 않는 언어의 전제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질문 그 자체를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실체성을 논파합니다.  어떤 명제나 질문에 더 맞는 해답이나 주장을 논증하는 방식이 아니라 명제(질문) 자체에 비논리성이 있음을 밝히는 것으로 언어를 방편삼아  부처의 공을 관하도록 하는 것이죠.

실재와 다르게 사건을 해석하게 하는 인간의 인지매커니즘의 대표적인 것이 주체가 행한다, 주체가 변한다와 같은 주어와 술어의 구조입니다. 무엇 때문에 어떤 결과가 생긴다는 인과론,   본질이 드러나는 것이 현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도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운동과 변화는 서로가 의존하여 드러나는 것이고, 홀로 작용을 소유할 수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간다’는 행위의 주체가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며, 행위의 주체 없이 ‘감’이라는 개념이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개념의 구조를 미분화 할수록 개념의 무실체성이 드러납니다. 언어의 구조를 들여다볼수록 ‘가고 있는 자’가 ‘감’을 소유하는 것 같이 동어 반복의 오류나 ‘가지 않는 자’가 ‘감’을 소유하는 것 같은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할 때는 어쩔 수 없는 주체의 설정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의 구조 자체가 기본적으로 주체와 분절적 개념을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구조에 내재하는 이러한 주체의 설정은 우리의 판단 체계 안에 '하거나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와 같은 환상을 자연스럽게 싹트게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 속에 형성된 착함과 악함을 자기의 해석으로 기억하고 구축하고  무의식적으로 착함과 선함을 개념적으로 비교하면서 후에는 실체적으로 선한 의도를 가진 착한 사람과 악한 의도를 가진 나쁜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판단합니다.  그렇지만 악함과 악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어떤 조건 속에서 잘못한 것이 다른 조건에서는 잘못됨이 아닐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어떤 연기 조건 안에서 악으로도 선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뿐이지 악이나 잘못된 행위, 악한 사람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언어를 거칠게라도 해부하기 시작하면 가장 단순한 언어조차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주어는 술어에 의해, 술어는 주어에 의해 성립합니다. 모두 서로를 의존하여 연기적으로 성립하며 엄밀히 행위와 주체를 분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언어적 체계 안에서 주체를 설정하고 개념을 실체화하는 논리적 오류를 가지는 이유는 그 오류가 언어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언어 체계가 연기되어 있는 것을 망각하고 언어 자체를 실체화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언어를 실체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에 부합하는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변화와 운동을 당연시하고 받아들이기보다 나를 실체화 시키고 세계를 고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당장은 심리적으로 편안함을 주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럴 마음은 없었던 나’와 같이 주체와 행위를 분리하고 자신을 합리화시키거나 ‘의지가 부족한 나’처럼 자신에게 벌주는 방식으로 자위하는 것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중론이 가지는 언어에 대한 관점은 언어 철학의 ‘화용론’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화용론에서 언어는 그 자체로 의미를 포함할 수도 없으며 의미를 전달하거나 표현할 수도 없고 오직 작용할 뿐입니다. 언어는 실제 발화로서만 존재하며 그 맥락 속에서 오히려 언어 외적인 것들이 작용하면서 언어의 용법을 존재하게 한다고 합니다. 나가르주나가 언어를 가지고 언어의 실체성을 해체하는 용법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습니다.

중론을 읽으면서 유의할 점은 실체가 ‘없다’는 것에 매달려서  ‘있다’와 대비되는 ‘없다’를 또다시 실체화하는 것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사물에 실체가 없음을 주장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사물에 무실체성이 있음을 주장한 것도 아닙니다.  중론은 실체의 부재를 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어 체계가 연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언어의 사용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선문답 같은 언어 사용일까요?  엄청난 통찰,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일까요?  일단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밖에요.  우선 저의 언어 체계 안에서 구축되어 있는 전제를 찾고  질문을 거듭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의 언어 체계 안에 구축되어 있는 전제는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찾는다고 찾아질까요? 다시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할수밖에요.  일단은 중론을 계속 읽어가는 수밖에요.

 

* 불티모아 4월 22일, 9회차 세미나 공지사항입니다.
  1. 명상: 이번 주는 후각 명상을 연습해봅니다


2.<친우서> 418-459쪽 일독해 오세요. 입발제 순서는 아래 게송 번호입니다.

(92-93: 조은주/94-95: 권영숙/96-97: 고은미/98-99: 이경아/100-101: 김은순/102-103: 김현화/104-105: 이윤지)

3. <중론>과 <쁘라산나빠다>는 제2품을 다시 읽고 맡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옵니다. 입발제 순서는 2품의 게송 번호입니다.

(1,2,3: 김현화 / 4,5,6,7: 김은순/  8,9,10,11: 이윤지 /12,13,14: 이경아 /15,16,17: 조은주/ 18,19,20,21: 권영숙/22,23,24,25: 고은미)

4. 1학기 마지막 날인 4월 29일, 10회차 세미나에서는 <친우서>와 <중론>의 게송을 각자 한구절 이상씩 낭송해 보기로 했습니다. 맘에 드는 구절을 선택하셔서 즐겁게 낭송을 준비해 보시기 바랍니다.

5.담주 간식과 후기는 경아샘께서 준비해주시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체 5

  • 2021-04-17 21:40
    내가 사용하는 말과 개념에 대응하는 실체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오다가 이제 그것이 아님을 논리적으로 해체하는 훈련을 해야하는 거네요. 논리가 아닌 반논리! 띠용~ @.@::

    저희를 분별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돕고자 중론을 쓰신 나가르주나 보살님,
    중론을 저희 맘대로 헤매며 읽는 괴로움을 헤아리시고 자비로이 등장해 가르쳐주신 채세음보살님,
    그리고 이리도 짱짱하게 공부 내용을 정리해주신 설보살님 덕분에 중론을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ㅎㅎ~ 자, 다시 2품을 들고 한 문장 한 문장 차근차근.... ^^;;

  • 2021-04-17 22:12
    설보살님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신 덕분에 내용이 쏙 들어왔어요
    수고했어용 ~!

  • 2021-04-18 10:20
    바로 뒤돌아서면 공부했던 내용이 뇌속에서 순삭하는 저에게 단비같은 후기입니다.
    설쌤 감사해요~^^

  • 2021-04-20 00:20
    중론을 읽는 것이 수행이라는 채운샘의
    말씀대로, 낯선 언표에 헤매는 마음을
    관해 보겠습니다.
    설샘 후기 감사합니다^^

  • 2021-04-20 19:24
    지난주 수업시간에 제 자신에게 어의가 없기도 하고 좀 창피하기도 해서 실소가 나왔었어요. 그 일은 강의 중 채운샘께서 툭~ 던진 한마디였어요. ''모든 것이 연기한다는 것을 까먹을 때 논리적 오류가 생긴다'' 라는.
    그렇치! 바로 그거잖아?! 왜 자꾸 까먹니?! 일상의 번뇌가 이것을 놓쳐서 그런 거잖아?... 그동안 불교 공부를 하네, 절에 가네, 기도를 올리네, 명상을 하네... 그것들은 무엇이었니?!... 쩝;;; 지금도 그때의 느낌이 생생합니다.

    ^^ 설샘의 수준 높은 후기에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지난주 수업 녹음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고요함과 자유를 쥘 수도 있는 갱~장한 공부와 만나고 있다는 것을요!

    <중론>에서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사태 자체가 아니라, 그 사태에 대한 이해 방식을 비판하는 거라고 합니다. 우리의 인지구조에는 이미 수많은 언어들이 실체화되고 있어 언어로 명명하는 순간, 마치 그 언어가 그 자체로 실재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언어는 가명이지요... ^^ 끝으로 채문수보살님의 주옥같은 수업내용을 일부 남겨봅니다. ''우리는 <중론> 공부를 통해 언어적으로 구조화하고 있는 판단 체계가 깨지는 체험을 해야합니다, 사구가 다 비판 됐을 때 우리가 매번 도달하게 되는 건,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이게 연기실상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