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4월 22일 9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이경아
작성일
2021-04-26 16:55
조회
120
#1교시 - 명상

이번 주는 미각 명상을 배웠습니다. 준비된 간식을 하나씩 집어서 입으로 가져와 씹고 삼키는 모든 과정동안 집중하며 깨어 있으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모든 맛과 현상에 집중합니다. 평소 음식을 먹을 때 먹는다는 것을 알아챌 겨를도 없이 맹렬히 씹어 삼키는 상황을 알게 됬다는 분들도 계셨고, 제겐 평소 먹는 동안 한 번도 군침이 돈 적이 없다고 착각하고 살았음을 깨닫게 된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미각은 우리가 얻게 된 음식이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구분하기 위해 진화된 감각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탐닉에 빠지게 되는 감각이기도 합니다. 친우서 36게송의 ‘음식은 양약과 같은 것임을 알아서 탐심이나 성내는 마음 없이 향유해야 하나니 오직 생존을 위해 필요한 만큼만 취해야 합니다.’라는 구절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자꾸 생각납니다.

#2교시 - 친우서 낭송과 발제

친우서의 92게송부터 105 게송까지 발제를 했습니다. 육도의 고통에 대한 부분입니다. 육도는 지옥, 축생, 아귀, 천상, 아수라, 인간계를 말하는데 천상계의 천인조차도 선업이 남지 않은 채로 그 생이 다하면 결국 악취에 떨어진다는 점이 의미심장했습니다. 게다가 p.431의 ‘천인은 매우 원만하게 모든 것을 누리기 때문에 평소에 산란한 가운데 세월을 보내며 정법을 수지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구절을 보면, 우리의 삶이 문제가 없고 편안하면 깨달을 기회가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궤변일까요?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 불교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는데, 편안해지면 깨달을 수 없다니요. 여기서 말의 의미에 집착하는 자신을 보며 나가르주나께서 중론을 쓰게 된 목적인 ‘희론의 적멸’을 다시 한 번 곱씹습니다.

중요한 것은 천상계건 인간계건 이 육도는 결국 또 다시 윤회의 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가장 큰 고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율, 선정, 그리고 지혜를 통해 해탈도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 친우서의 방향입니다.

#3교시 – 중론 및 쁘라산나빠다 2장 (去來에 대한 고찰)

이번 주엔 지난번 채운샘께서 중론을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강의해주신 것을 기반으로, 2장 去來에 대한 고찰에 대해 선생님들 각자 맡아 이해한 바를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히 2품의 주제인 가는 것과 오는 것에 대한 고찰은 주체와 작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일반적으로 바늘가면 실따라 오듯 주어와 서술어의 형식을 띱니다. 주어가 나오면 술어가 동반합니다. 주어는 그 자체로 자성을 가지지 않으므로 술어에 의해 설명됩니다. 술어는 그 자체로 자성을 가질 수 없으므로 주어에 의해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어떤 사태에 대한 원인과 결과 이야기이자 주체와 행위애 대한 이야기입니다. 즉 한마디로 주체와 행위가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연기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내가 간다’는 명제를 논파하기 위한 4구 해체를 한 번 더 복습하자면 이렇습니다.
  1. 감을 소유한 가는 내가 간다.

  2. 가지 않는 내가 간다.

  3. 가면서 동시에 가지 않는 내가 간다.

  4.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는 것도 아닌 내가 간다.


1번의 경우 ‘내(나)’라는 단어는 ‘간다’는 행위를 설명하는 주체이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간다’ 의 ’나’는 가고 있는 의미를 이미 동반한 ‘나’입니다.  ‘나’는 가고 있는 나이므로, 즉 감을 소유한 나이므로 또 술어에서 ‘간다’는 것은 의미가 중복된 오류입니다

2번의 경우 ‘가지 않는 나’라는 주어는 가지 않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체가 간다는 것은 의미가 상반되는 것이므로 모순입니다.

3번과 4번의 경우 가면서 동시에 가지 않는, 또는 가는 것도 아니고 가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은 통상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도 오류입니다.

중론에서는 이렇게 4가지의 설명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2장에서는 가는 행위에 대한 논파, 가는 행위를 포함한 주체인 ‘가는 자’에 대한 논파, 가는 행위의 시작에 대한 논파, 그에 상응하는 대립쌍인 ‘정지’에 대한 논파 등을 통해 가는 행위와 주체는 상호의존적이며 연기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체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행위를 떠난 주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주체를 떠난 행위 자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게송을 다 담을 수는 없어 제가 맡은 부분만 일단 올립니다.

가는 행위의 시작에 대한 부분입니다.

대론자는 가는 행위는 그 시작이 실재하기 때문에 가는 행위는 실재한다고 주장합니다. 나가르주나는 12게송에서 이렇게 답합니다.

“이미 간 것에서 가는 것은 시작하지 않는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서 가는 것은 시작하지 않는다.

현재 가고 있는 것에서 가는 것은 시작하지 않는다.

가는 것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쁘라산나빠다,  p. 205

여기서 ‘이미 간 것’이라는 것은 가는 작용이 멈춘 상태입니다. 시간으로 말하자면 과거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가는 작용이 시작한다면 ‘이미 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작용이 멈춘 과거와 작용이 시작한다는 현재가 공존하는 것이므로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간 것에서 가는 것은 시작하지 않습니다.

‘아직 가지 않은 것’은 작용이 발생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시간으로 말하자면 미래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가는 것이 시작한다는 것도 미래와 현재라는 시간이 공존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가지 않는 것에서 가는 것은 시작하지 않습니다.

‘현재 가고 있는 것’은 가는 작용이 발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또 다시 가는 것이 시작한다고 한다면 두 개의 가는 작용과 두 명의 가는 행위자가 있다는 오류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현재 가고 있는 것에서 가는 것은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것은 어디에서도 시작하지 않습니다. 다음 13게송은 가는 것은 어디에서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부연설명입니다.

“가는 행위의 시작 이전에는 가는 행위가 시작한 때에 속하는

현재 가고 있는 것도 없고 이미 간 것도 없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떻게 가는 행위가 있겠는가?” 같은 책, p. 206

즉, 가는 행위가 시작하기 이전이라면 가는 행위가 발생하지도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가고 있다. 이미 간적이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론자는 가는 행위의 시작은 없을지라도,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현재 가고 있는 것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한 나가르주나의 답이 14 게송입니다.

“모든 경우에 있어서 가는 행위의 시작이 관찰되지 않을 때,

이미 간 것, 현재 가고 있는 것,

아직 가지 않은 것이 분별될 수 있는가?” 같은 책, p. 209

가는 작용이 멈춘 상태일 때 우리가 ‘이미 간 것’이라고 분별할 수 있고, 가는 작용이 현재 진행 중일 때 ‘현재 가고 있는 것’이라고 분별할 수 있으며, 가는 작용이 발생하지 않았을 때 ‘아직 가지 않은 것’이라고 분별할 수 있지만, 가는 행위의 ‘시작’조차도 하지 않았는데 갔다, 가고 있다, 가지 않았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미 간 것은 가지 않는다’는 구절도 채운샘께서는 시간의 개념보다는 행위와 주체로 설명하는 연습을 하라고 하셨지만 아직 제 공부는 쁘라산나빠다의 설명이라도 친절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목적인지라 갈 길이 멉니다. 연습문제 풀며 하루하루 가다보면 언젠가 그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며 후기를 마칩니다.

* 불티모아 4월 29일, 10회차 세미나 공지사항입니다.

1.명상: 이번 주는 미각 명상을 연습해봅니다

2. <친우서> 460~끝까지 읽어 오세요. 입발제 순서는 아래 게송 번호입니다.

106: 오헌식/ 107: 조은주/ 108:이윤지/ 109:이경아/ 110: 김은순/ 111: 김현화/ 112-113: 권영숙/ 114-115: 고은미/ 116-118: 임길례

3. <중론>과 <쁘라산나빠다>는 제3품을 읽고 맡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옵니다. 아래 입발제 순서는 3품의 게송 번호입니다.

3-1: 임길례 / 3-2: 고은미 / 3-3: 권영숙/ 3-4: 김현화/ 3-5: 김은순/ 3-6: 이경아/ 3-7: 이윤지/ 3-8: 조은주/ 3-9: 오헌식

4. 담주는 <중론> 과 <친우서>의 게송을 개인별로 낭송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1게송 이상씩 낭송을 준비해 오세요.^^

5.담주 간식과 후기는 윤지샘께서 준비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전체 2

  • 2021-04-26 20:24
    아직은 <중론>이 난해하고 시원하게 다가오지는 않치만, 뭔가 당기는 힘이 있어요. 점점 텍스트에 빠지고 있는 느낌!! 지난주 <제2품, 가고 오는 것에 대한 고찰>에서 저는 ''지금, 가버린 것은 가는 것이 아니다. 가버리지 않은 것 또한 가는 것이 아니다. 가버린 것과 가지 않은 것을 배제한 지금 가고 있는 중인 것은 가지 않는다'' 라는 게송에 끌렸어요. '감', '옴'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없다는...

    수업 후기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짧게라도 지난 수업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가가 되어 참 좋아요. 경아샘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21-04-27 14:29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 불교공부를 하고 수행을 하는데, 편안해지면 깨달을 수 없다....?!! 불교 공부와 수행을 통해 이르는 '편안함'은 천상계에서 모든 물질적 조건이 갖추어져 누리는 '편안함'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전자가 분별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마음의 본성에 닿은 편안함이라면 천상계의 편안함은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주는 안락함 같은 게 아닐까요? ^^

    정성스럽게 정리해주신 후기 잘 읽었습니다. 지난 강의의 핵심까지 복기해서 짚어주시니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듯 합니다~ ^_^
    감사해요, 경아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