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티모아> 5월 13일 2학기 1주차 수업 후기

작성자
현화
작성일
2021-05-17 22:23
조회
119
1교시: 명상

불티 세미나 1학기를 마치고 한 주 방학 후, 신체 명상으로 2학기 첫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신체 명상은 바디 스캔이라고도 하는데요, 몸 전체를 천천히 살피면서 몸의 각 부분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알아차리는 명상 방법입니다. 윤지 샘의 안내에 따라 10분 동안 머리끝에서 발끝 까지의 느낌을 살피는데, 저는 계속 딴 생각이 떠올라 그 짧은 시간이 참 길게 여겨졌어요. 혼침과 산란함 없이 오롯이 깨어있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2교시: 낭송

이번 학기 낭송 교재는 찬드라끼르띠의 『입중론』입니다. 입중론은 보살이 되는 세 가지 요인인 대비심과 불이중도의 지혜, 보리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10주 동안 반복해서 낭송하고 외우다 보면 초지에서 십지에 이르는 보살의 경지를 어렴풋이 엿볼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이번 주는 제1지의 발심부터 제5지의 발심 부분까지 두 번을 낭송했습니다. 제6지 발심의 분량이 엄청 많다고 하니 어떤 내용일지 다음 주가 기대됩니다.

3교시: 토론

이번 시간에는 『중론』 제4품 ‘온(蘊)에 대한 고찰’을 입발제 했습니다. 아직도 『중론』의 귀류 논증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반복되는 구조라서 처음보다는 덜 당황스럽다는 반응들이었습니다. 색(色)과 색의 원인이 분리되어 별도로 존재할 수 없음을 각자 나름대로 이해해서 설명을 했는데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나가르주나는 색뿐 아니라 수상행식 그 어떤 것도 자성이 없는 연기(공)임을 논증하는데요, 우리는 언제쯤이나 이를 체득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런 방식의 논증을 계속 접하다 보면 연기에 눈뜨는 시절 인연이 오겠지요.

4교시: 채운 샘 강의

짧은 방학이 아쉬웠던 불티 도반들은 수업이 없는 날 함께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더랍니다. 성대 뒷길로 해서 와룡공원을 거쳐 숙정문과 창의문까지. 서울성곽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고, 부암동에서 치맥을 나누며 ‘공’과 ‘인연’을 주제로 수다를 떨었습니다. 이 정도면 못 말리는 학구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채운 샘이 들으셨나봐요. 오늘 샘이 해주신 2학기 인트로 강의가 저에게는 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다. 적어도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이 공부를 통해 진정 무엇을 하려는지,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라 생각했습니다.

- 감각적 쾌락에 대한 경계

우리가 공부하면서 뭔가를 하나씩 버리라고 하는데요, 버린다는 것은 자기의 습관이나 기존의 생각을 해체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걸 해체해야 뭐가 변해도 변합니다. 한권의 책을 읽고 변하는 게 책을 백 권 읽고 똑같은 것보다 훨씬 더 잘 읽은 겁니다. 공자님도 책을 읽기 전과 후가 다르지 않다면 읽은 게 아니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공부할 때 항상 견지해야 되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늘 ‘감각적 쾌락이 어떻게 우리를 속박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감각적 쾌락 중 음주와 음욕 두 가지를 가장 경계하셨어요. 공자님도 식욕과 색욕을 가장 경계하셨지요. 색욕은 음란함, 성욕(섹스)이고, 술 마시는 것은 음주욕입니다. 이것을 왜 이렇게 경계할까 생각해봤더니 색은 너무 강렬한 체험입니다. 성욕은 뭔가 좋다는 타자에 대한 이끌림입니다. 이성이나 어떤 사람에 대해 한 번에 확 이끌리는 것은 과잉 정서이기 때문에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색에 대한 이끌림은 대상에 대한 애착을 강화함과 동시에 그 대상을 애착하는 나에 대한 애착도 강화하죠. 사랑을 하면 충만함을 느끼는 이유는 대상에 대한 애착을 강화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강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불교적으로 보면 애착은 아상을 강화시키는 겁니다. 그럼 술은 왜 경계할까요? 술이 들어가면 우리 뇌의 작용이 달라지게 됩니다. ‘취중진담’이라는 말이 있듯이 술을 마시면 지나치게 용감(?)해져서 평소보다 말이 더 세게 나가게 되죠. 식과 색의 감각적 쾌락 자체가 ‘좋다’거나 ‘나쁘다’라는 분별을 동반하기 때문에 아상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은 식과 색의 감각적 쾌락을 경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불교 공부를 하면서, 아상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술을 마시는 것은 뭡니까? 뭐라도 자기의 아상을 강화시키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닐까요.

공부가 자기 정당화 기제로 작용한다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가 우리의 분별과 아상을 더 강화시킨다면, 그런 공부는 자신의 존재를 양적인 축적에 의해서 증명하려는 겁니다.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무엇을 정당화할까요? ‘열심히’ 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열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다못해 보이스피싱을 하는 사람도 자기 맡은 일을 열심히 합니다. 그 ‘열심히’가 사기를 쳐서 문제죠. 무엇을 해도 열심히 하고 양(量)화하는 것은 아상을 강화하는 겁니다. ‘열심히’가 분별을 강화한다면 당장 중지해야 되지 않나요? 공부를 하는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고, 공부를 양으로 환원해서도 안 되며, 어떤 공부를 하던 자기 자신의 질문을 해체하는 지점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만 권의 책을 읽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공부가 나의 분별을 해체하지 않고 오히려 강화한다면 그것은 병이 됩니다. 왜 공부하지? 어떤 태도로 공부하지? 무엇을 끊는다면 그 기준이 뭐지? 불교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분별을 더 하고 아상을 강화하는 것이라면 뭐라도 끊으시라는 겁니다.

- 연기는 무자성이다

7세기 경 인도 나란다 대학의 사람들이 공에 대한 교리를 가지고 오면서 티벳 불교의 논리학이 발달하게 됩니다. 공이라는 세계의 실상(현상의 존재 방식)을 언어적인 논리로 입증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본격화된 겁니다. 비바바베카로 대표되는 자립논증파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자립논증 방식은 오히려 공을 비판받게 한다고 하면서, 11세기 무렵 귀류논증적 방법으로 공을 논하는 찬드라끼르티적 방식이 새롭게 대두합니다. 쫑카파 대사도 귀류논증이 공을 증명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말합니다. 귀류논증은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주장 자체를 논리적으로 격파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나가르주나의 논리학은 반논리학적이지요. 양변을 쳐내는 논리로 비정립적 부정이라서 불교에서는 이를 불이론이라고 합니다. 왜 귀류논증이 공을 논증하는데 우위를 가질까요? 자립논증은 여전히 주장하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파불교 중 경량부는 오온이라는 요소는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자성은 없지만 오온에 의해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공을 찰라생 찰라멸로 이해했습니다. 생겨났는데 없어지기 때문에 공이라 했지만, 나가르주나는 생겨난 것은 없어질 수도 없고 없던 것이 생겨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떤 것도 자성 없음을 연기로 이해해야 합니다. 찰나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연기가 아니고,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는 불생불멸, 적정을 연기라 했습니다. 흔히들 착각하는데 연기는 인과가 아닙니다. 어떤 결과에 대응하는 단독 원인이 없습니다. 우리는 선형적 인과만 따지는데 익숙하지만, 결과에 의존하는 것이 원인이고 원인에 의존하는 것이 결과입니다. 인과의 문제는 계속 원인을 따진다면 무한 소급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그렇게 있도록 만든 신을 요청하게 만듭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최초의 시작으로부터 원인은 없습니다. 최초의 세계란 없어요. 불교의 세계관은 무시무종의 세계입니다. 모든 만물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세계 전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시무종인 이 세계의 실상이 인연입니다. 우리의 습관은 결과의 시작점으로 원인을 설정하지만 어떤 것도 원인 자체를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업이란 모든 고리 속에서 어떤 것이 결과하는 것, 즉 이숙입니다. A에 대해 A에 상응하는 무엇인가가 일어나지 않아요. 선에는 선, 악에는 악이라는 결과가 상응하지 않습니다. 결과는 다르게 무르익지요.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 자체는 전혀 다르게 익어갑니다. 불교에서 사건의 원인은 시작도 끝도 없다고 하는데, 모든 것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무시무종입니다. 연기는 인과가 아니라 어떤 것도 자성이 없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연기를 통해 무자성인 공성에 이르러야 합니다. 연기는 우리의 상식과는 전혀 다른 인과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집착과 탐욕은 분별입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을 통해 어떤 것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고 그것이 있다고 믿고 애착합니다. 오늘 날씨가 더운 것이 아니고 내가 날씨와의 관계 속에서 ‘덥다’라는 말로 분별하는 겁니다. 언어는 내가 지금 어떻게 연기되어 존재하는가?를 말해줄 뿐 언어자체가 세계 자체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위가 연기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하지 않고 더워서 ‘싫다’고 말합니다. 말의 분별과 더불어 탐착이 생기기 때문에 분별이 곧 탐착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불교의 믿음은 닥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해하는 만큼만 믿는 겁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불편함, 찜찜함, 분별적인 것입니다. 두려움에 떤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방증입니다. 공부에는 언제나 두려움의 상태가 있어요. 깨달음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실체가 없어요. 불교에서는 부처님조차 공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자성을 가진 것으로 보면 그 자체로 지옥이 되지만, 자성을 가지지 않음을 깨달으면 모든 법이 해탈입니다. 비존재(자기 마음)를 존재로 인식하는 날조된 망상이 지옥을 만들어 냅니다. 저것 때문이라는 원인을 실체화하면 그 때부터 지옥문이 열리는 겁니다.

- 분별의 해체

논리란 언어의 구조에 불과합니다. 합리성은 논리적 구조에 불과한데 족쇄인 경우가 많아요. 해가 떠서 아침이 되었다고 하지만, 불교적으로 보면 해도 없고 뜨는 것도 없어요. 우리는 따져 묻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지만 그 논리적 구조는 날조된 겁니다. 우리는 그 구조는 문제 삼지 않고 팩트가 있는 것처럼 따져 물어요. 논리의 한계이자 언어의 한계에서 분별이 심화됩니다. 합리적이라는 말로 포장을 하면 분별은 더 심화되죠. 합리적으로 따져 물어서 원인을 알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지만 그렇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더 꼬일 뿐이지. 따져 물어서 원인을 아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구조를 꿰뚫어보고 분별을 해소하는 것이 불교적 해법입니다. 분별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끌려가지 않는 방식으로 분별적 사유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불교의 해법이죠. 외부에서 문제 원인을 찾아 따지려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분별을 해체해야 합니다. 분별의 구조를 해체하려면 어떤 것의 자성이 없음을 깨닫기 위한 오랜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울은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더 분별하는 겁니다. 우울하면 무겁게 침전되어 누구의 말과 표정에 대해 기분이 좋을 때보다 분별을 더 하게 됩니다. 분별은 자기가 자기에게 상처를 주는 겁니다. 불교의 논리에 따르면 외부에서 원인을 찾을 만한 것은 없어요. 원인에 대한 나의 느낌이나 언어를 붙들고 괴로워하는 겁니다. 세계가 분별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분별에 휘말리기 때문에 분별합니다. 무분별인 세계를 자기가 분별해서 그것을 붙잡는 것이죠. 언어의 매카니즘이 인지의 매카니즘이고, 언어의 한계가 세계의 한계입니다. 어떤 것도 무자성임을 알고 언어로 만들어진 희론을 격파하면 거기가 불생불멸의 적멸입니다.

세상에 좋은 공부와 같은 것은 없어요. 불교를 공부한다해도 분별이 강해질 수 있어요. 뭐든 공부를 가지고 자기 발밑에 번뇌를 해결하는 것이 관건이지 좋은 공부란 없습니다. 좋은 공부를 한다고, 열심히 공부하며 산다고 자신을 위안하거나 다독거리면 안 됩니다. 그런 분별을 떨친 자가 이긴 자이고 불생불멸을 얻은 자입니다. 분별을 타파하는 것으로서의 배움의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모든 공부를 할 때의 핵심은 나를 위해서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자기를 위한 공부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 언어의 한계를 알고 쓰기

초기 불교경전에 부처님은 논리를 벗어난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답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현대 논리학의 대가인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지요. 이 말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세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세계는 우리가 말하는 것으로 세계를 의미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는 그 차제로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어요. 말이란 이 세계를 이해하는 논리적 구조에 불과합니다.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인거죠. 내가 언어로 분별하는 만큼이 내 세계입니다. 그 분별하는 대로 여기가 지옥, 축생, 아귀의 세계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고한 대로 세계가 존재하는 거지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자체란 없습니다. 언어의 한계를 충분히 자각한 상태에서 사람들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철학은 언어가 마치 세계의 실상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철학적 질문이 이루어졌어요. 그것이 철학이 가진 병입니다.

세계라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언어적 구조의 한계를 담고 있는 말일 뿐이지, 말이 세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윤리적인 것은 말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전 삶을 통해 보여 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침묵이란 입을 닥치라는 말이 아니라, 언어로 세계를 의미화 할 수 있고 언어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철학자들을 비판하는 행위입니다. 붓다의 침묵도 이와 비슷합니다. 『숫타니파타』의 무니(현자)경에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무니의 조건은 독거와 계행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독거란 혼자 산다는 말이 아니라 대중의 익숙한 습관과 상식, 판단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부처님은 모여서 수다 떠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왜 수다는 지혜가 되지 않을까요? 수다는 기본적으로 인식의 매커니즘을 해체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다는 상식적인 생각의 주고받음이거나 논평일 뿐이므로 우리의 인식 체계를 해체하지 않아요. 술을 마시면서 수다를 하면 온갖 번뇌를 만드는 논평을 하잖아요.

우리가 공부했던 스피노자, 푸코, 니체의 언어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배우던지 분별적으로 구축한 자기의 상식을 해체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우리의 공부는 도그마가 되고 뭘 공부해도 독거하지 못합니다. 공부를 한다면 상식으로부터 거리두기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는 계정혜를 닦고 대중을 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대중으로부터 벗어나야 번뇌가 적어지죠. 사람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번뇌를 주는 말에 걸리게 됩니다. 대중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번뇌가 사라지지 않아요. 말을 많이 할수록 분별이 잦아지고 강화됩니다. 매일 기도를 하고 공부한다고 수행자가 아니라, 분별과 아상을 강화하는 행위를 끊어내는 훈련을 해야 수행자입니다.

붓다의 침묵은 언어를 가지고 언어의 분별을 깨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침묵은 언어의 한계에 대해 인식하고 말을 제어하는 겁니다. 예로부터 동양은 말을 신중하게 하는 것으로 분별을 제어를 해왔고, 서양은 언어로 세계를 합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믿고 언어와 논리를 강화시켜 왔습니다. 분별의 도구인 언어는 우리 사고의 한계지만, 그렇다고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사고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딜레마입니다. 부처님은 언어로 구조화된 것이 사고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언어를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언어가 관습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기 때문에 언어에 얽매이지 않아요. 언어는 관습, 즉 연기라는 겁니다. 언어에 얽매이지 않고 언어를 쓴다는 것은 언어가 가지고 있는 분별을 자각하고 쓰라는 겁니다. 어떤 말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을 연결시켜 맥락화 할 때 번뇌가 치성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무겁게 만들죠. 언어는 방편으로 가볍게 생각해야 합니다. 붓다의 침묵은 방편입니다. 어떤 알 수 없는 초월적 절대 상태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을 하는 순간 어떤 규정성에 사로잡힐까봐 침묵으로 언어 사용을 회피하는 겁니다. 부처님은 언어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그 순간의 연기에 따라 침묵하기도 하고 말하기도 한 겁니다.

아라한은 깨달은 사람이지만 여전히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넘어서지 못한 분별이 있습니다. 만약 아라한이 자신의 사후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에 대해 근심하고 부처님께 질문을 한다면 비아라한적 요소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두려워하고 갈망하는 것은 자성이 있다고 전제할 때입니다. 미래가 없는데 어떻게 걱정이 있나요? 진정한 아라한이라면 그런 질문은 무의미함을 알기 때문에 묻지 않습니다. 무의식적 분별적 성향을 바꾸는 것이 수행이기 때문에 깨닫게 되면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어떤 것도 자성이 없는데 무엇을 갈망하고 두려워할까요? 미래가 무자성인데 무엇이 무서운가요? 그래서 연기를 깨달은 자에게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질문은 무의미한 물음입니다. 깨달음에 대해 질문한다는 것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는 방증입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본래 죽음이 없는데 왜 죽음이 두렵나요? 죽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후를 걱정하는 겁니다. 분별만 없으면 우리는 불생불멸, 불사인거죠. 공부는 질문을 변화시키거나 무화시키기 때문에, 자기의 질문이 바뀌거나 없어지면 공부가 진전이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겁니다. 글쓰기는 논리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문을 바꾸는 연습입니다. 말과 글의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고, 그것을 자각하고 말과 글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공부하면서 말과 글을 쓰지 않으면 자기의 사고 구조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역설입니다. <인도인의 논리학>책에 대한 강의는 다음 주에 강의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것은 자성이 없는 연기이기 때문에 자기의 아상을 강화시키는 음주, 색욕, 수다, 양으로 축적하는 공부와 거리두기를 해서, 언어로 구조화된 분별을 타파(희론의 적멸)하라는 맥락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5월 20일 (목) 2학기 2회 세미나 공지 사항입니다.

 
  1. 명상: 매일 꾸준히 10분씩 방석에 앉아 신체 명상을 연습합니다.

  2. 낭송: 스프링 제본으로 된 <입중론>을 잊지말고 꼭 챙겨오세요.

  3. 토론: 중론 제5품 토론합니다. 입발제 분량은 게송 순으로 아래와 같습니다. 1-은순 2-은주 3-경아 4-현화 5-길례 6-설 7-윤지 8-은미

  4. 강의: 채운샘께서 인도의 논리학에 대해 강의해 주십니다. 강의를 듣기 위한 준비로 <인도인의 논리학> 제3장, 87-138쪽 읽어오세요.

전체 3

  • 2021-05-18 12:17
    지난 수업은 '책을 읽고도 변하지 않으면 읽지 않은것과 같다' 는 채운쌤 말씀에 충격을 받고 내 내면에 숨겨진 또다른 아상을 들여다보게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후기로 다시 친절하게 펼쳐주신 현화쌤 넘 감사해요^^

  • 2021-05-18 12:29
    수업이 복기되는 듯한 후기입니다^^
    지난주도 공부제일 채운샘은 주옥같고 청량한 일침으로 우리를 깨어나게 하셨죠. (약발이 오래가기를!)
    선생님의 주옥 같은 말씀중에,
    ''대상에 대한 애착은 나의 아상에 대한 애착이다''라는 말씀과 ''공부가 우리의 분별과 아상을 더 강화시킨다면, 그런 공부는 자신의 존재를 양적인 축적에 의해서 증명하려는 겁니다''라는 말씀이 특히 남습니다.
    1학기에 읽었던<친우서>의 내용이기도 하지만, 많은 것을 아는것 보다 한 개를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도 생각나네요.
    내가 공부로 비워지고 가벼워지기를!

  • 2021-05-19 20:43
    "분별을 알아차리고 그것에 끌려가지 않는 방식으로 분별적 사유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말그대로 매우 어렵네요.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 소위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는 식으로 회피하는 것이 아닐텐데, 사건을 직면하면서 분별을 알아차리되 그 구조을 해체하는 실천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구체적인 질문없이 받아들인 모든 분별을 의심하라! 아이고, 평생 의심해도 모자를 것 같습니다. 즐거운 의심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