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교<불티모아> 5월 20일 2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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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23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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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불티모아> 5월 20일 2학기 2주차 수업 후기

1교시 :명상

이번 주는 생각 명상을 하였습니다. 생각을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사라지지도 하지만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생각은 마음의 작용이라 통제하거나 붙잡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흐름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구성하는 소리, 말, 이미지, 등을 조작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 합니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는 사이 잠깐의 틈이 있습니다. 이 틈이 길어질수록 명료해집니다. 또한 일어난 생각을 바라볼 때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은 생각과 알아차림이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 그 자체를 알아차림 하면서 쉽니다.

2교시 : 중론 발제

5장 界에 대한 고찰에서 대론 자들은 6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나가르주나는 그렇지 않다. 만약 6계가 존재한다면 앞에서 말한 오온, 12처도 다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수화풍 공식 6계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론한다

. 5장에서는 6계 중 허공이라는 요소 하나만 논파한다. 허공(akasa)의 상은 무장애(무색처)이다. 만일 무장애라는 相(laksana) 이전에 허공이라는 소상(laksya)색이 존재한다면, 허공에 상이 발생할 것이다. 허공에 상(관념) 존재한다면 허공(색)이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 단락에서 “허공에 상이 없다는 오류가 따라붙는다.” 이 부분이다. 만일 상 이전에 허공이 존재한다면, 상이 없다는 오류가 따라붙는다. 왜 오류인지를 토론했다. 두 번째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서 인식하는 자가 있는가? 관찰대상인 색이 없는데 관찰 주체인 상이 있는가? 라는 부분을 가지고 토론하다가 우리의 구원자 채운 샘의 강의로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3교시 : 채운샘 강의   “허공과 상”

우리가 헤매는 것도 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고, 우리가 어떤 언어를 접할 때 기존의 인지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바로 뭔가가 따라 나온다. 그래서 중론에 대하여 다양하게 해석된 책들도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고 하십니다.

界는 세계를 만들어내는 요소 또는 근거입니다. 대론 자들은 우리의 경험 세계를 구성하고 만들어내는 육계가 있다. 그것이 지수화풍 공식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육계가 존재하는가? 나가르주나는 반문합니다. 우리의 토론이 허공에 대한 이해보다도 구성요소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 相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상에 대한 번역이 해석자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질은 무엇인가? 서양식으로 보자면 色이라고 하고, 그 물질에 대한 관념을 相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물질세계가 있어서 그 관념을 형성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럴까요? 감각대상이 있어서 감각하는 것이 아니듯이 감각주체가 있어서 감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감각 대상이 없으면 감각 주체라고 하는 것도 없는데, 감각대상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개념적으로 분리를 하는데 분리를 해놓고 따져보면, 주체가 없이 대상이 있을 수 있느냐 반대로 대상이 없이 주체가 있을 수 있는가? 즉 각자의 자성 없이 상호 의존하여 출현하니까 주체도 객체도 없는 논리 구조입니다

그러면 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질이 없는데 관념만 있을 수 있나요? 반대로 관념이 없는데 물질세계가 있을 수 있나요? 불교에서 일체유심조는 주관주의도 객관주의도 아닙니다. 대상이라고 부르는 것과 주체라고 부르는 것이 동시적으로 연기하지 않고 따로따로 출현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相이라는 것은 뭘까요? 어떤 세계에서 부여하는 어떤 관념인 것인데, 그 관념(상)은 그 자체가 세계를 그렇게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 관념을 부여하기 전에 세계 자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관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우리가 세계라고 부르는 어떤 것을 관념화함으로써 색과 상이 동시적으로 출현합니다. 마찬가지로 물질과 관념도 동시적이며 물질의 원인인 것도 아니고 관념이 원인인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경험 세계를 구성하는 육계 중의 하나인 허공을 보고 ’비어있네’라고 하는 것은 상을 짓는 것이 됩니다. ‘비어있네! 허공이네’라는 상은 이미 허공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허공이라는 관념을 만들기 이전에 허공이라는 것이 존재하나요? 예를 들어 날아다니는 새가 있다면 그 공간을 허공이라고 생각할까요? 또한 물고기가 물속의 삶의 터전인데 그곳을 물이라고 인식할까요? 우리의 관념이 물. 허공이라고 구분 지어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계도 그것을 인식하는 자에 의해서 비로소 출현하는 것이기에 다른 조건에서 출현하게 된다면, 그 각각의 요소들도 경험 세계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구분되겠지요?

지수화풍 공식이라는 각각의 요소라고 상을 짓기 이전에 특징지어진 어떤 것이 있을까요? 즉 우리가 규정짓기 이전에 규정지어지는 어떤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능상은 규정을 만드는 것이고, 소상을 규정을 지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내가 뭔가에 모습(모양)을 부여하기 전에는 그것은 모습으로 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로 보자면 세상의 객관적으로 네모라는 게 있어서 네모가 아닙니다. 내가 네모라는 관념을 선험적으로 가지고 있어서 네모라는 관념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 인연의 장 속에서 연기로 그것이 네모라는 상으로 규정짓는 방식으로 동시적으로 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공에 대해서 상을 부치기 이전에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상이 이전에 허공이 존재한다면, (허공은) 상이 없다는 오류가 따라붙는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상이 없는 (허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상이 존재하지 않을 때 허공도 존재하지 않는다. (277)

우리가 상을 만들기 이전에도 존재한다고 한다면, 허공은 상 없이도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번역상의 문제도 있습니다. 한문에서는 규정함으로써 그것이 있는 것인데, 규정하지 않고서 그것이 비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비어있다고‘ 규정함이 유(있다)가 발생합니다. 차 있다 비어있다가 바로 규정인데 이전에 허공이 있다고 라고 하면 규정하지 않았는데 규정이 혼자서 규정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모순입니다.

상이라 모습을 부여받지 않았는데 상이 존재할까요? 만약 이러한 세계가 있다면 우리와 무관한 객관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물질과 관념이 뭐가 먼저가 아니듯이 뭔가를 연기로 해서 관념이 형성되고 그 뭔가라고 하는 것도 관념으로 인하여 있는 것입니다. 상을 부여함으로써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그 존재와 연하여 상도 있는 것이 됩니다. 상을 부여하기 전에 색은 없다. 그러니까 ’색도 없고 상도 없다‘ 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요소도 없고 요소에 대한 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유가 성립하지 않으면 무가 성립하지 않듯이 유가 부정되는데 무가 부정되는 것은 당연하다. 일반적인 논리학에서는 有가 부정되면 바로 無가 따라 나옵니다. 유를 부정하면 유가 아닌 것도 부정하는 일반 논리학은 부정에 부정은 긍정으로 하지만, 불교의 논리학은 부정의 부정이 긍정이 아니라 그냥 부정이라고 양면을 다 쳐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가르주나 말하는 유를 부정하고 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중도입니다.

그러니까 상을 만드는 행위와 그 상으로 인해 모습을 부여함으로 만들어지는 것, 이 둘은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는 관계이며, 규정지어진 것이 없다고 하면 규정되는 것도 없다가 됩니다. “그러므로 소상은 존재하지 않고, 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소상 및 상과 분리된 별도의 존재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쁘라산나빠다 5.5)

모습을 부여하는 주체적 행위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규정과 규정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규정을 부여하기 전에 규정된 것으로 있지 않고, 규정되는 어떤 것이 없이 규정 그 자체가 규정되는 것도 없습니다.

“존재가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떤 것의 비존재가 존재하겠는가? 존재 및 비존재 이외에 어떤 다른 법이 존재와 비존재를 인식하겠는가?”(5.6)

이 말은 有가 없는데 無가 있겠는가?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존재 및 비존재 하니까 우리는 언어에 메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어에 메이지 말고 맥락에서 파악해야 합니다. 유라고 하는 것이 있지 않은데, 유를 쳐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유가 있어야 무가 같이 있게 됩니다. 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찌 있지 않음이 존재하겠는가? 유도 없고 무도 없는데 제3의 존재가 있을까요?

“존재와 비존재의 관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287) 유무가 없는데 이것을 관찰하는 자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관찰대상이 없는데 관찰 주체가 있는가입니다.

불교에서는 무와 공은 다릅니다. 공에다 허자 하나 붙이면 허공이 됩니다. 의미가 달라집니다. 공은 중도이니까 유무도 아닌 것이 공입니다. 그러니까 존재가 공하다고 무의식까지 아는 자는 존재 및 비존재에 대해 집착하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무는 유와 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있다(상주론). 어떤 것이 없다(단멸론). 유가 있다고 하면 유가 아닌 것은 없는 것이 상주론입니다. 그러나 유가 없다고 하면 무도 없어 단멸론도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있다는 것에 집착하든 없다는 것에 집착하든 유무가 없습니다. 공이지요

불교는 공을 깨달은 자만이 자유자재하다고 합니다. 즉 공을 깨달은 사람만이 어떤 것과의 접촉에서도 자유자재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공을 의식적으로 대충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공의 깨달음이 무의식지점까지 가서 삶에 침투되어 있지 않으면, 여전히 분별적 사유에 머물게 됩니다.

부처님의 삶은 몸과 마음으로 무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은 어떤 존재에 대해서도 선험적 판단이 없고,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연기 이전에 나타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육계의 세계도 연기로 보기 때문에 규정된 어떤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공과 연기 사상이 허무주의 일까요? 니체는 불교를 접하고 허무적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그 이상을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수동적인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깨달은 자만이 능동적인 삶을 자유자재로 산다고 합니다. 세존께서도 공한 법들은 언어로 표현되지만,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것들이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공한 법은 언어로 표현은 되지만, 그것을 언어적 규정성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헤아림(사량)으로 적정, 공, 무아, 무상 등을 헤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헤아림은 규정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희론은 대상에 대한 마음(citta)의 尋(vitarkana)이다”(288) 여기서 심은 의도이며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 작용으로 우리는 어떤 것들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방식으로 존재가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계는 이러 저래해라고 하는 순간 우리의 의도가 만들어내는 실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의도한 행위가 업으로 나타나고, 의도하지 않은 행위는 바로 잊어진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한 행위 중에 좋은 의도를 가졌든, 나쁜 의도를 가졌든, 의도를 내고 한 것은 업으로 강하게 남습니다. 업으로 강하게 남는 것 안에는 내가 지은 인과가 깨알같이 남아 있습니다. 뭔가에 대해서 좋은 마음이든 나쁜 마음이든 그 의도가 분별을 만들어내고 업을 짓게 되지요. 우리가 만들어 놓은 의도를 해체하기 전까지는 유의 세계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부하고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하고 대결하는 것입니다.

경험 세계의 요소라고 하는 지수화풍 공식도 하나의 요소들로 우리가 ’있다‘ 라고 하는 상을 붙여서 존재합니다. 마찬가지로 ’허공’을 비롯한 나머지 육계도 있는 것도 아니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소상도 말하자면, 모양을 갖는 것, 규정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특징을 부여하기 전에 특징이 나타날까요? 특징이 있다고 언어로 취하므로 유가 발생합니다. 그러므로 상과 소상이라고 하는 것도 어떤 특징을 부여하지 않으면 유로 나오지 않습니다. 허공처럼 나머지 육계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런데도 존재와 비존재를 말하는 자들은 유와 무속에서 어떤 것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상태를 적정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세계는 유도 무도 아닌 공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세계가 존재하는데, 우리의 체험으로는 못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논리학이 왜 필요할까요? 우리의 인지 메커니즘은 논리학을 배운 적은 없어도 이미 나름대로 기승전결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작용으로 인과를 깨알같이 만들어 냅니다. 그 마음 작용 자체가 하나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논리적 메커니즘이 전제하는 것은, 말이 되는, 말이 되지 않든, 인과나 개념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들어낸 인과 구조가 절대적 세계의 실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계속 깨면서 가느냐, 아니면 그것을 붙잡고 가느냐가 논리학이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요?

4교시 :인도인의 논리학

인도의 논리학은 해탈을 통해 자기 구원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서양의 논리학은 지성을 통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합니다. 즉 인간의 이성으로 어떻게 세계를 이해할 것인가? 여기서 멈추었지만, 인도의 논리학은 이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해가 우리를 어떻게 해탈로 인도할까를 고민합니다. 만약 해탈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 논리는 무해한 것으로 취급합니다.

대단히 실용적이고 실천적이라 할 수 있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서양은 매우 실천적이고 동양은 매우 신비적이라고 오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의 사상도 대단히 현실적입니다. 현실적이라는 것은 앎이 우리를 구원과 해탈의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러한 논리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를 질문합니다. 지를 위한 앎, 앎을 위한 지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 궁극에는 깨달음이라던가 존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에 있지요.

아무리 무지한 자도 자기 나름의 논리로 중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구조를 해체하지 않으면 상의 구조는 절대 깨지지 않습니다. 상이 깨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뭔가의 의지처를 옮겨 다니며 상을 만들어냅니다. 자기가 만드는 상마다 의지처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있다 라는 상을 부여하면 거기에 붙어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려 노력합니다. 그러한 것이 해체되지 않으면 계속해서 자성과 표상을 짓고 살아갑니다. 이러한 인지구조를 해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언어적 방편을 통해 언어로 구성되는 분별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논리학입니다. 그러니까 논리로써 해탈의 이르는 길이 곧 분별의 구조를 해체하고 자유자재한 삶을 사는 것이라 합니다.

6.7세기는 베단타 철학이 논리학적으로 가장 많이 발달했습니다. 이 시기에 왕들은 학자들과 대론하는 장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전통으로 부처님과 바라문들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고, 묻고 답하는 방식이 문답법도 발달하게 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도 플라톤의 대화편은 다 소피스트들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시대에는 소피스트들을 물리치는 게 중요했습니다. 플라톤이 보았을 때 소피스트들의 시대는 사상적으로 혼란하다고 보았고, 그것을 부추기는 소피스트들에게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스승(소크라테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소피스트들을 궤변론자(詭辯論自)로 몰아갑니다. 그런데 진짜 소피스트들이 궤변론자일까요? 플라톤의 논리로 소피스트들을 그렇게 만들어낸 것이지요. 소피스트들은 굳이 말하자면 어떤 절대적가치를 잊지 않았던 자들이며, 그 지역의 상황에 따라서 가치를 다르게 말해주었다 할까요? 그러므로 그들은 그 지역 상황에 따라 논리가 다르게 작동했다고 볼 수 있지요. 플라톤이 보았을 때 일치하지 않는 논리를 펴고 다닌다고 궤변론자로 몰수 있었지요?.

서양에서는 소크라테스와 상대 대론 자가 토론을 하면, 말이 토론이지 일방적으로 그 사람의 질문을 미궁에 빠트리는 방식으로 끌고 갑니다. 소크라테스와 대론 자가 논쟁에서 어디에도 갈 데가 없는 지경에 이르면 오갈 때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즉 맨붕이 올 때까지 논리를 끌고 가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말려서 그런 것입니다.

불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 논리의 근거가 다 논파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4장에서 나가르주나가 근거 하나하나를 귀류법으로 쳐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는 이러한 논리학의 전통이 이슬람 세력이 들어오면서그 전통이 크게 꺾이고, 11세기 이후부터는 티베트에서 그 전통이 발전하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티베트의 논사들 중에 한 분인 찬트라끼르띠(월칭) 논사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5월 27일 2학기 3회차 세미나 공지 사항입니다.
  1. 명상 : 생각 명상을 매일 10분씩 꾸준히 합니다.

  2.  낭송 : 스프링 제본으로 된 (입중론) 챙겨옵니다.

  3.  발제 : 중론 제6품  입발제 입니다. 순서는 1-은미,2-현화, 3.4-설, 5- 길, 6-윤지,7-은순, 8-은주, 9-현식,10-경아 입니다.

  4.  인도의 논리학 : 4장 174쪽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전체 3

  • 2021-05-24 13:07
    구원자 채운샘 ㅎㅎㅎ 공감합니다~ 개울에서 놀던 우리가 채운샘 설명을 들으면 바다로 나간듯하지요.
    자기가 만들어낸 인과 구조가 절대적 세계의 실상이 아님을, 내 경험으로 구성한 세계를 계속 깨면서 가야한다는 말은 여타 불교책에도 보아온 말이지만 <중론>으로 전해지는 강도는 다르네요. 더불어 오온은 내가 만든 업으로 계속 돌아갈 터이니, 내가 구성한 세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겠다는 다짐도 강도있게 들었습니다. 근데 <중론> 텍스트는 왜 강렬한 걸까? 논리학이라 그런 걸까? 잠시 생각해봤네요. 하지만 아직은 논리학을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기에, <쁘라산나빠다>를 읽으면서 ''대체 이게 뭔 뜻이여?''라고 외쳤던! 이해보다는 머리를 쥐어짰던 기억이 강하게 남은것 같다는 느낌이...

    그러고 보니, 1교시 주제였던 생각을 바라보는 명상은 내가 규정했던 관념들을 바라보며 내려놓기에 좋은 훈련 방법이 되겠네요!
    참으로 명상과 중론은 마춤한 공부입니다. ^^ 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21-05-25 17:48
    인지와 언어 구조를 흔드는 질문이 거듭되면서 중론이 깊이가 더해지는 것 같습니다. 허공에 상이 있어? 무엇이든 상이 없는 것이 존재할까? 아니 상이 없는 것은 무엇이든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하면서 생각할 수록 자석으로 쏠리듯이 다시 상을 짓고 있는 것이 거듭되는 것 같아요. 후기 읽으면서 또 복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1-05-25 21:27
    해탈로 인도하지 않는 논리따위는 필요없다....! 아아, 저는 치밀한 논리를 통과해 지혜에 이르고 그 지혜가 해탈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논리-해탈의 관계가 너무나 신선했습니다. 따지고 따지는 논리학의 세계는 해탈-깨달음의 세계와는 너무나 동떨어져있는 것 같은데, 깨달음을 있게하는 저변에 아주 아주 치밀한 논리적 이해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것.... 흠흠, 이 아둔한 머리를 쥐어뜯어가며 중론-논리의 세계를 돌파해가야 하는 거죠?! 불~끈!

    환한 길잡이와도 같은 정성스러운 후기 감사합니다, 길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