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8주차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4-03 17:17
조회
96
“루크레티우스 이후, 여전히 ‘철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민음사, 193쪽)

(지난 토론 시간에도 이야기 했지만) 들뢰즈는 루크레티우스가 ‘철학의 쓸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가 아무런 근거나 설명도 덧붙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직접 읽고 있으니, 나름대로 그 이유를 설명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루크레티우스가 철학의 유용성을 증명한다면, 그것은 그가 철학만이 제시할 수 있는 해결책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유한한 실존과 우리를 안락한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 변화무쌍한 세계. 루크레티우스가 보기에 인간 실존의 조건 자체는 불행의 원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에 대한 우리의 편협한 견해이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온갖 정념들입니다.

불행의 원인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다. 이러한 진단으로부터 비롯되는 루크레티우스의 해결책은 ‘원자’라는 근원의 차원에 입각하여 우리의 관점을 탈인간화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근원적 차원에서 볼 때 세계는 인간의 경험적 해석을 닮아 있지 않습니다. 이번에 함께 읽은 2권에서 루크레티우스는 인간적인 해석을 세계의 근원에 투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맛을 느끼지만 그러한 해석은 대상 자체에 대해 별로 설명해주는 바가 없습니다. 맛이나 색은 사물 자체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상이한 배치의 원자들 간의 마주침 속에서 발생하는 것일 뿐이죠. 원자는 맛도 색도 없습니다. 원자의 빗겨남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을 대립적인 것으로 경험합니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애초에 원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결합하기 위해서는 직선 운동으로부터 이탈하는 움직임이 존재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신의 섭리나 누군가의 계획, 참된 의미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고도 생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우연한 이탈로 인한 새로운 마주침,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부단한 창조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해결책은 다분히 철학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강요하거나 외부적 조건에 대한 의존을 늘리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의 체계를 의심함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워지라고 말하니까요. 종교는 내세에 대한 기대나 천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줌으로써 현실을 그럭저럭 견뎌내도록 해줍니다. 국가나 자본은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마련하는 것에서 구원을 찾도록 함으로써 삶에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불안하고 유한한 삶에 대한 이러한 해결책들은 특정한 이상에 의존하도록 하고, 이러한 의존이 강화될수록 삶은 더욱더 결여와 위험과 불안으로 가득한 것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반대로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적 해결책은 특정한 의미나 해석이나 이상을 붙잡는 대신에 그것들을 내려놓음으로써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영혼의 평정에 이르는, 가장 어렵고도 고귀한 방법을 보여주는 것 같네요.

후기가 너무 늦었네요! 내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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