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탁 서양 9주차 후기 및 10주차(4.11)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4-06 16:36
조회
81
 

 

절차탁마 서양철학이 개강한지 벌써 9주가 되었어요. 저희는 지금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함께 읽고 있답니다.

이번에 읽은 3권의 내용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의 번뇌에 핵심에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우리의 종교심뿐 아니라 명예나 재산에 대한 탐욕, 심지어는 괴로움에 못 이겨 자살하는 경우까지도 상당 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상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한 결과 자살에까지 이르다니요?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할 때,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를 두려워하는지 아니면 죽는다고 생각할 때 발생하는 감정들이 무서운 것인지, 나아가 죽는다는 것은 대체 뭔지 등을 정신 차리고 물어봐야 합니다. 거기에는 분명 어떤 견고한 믿음들이나 당위들, 이러저러한 판단들이 엉겨 붙어 있을 것입니다. 그 잉여들로부터 우리는 가능한 한 죽음을 미루고 피하고, 나쁜 것이라고 저주하며,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를 취하려고 노력합니다.

루크레티우스가 보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아주 많은 부분은 무한성에 대한 오해에서 옵니다. 이때의 무한은 아주 많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떤 것이 변하지 않고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무섭게 느끼는 것은, 우선은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이렇게 계속되어야 한다는 본능적인 바람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죽은 후에도 지속되는 무언가(영혼)이 있어서 그것이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이 두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또는 죽음이나 그 이후에 고통이나 즐거움을 느낄 주체가 있다는 식의 생각도 보태집니다. 하지만 우주 차원에서 보면 죽음은 원자들의 흩어짐입니다. 이것만이 명백한 사실이지요. 원자와 허공, 원자들의 결합과 해체의 운동만이 무한합니다. 나머지 다른 사물들과 생명체, 몸, 정신, 영혼도 모두 이런저런 인연들로 임시적으로 조합된 구성물이지요. 그러니 이것들이 계속 지속되어야 하다는 믿음은 그른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 간극에서 일어나지요.

그래서 루크레티우스는 무엇보다 우선 우리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정신과 영혼의 본성을 밝히는 일에 착수합니다. 내용은 심플하죠. 영혼과 정신도 육체와 같은 본성이라는 겁니다. 즉 원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곧 쉬이 흩어진다는 것이죠. 이것은 <국가>에서 플라톤이 묘사한 영혼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가볍고 빠른 원자로 되어 육체의 각 부분들에 담겨있는(서로의 안녕의 원인이 되면서!) 영혼과 정신은 육체와 함께 성장하고 늙고, 병에 걸리면 동요하고 술에 취하면 흔들리다가, 죽음과 동시에 흩어져버립니다. 영혼 없는 육체는 썩기 시작하고, 육체 없이는 영혼은 모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데, 죽음 이후에 기쁨이나 쾌락을 느낄 주관적인 무엇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뭔가 헛헛하죠? 죽음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남은 사람의 문제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남은 자들이 곤경에 처하고 괴로워하더라도 죽은 자에게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며 내려보는 ‘죽은 자’는 이미 없기 때문이죠. 그것은 아직 살아 있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의 경험으로 미뤄 짐작한 오류이지요. 죽음은 나의 관점에서야 소멸이지만, 원자의 관점에서는 자리바꿈이고, 자연의 관점에서는 동시에 다른 것의 탄생입니다.

세미나를 하면서, 어차피 흩어질 원자들이 모임이 삶이라고 생각하면 뭔가 허무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왔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이 되는데요. 아무리 물질적 세계가 그러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마음은 그렇게 심플하게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을 바꿔볼 계기는 있었습니다. 흩어짐이 무로 돌아가는 것 같고 허망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전히 흩어지기 전의 무언가의 관점에서만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은 끝이고 종료죠. 하지만 그 흩어진 것이 다른 무언가를 또 만들고, 다른 방식 다른 모양의 것들이 자라날 토양이 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어떤 것도 심연이나 어두운 타르타라로 넘겨지지 않는다. 이후의 세대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재료들이 있어야만 하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것도 삶을 마치면 그대를 뒤따른다. 그래서 그대 못지않게 이런 세대들도 이전에 스러졌고, 또 앞으로도 스러질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기를 그치지 않으며, 삶은 누구에게도 완전히 소유되지 않고, 모든 이에게 그저 대여될 뿐이다.”(258쪽)

삶이 대여된다, 필멸의 존재들은 차례 바꿔 산다. 루크레티우스는 사실 흩어짐 자체보다도 계속 무언가가 새로 생겨난다는 것을 더 주목하는 듯 보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 전체가 비너스 여신을 찬양하며(종교를 비판하면서도!) 시작하는 것 아닐까요? 죽음의 허망함을 넘어가기 위한 사유는 그 어떤 일보다도 자연에 대한 치열한(사무치게 치열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듯합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이런 분석이 단지 ‘알겠지만 그렇게 하긴 어려운’ 관념이 아니라 정말로 우리 생각과 느낌의 차원에 개입하고 작동하게 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두가 공통과제를 써 오셔서 그런지, 세미나가 더 풍성해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게는 이우의 과제 마지막 부분이 계속 남았습니다. “불교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계속 환생을 하건,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원자로 계속 돌며 존재하건, 아니면 그냥 죽고 없어져서 소멸하건 간에 나 ‘엄이우’로서의 삶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유언장 아님).” 죽음을 두려워하는 문제와 별개로, 어쨌든 원자들이 지금 이런 방식으로 결합되어 이런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는 나 자신은 유일무이합니다. 그렇게 보면 전혀 허망하지 않지요. 그럼 그것에 집착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루크레티우스의 말대로, 이런 유일무이한 인연으로 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그 삶을 어떻게 영위해가야 할까를 고민해야겠지만, 그것이 삶을 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일반적 태도와는 어떻게 다를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무상을 보고서, 자연의 이치를 알고 나서, 이 자리 이 시대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지 상상해보며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4권을 읽어옵니다. 3권에서 죽음의 문제와 더불어 정신과 영혼의 구조를 배웠다면, 4권에서는 그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즉 물질세계의 원리들을 오해하는 우리의 믿음과 편견과 착각과 오해는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떻게 감각이 아니라 정신이 우리를 속이며 그것은 얼마나 뒤엉킨 혼돈의 도가니인지, 루크레티우스는 이 또한 원자들의 운동으로 설명합니다. 그 유명한 시뮬라크라가 등장하지요. 그럼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참, 성균관을 산책했는데 비온 뒤 날이 어마어마하게 맑고, 해는 밝고, 공기는 따숩고, 하늘은 파랬습니다. 규문에서 그래도 가장 젊은 멤버들로 구성된 저희는 공부할 때보다 다소 점잖게 성균관을 거닐었습니다. 그리고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했지요 ㅎㅎ 사진 몇 장 첨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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