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 절차탁마

절차탁마 서양 기초 2학기 두 번째 시간(5.3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5-28 20:38
조회
122
안녕하세요. 공지가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네요@@ 먼지 공지부터 하자면, 이번 시간에는 《스피노자 매뉴얼》 3장을 읽고, 《윤리학》 1부 부록을 읽고 오시면 됩니다. 과제는 1부 부록 내용을 정리하고 그에 관한 질문이나 생각거리를 덧붙여 오시면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현정샘의 인트로 강의와 더불어 스피노자의 시대와 생애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17세기의 네덜란드는 굉장히 독특한 정치 · 종교 · 경제 · 학문적 지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스피노자 매뉴얼》의 저자인 모로는 “17세기의 네덜란드, 그것도 네덜란드의 부유한 상업 중심지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정치, 종교, 학문(과학)과 관련된 삼중의 의미를 띠고 있다”(35쪽)고 말합니다. 우선 정치적으로 네덜란드는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으며, 의회와 총독의 이원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오라녀 가문이 약화되면서 의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스피노자 생전의 많은 시간 동안 네덜란드는 귀족공화정에 가까운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종교적으로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그 내부에는 예정설을 엄격하게 지키고자 했던 호마루스파와 자유의지에 큰 역할을 부여하는 아르미니우스파 사이의 대립을 위시하여 다양한 세력들 간의 갈등이 자리하고 있었죠. 다양한 세력들 사이에 형성된 불안정한 균형은 의도치 않게 관용의 분위기를 만들었고, 프로테스탄티즘만이 아니라 루터파나 가톨릭, 유대인들에게까지도 그러한 분위기가 확장되었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사상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가 비교적 보장될 수 있었죠. 갈등의 틈새에서 피어난 자유의 공간으로 박해를 받던 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했고, 그 결과 다양한 저자들이 자신들의 모국에서는 출판할 수 없었던 책들을 네덜란드에서 인쇄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인 스피노자는 물론 이러한 조건으로부터 많은 수혜를 입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네덜란드의 발전된 과학기술로부터도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생계수단이었던 렌즈 세공은 당대의 ‘첨단 기술’이었다고 합니다.

스피노자 시대의 네덜란드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은, 단순히 그곳이 더 자유롭고 선진적인 사회였기 때문은 아닙니다. 토론을 하면서 저희가 흥미를 느꼈던 건 그러한 자유와 발전이 불안정과 갈등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어떤 사회가 별다른 갈등도 없고 모두가 안정적인 조건 하에서 풍요를 누린다면, 우리는 그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안정과 풍요라는 것이 하나의 힘, 하나의 가치가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면 그것은 한 문화의 건강이 약화된 상태를 보여주는 징후일지도 모릅니다. 스피노자 시대의 네덜란드는 그런 의미의 평화나 안정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연방 의회의 재상이었던 얀 더빗 형제의 비극적 죽음에서 드러나듯 정치적 동요가 심했던 시기였고, 종교적으로도 여러 교파들 사이의 불화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와 출판의 자유가 제대로 보장되어 있던 것도 아니라서, 스피노자는 《신학 정치론》 같은 책을 출판하기 위해 거의 목숨을 걸어야 했고 자유사상가들이라고 여겨지던 사람들로부터 학문적 박해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불화하고 갈등하는 다양한 힘들 가운데에서 스피노자의 철학과 같은 길들여지지 않는 사상이 배태되기도 했습니다. 자유가 다양한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의 실존을 주어지지 않은 방식으로 양식화하는 것과 관련된다면, 그러한 의미의 자유는 ‘불안정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오히려 자신에게 꼭 맞는 터전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좋은 사회’에 대한 우리의(저의) 상상력이 사실은 굉장히 편협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스피노자의 시대와 생애 이야기를 하고 나서는 《지성교정론》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지성교정론》은 “마침내 결심했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 스피노자의 초기 저작인데요,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스피노자가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최고 선’을 인식의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지성교정’론이라는 제목과 걸맞지 않게(?) 스피노자는 세간에서 최고의 선으로 간주되는 부, 명예, 정욕에 대한 회의로 《지성교정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가치에 관한 물음이 인식하는 삶의 출발점에 놓인다는 것. 여기서 자기 삶의 변형 외에 진리에 이르는 다른 길이 없으며, 더 높은 완전성으로 이행해가는 주체의 운동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다고(그리고 완전하거나 불완전하다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스피노자가 너무나 산뜻하고 명료하게(!) 세속의 삶으로부터 최고선을 추구하는 삶으로의 방향 전환을 이뤄내는 대목이 제게는 몹시 인상적이었습니다. 부, 명예, 정욕을 포기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아직 불확실한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포기하는 미련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부, 명예, 정욕에 대해 좀더 숙고해본 결과 그것들이 그 자체로 좋은 것으로 여겨질 경우 필연적으로 인간을 불행과 예속으로 인도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부, 명예, 정욕은 ‘본성상 불확실한 것’임이 판명이 났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들을 포기하고 ‘삶의 새로운 짜임’을 실험하는 것은 ‘도달이 불확실한 선’을 위해 ‘본성상 불확실한 선’을 포기하는 셈이 되므로 더 이상 이전처럼 전적으로 불합리한 선택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피노자는 여기에서 한 번 더 가볍게 도약합니다. 사유를 더욱 밀어붙인 결과 그는 지금 자신이 확실한 선을 위해 확실한 악을 포기하려 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놓인 조건을 재고함으로써 이러한 통찰을 얻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최고의 위험에 빠져 있음을, 그리고 설령 불확실할지라도 부득불 온 힘을 다해 치유책을 찾아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즉 자신이 다른 삶을 실험하지 않고 살던 대로 살 경우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부, 명예, 정욕을 소유하거나 그것들에 소유 당함으로 해서 파멸하게 될 처지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죠. 따라서 그는 마치 치명적인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처럼, 비록 아직 불확실한 것일지라도 치유책으로 보이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 수밖에 없고, 따라서 도달이 불확실할지라도 새로운 삶을 시도하는 것만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고 저는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답니다. 이렇게 온화하고도 굳건한 “결심”이 있을 수 있을까요? 무엇도 부정하거나 배제하려하지 않으면서도 더없이 확고한 결단을 내리고 있는 스피노자의 문장들에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장들을 읽다보니 저도 스피노자처럼 가벼우면서도 치열하게 삶의 새로운 짜임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의욕이 생겨났습니다. ‘막간들’이라는 표현도 정말 좋았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이전과 다른 삶의 양식을 조형한다는 것은 탐욕과 정욕, 영애를 일시에 포기하고 그것들을 죄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숙고에 힘을 씀으로써 이전에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막간들’을 형성하게는 것이었습니다. 점점 더 빈번하게, 이탈하는 흐름들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실천들 속에서 부와 명예와 정욕을 삶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다른 관계를 형성해가는 것.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딘가로 치우치거나 어떤 외부 대상에 지배당함 없이 자연 전체와 합일을 이루는 것. 이것이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최고의 선’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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