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3학기2주차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21-08-08 01:45
조회
125
지루한 펜데믹 상황입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 차선이 아니면 차악이라도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지요. 줌 토론을 할 때마다 느끼는 이 차선책들의 행진은 언제 끝날까 하는 겁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때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삶만이 있을 뿐, 번뇌는 상황 자체를 선택하고 말 자유의지가 우리한테 주어져 있다는 망상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록 후반부를 읽고 나눈 토론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푸코의 성의 역사를 공부하다가 사이드 텍스트로 고대의 그리스 로마의 현인들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 다소 의외인 듯합니다. 현숙쌤과 장청쌤이 말씀하셨나요? 삶의 지침서로 활용하기 딱 좋은 책을 발견한 느낌이었다고요.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갔습니다. 저 또한 크세노폰의 시선 속에 담긴 소크라테스가 정말 의외였거든요. 경혜쌤은 우리가 푸코를 읽다가 고대로 넘어왔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면서, 이 책이나 다음 주부터 읽을 세네카의 <인생에 대하여>도 자칫 좋은 게 좋은 것, 삶에 지침이 될 ‘좋은 한 말씀’들의 잔치, 자기계발서로 읽힐 소지가 다분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 견해에 서슴없이 한 표 던집니다. 푸코는 무슨 연유로 고대로 갔는가. 거기서 무엇을 보려고 했는가. 거기서 본 무엇으로 지금 여기를 어떻게 질문하고자 했는가. 그런 견지에서 저는 크세노폰의 회상을 따라가 보고자 했습니다.

먼저 혜원샘은 소크라테스의 ‘절제’에 초점을 맞추어 발제를 해오셨어요. 흔히 우리는 절제라고 하면 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go 혹은 stop 하는 것을 연상합니다. 내가 누리고 싶은 쾌락은 무한하지만 외부의 조건 때문에 참는다든지, 쾌락을 나만의 비밀스런 취향의 영역으로 환원시킨다든지, 그것은 나를 둘러싼 외부적 조건과 항상 대립하고 있다든지, 이것이 우리가 쾌락과 절제에 대해 떠올리는 일반적인 이미지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쾌락주의와 금욕주의는 늘 한 세트로 붙어다니죠. 하지만 성의 역사에서 푸코가 견지하고자 했던 테마는 쾌락과 욕망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돌아보게 합니다. 과연 쾌락을 추구하는 우리의 욕망은 무한한가? 욕망이 무한하다는 그 전제는 의심 없이 받아들여도 좋은 '진리'인가? 욕망 그 자체가 무한하다는 것이 '진리'라면 우리는 그 욕망에 대해 아예 손을 써 볼 수조차 없는 게 아닐까?  왜냐면 무한이란 영역에 유한한 실존이 덤벼든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니까요. 그렇다면 그 욕망이라는  것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질문하느냐에 떠라 문제가 달라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이렇게요. 욕망이라는 것에 대한 쾌락이나 욕망은 나만의 비밀스런 영역인가? 밥에 대한 욕망과 돈에 대한 욕망은 같은 종류의 욕망일까?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릅니다.

혜원샘은 그 문제에 대해 “크세노폰이 묘사하는 소크라테스 본인은 철저한 금욕주의자다. 다만 그의 금욕은 쾌락을 억제하는 것이 아닌 쾌락을 동반하는 절제의 모습으로 그려진다...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것은 쾌락의 억제가 아니라 오히려 쾌락의 극대화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절제의 쾌락’이다. 무절제는 절제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을 가로막는다. 우리가 가장 즐거울 때는 원하는 것을 제때에 얻었을 때다. 먹을 것, 마실 것, 수면은 배고프고 목마르고 졸릴 때 가장 즐거운 것이 된다. 그런데 무절제는 그 ‘때’를 제거한다...소크라테스는 가장 즐거운 ‘때’를 위한 쾌락의 활용을 주장”했다고 정리하며 그 ‘때’를 동양철학에서는 ‘時中’이라고 한다고 덧붙이셨습니다.

“멜레토스에게 고발당하여 재판받았을 때 다른 피고인들은 배심원들의 비위를 맞추고 아첨하고 법을 어기며 호소하는 것이 관행이라 보아 실제로 많은 피고인이 그런 방법으로 무죄방면되었지만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의 그런 불법적 관행을 전적으로 거부했다. 조금만 그런 수법을 썼어도 쉽게 무죄방면했을 텐데도 그는 법을 어기며 사느니 법을 지키며 죽기를 택했다. "(220P)

이 구절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문장으로 우리에게 각인된 바로 그 장면인데요. 군사독재시절에 소크라테스의 이 구절은 ‘군말 말고 어쨌던 법에 따라라’라는 무언의 협박처럼 통용됐던 면이 있죠. 제게 소크라테스는 앞 뒤 다 잘린 소문에 실려 온 괴팍한 궤변론자였고 고지식한 원칙주의자와 같은 인상으로 남아 있었어요.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가 단순히 도시국가의 법을 충실히 수호했다는 것을 전하려는 의도였을까, 어디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걸까, 방점을 찍어야 할 곳은 도시국가의 ‘법’이 아니라 그 법과 관계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 즉 ‘정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었다’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법’에 대해 토론하면서 건화샘은 우리가 ‘법’ 없이 살 수 있을까? 라면서 ‘법’을 단순히 근대국가의 ‘법’으로 한정시키는 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법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는 너무 빈곤합니다. 법없이 살 수 있을까, 라는 건화샘의 말을 저는 일단 '방법'이라는 의미와 연결시켰는데요. 엄청나게 확장시키면 모든 생명체의 저마다 살아가는 '법' 같은 것이 현실의 법과 연관지어지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거기에 미영샘은 로고스와 노모스의 관계를 덧부이셨는데요. (이게 맞나요? 지난번 아감벤의 호모 사케를 읽을 때 다뤘던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소크라테스에게 법이란 무엇이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리스 도시국가의 법이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으로 옳아서 소크라테스는 그 법에 복종하고자 했을까요? 법정에서 편법으로 무죄를 선고받은 다른 피고인들과 소크라테스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요? 푸코가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에서 읽어내고자 한 것이 단순히 도시국가는 지금처럼 범위가 작아서 자유민들의 합의에 따라 제정된 법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그 합의를 존중할 수 있었다는 정도일까요. 이런 식의 논의라면 우리도 잘게잘게 마을단위로 법을 만들면 되지 않을까, 이미 이런 발상은 지방자치 이런 걸로 구현되지 않았나요. 푸코의 진의는 이런 데 있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이 두리뭉실한 질문은 저마다에게 그 인간이라는 것이 어떻게 다가오느냐에 따라 절실할 수도 아니면 뜬구름 잡는 소리일 수도 있다고 여겨지네요. 나는 과연 죽는 순간 소크라테스처럼 의연할 수 있을까. 변론을 준비하지 않느냐는 제자 헤르모게네스의 말에 소크라테스는 여테껏 살아온 자신의 삶이 변론인데 뭘 준비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처럼 담담하게 즐겁게...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다른 피고인들’처럼 배심원들을 설득할 능력이 없어 ‘사형을 당한’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이해하고(이때 소크라테스의 ‘신’이란, 나중에 정신화된 기독교의 그 ‘신’이 아님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꺼이 자신이 죽음의 ‘때’에 복종한 것이라고요.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가장 고매하고 적절한 죽음의 때를 갈망하고 그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 순간”을 알고(지혜) “죽을 때마저 자신의 절제를 관철한”(연마) 것이라는 거죠.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 아닌 그가 끝까지 실험을 그만두지 않았던 즐거운 삶의 일부”였다는 혜원샘의 발제문의 구절이 인상 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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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0 23:12
    역시 난희샘 다운 울림이 있는 후기네요!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는 어떻게 기쁘게 (둘이 사실은 동일한 것의 다른 표현이라는 의미에서) 금욕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가 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나로 통일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로부터는 이런 걸 못 느꼈거든요. 샘도 후기에 써 주셨듯 그 통일된 삶과 아무런 대립을 이루지 않는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예수(물론 이건 사제들이 만들어낸 이미지지만)와 자신의 고귀함과 지혜와 자유를 위해 죽음을 택한 소크라테스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을 듯해요. 니체식으로 말하면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의 상징 같기도 하고. 소크라테스에게 법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도 흥미롭습니다. 아마 소크라테스에게 법은, 관습과 규칙과 약속 같은 것들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다기보다는 인간을 더 큰 완전성으로 이끌어주는 수단 같은 게 아니엇을까요. 저는 스피노자가 법을 이해하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느꼈는데, 공부가 부족하여 잘 설명하진 못하겠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