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2/ 6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7-05 11:26
조회
63
“그런 그가 어떻게 공소장에 쓰인 죄를 지었겠는가? 그는 공소장에 쓰인 대로 무신론자가 아니라 분명 누구보다도 신심이 깊었으며, 고발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젊은이를 타락시키기는커녕 분명 제자들이 나쁜 욕구를 가지면 나쁜 욕구를 버리고 가장 고매하고 가장 숭고한 미덕을 원하게 만들어 나라와 가정이 잘 관리되게 했다. 그의 이런 행위야말로 국가로부터 크게 존중받아 마땅하지 않은가?”(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회상록》, 숲, 40쪽)

소크라테스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의 추종자들이나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플라톤은 그로 인해 민주정을 환멸하고, 철학자가 통치를 하거나 통치자가 진지하게 철학에 종사하지 않으면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을 것이라고 결론내리게 됩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에게 씌워진 ‘신성모독’과 ‘젊은이들을 선동하여 타락시켰다’는 누명을 벗겨내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현실은 소크라테스에게 제기된 혐의와 정반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신들을 부정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없었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았으나 사실 소크라테스가 한 일은 젊은이들을 보다 고귀한 존재로 만든 것밖에는 없다는 것.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를 위한 변론 중에서, 저는 신성모독 혐의에 관한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어떤 태도가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렸을지 헤아립니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새나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자기들을 말리거나 자기들에게 권하더라고 말하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는대로”(15쪽)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크라테스가 무신론자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니라, 그가 신들에게 속하는 것과 인간에게 속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떤 일의 ‘결과’는 인간에게 달려있지 않습니다. “농사를 잘 지은 사람은 그것을 수확할 사람을 알 수 없고, 집을 잘 지은 사람은 거기서 살 사람을 알 수 없으며, 유능한 장군은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지 알 수 없고, 유능한 정치가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지 알 수”(16쪽)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일들을 운에 맡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들이 지식을 통해 인간 스스로 결정하도록 해준 일”(16쪽)들도 분명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신앙심은 신들로부터 의지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자신의 의도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겸허한 태도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하면 먼저 플라톤을 떠올립니다. ‘산파술’이라는 독특한 대화법을 사용하는 소크라테스, 진리를 사랑하고 올바름을 옹호하는 소크라테스, 이데아에 대한 인식을 추구하는 소크라테스. 그런데 크세노폰이 전하는 소크라테스는 비슷한 듯 다릅니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크세노폰의 존경심이 담뿍 담긴 묘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소크라테스의 사상보다는 그의 행위와 그의 신체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크세노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자제력의 화신입니다. 그는 “따르기만 하면 별 일이 없는 한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 수 있고 비용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는 생활양식에 익숙해지도록 자신의 몸과 혼을 단련”(42쪽)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몸을 소홀히 한 적이 없거니와 몸을 돌보지 않는 자를 칭찬하지도”(22쪽) 않았습니다. 이처럼 크세노폰에게서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신체나 욕망과 맺는 관계가 핵심적인 내용을 이룹니다. 알키비아데스와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를 멀리하게 된 것도, 결국은 소크라테스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크세노폰의 말입니다. “만약 신이 그들에게 소크라테스의 생활방식과 죽음 가운데 어느 한쪽을 택하라고 말했다면 나는 그들이 차라리 죽음을 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25쪽)

소피스트 안티폰과의 논쟁도 흥미로웠습니다. 안티폰은 우연히 마주친 소크라테스에게 다짜고짜 공격을 퍼붓습니다. 인간이란 자고로 행복하게 살아야 하며 철학 또한 행복을 위한 것일진대, 어찌하여 소크라테스 당신은 제자들과 스스로를 노예수준의 생활과 불행으로 몰아가는 겁니까?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행복은 사치와 동일시될 수 없다며,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적인 것이고 되도록 적게 필요로 하는 것이 신적인 것에 가장 가까우며, 신적인 것이 최선이고 신적인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차선”(58쪽)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행복은 더 적은 필요를 갖는 것, 그리하여 외부적 조건이나 다른 이들의 행동에 좌지우지 되지 않을 수 있는 굳건함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 최상의 관계를 맺는 것으로서의 행복과 자유. 욕망의 실현을 행복 및 자유와 동일시하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낯선 관점입니다.

이 논쟁을 재현하는 크세노폰의 구절들에서 흥미로운 것은, 안티폰 대 소크라테스의 구도가 ‘상대주의자 VS 본질주의자’가 아니라 ‘몸을 단련하지 않는 자 VS 단련하는 자’로 짜여져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저는 나름대로 ‘뇌피셜’을 가동해보았습니다. 혹시 크세노폰은 사상의 차이보다도 삶의 양식의 차이에서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들과 구분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고요. 어쨌든 우리로서는 소크라테스의 진짜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크세노폰이 전달해주는 소크라테스의 사유와 삶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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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06 11:22
    “농사를 잘 지은 사람은 그것을 수확할 사람을 알 수 없고, 집을 잘 지은 사람은 거기서 살 사람을 알 수 없으며, 유능한 장군은 군대를 통솔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지 알 수 없고, 유능한 정치가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자기에게 유익할지 알 수”(16쪽) 없다고 말하는데, 왜 수확할 사람을 알아야하고, 살 사람을 알아야하고 자기에게 유익한지를 알아야할까요? 라고하는 어리석은 질문이 생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