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2 : 7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7-12 16:25
조회
60
지난 시간에는 크세노폰으로부터 참견쟁이 소크라테스의 면면들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정말이지 앵앵거리며 동물들을 귀찮게 하는 등에 같은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3권은 ‘고매한 것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소크라테스가 도움을 준 일화들을 나열합니다. 그는 새로 선출된 기병대장에게 어떻게 기병대를 잘 다스리고 더 훌륭하게 만들 수 있을지 조언하고, 헛된 꿈에 부풀어 통치자가 되겠다는 글라우콘(플라톤의 형)을 붙들어 앉히고, 능력도 있고 인망도 있으면서도 정치를 하려 하지 않는 카르미데스를 설득합니다.

어째서 본인이 직접 정치에 종사하지 않고 왜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는지, 소크라테스를 고깝게 보았던 사람들의 입장도 살짝 이해가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다른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미덕을 발현하게 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실천’이었겠죠. 소크라테스는 온갖 사람들에게 갖가지 조언들을 했지만, 거기에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존재하는 듯합니다.

소크라테스가 줄곧 강조하는 것은 무언가를 제대로 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키타라 연주법을 배운 사람은 키타라를 연주하지 않아도 키타라 연주자이고, 의술을 배운 사람은 개업하지 않아도 의사인 것처럼, 통치의 기예를 배워서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도 그에게 투표하지 않는다고 해도 앞으로 영원히 장군이며 통치자일 것이다. 그에 비해 무지한 자는 만장일치로 선출된다 해도 장군도 아니고 의사도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소피스트의 교육관에 대한 비판을 함축합니다. 왜냐하면 소피스트들은 누구든 돈을 내기만 하면 그로 하여금 통치자가 될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올바름이란 무엇인지를 배워서 익히는 것과 무관하게 논쟁에서 승리하는 기술을 가르치고,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갖는 것과 무관하게 지휘관의 자리에 앉는 방법을 가르쳤던 것이죠. 이에 반하여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배움을 강조합니다. 자신의 자질을 인정받고 싶다면 훌륭한 자질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자질을 익히고 훈련해야”(162쪽)한다는 것.

그런데 소크라테스에게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는 실천보다 인식을 중시한 걸까요? 혹은 전문 지식을 습득한 자만이 올바르게 행할 수 있다는, 일종의 엘리트주의 같은 것을 주창한 걸까요? 크세노폰의 서술을 따라가다 보면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앎이 ‘전문지식’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을 꾸짖으며 그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행하려 한다는 점을 문제 삼는데, 이는 글라우콘이 전문지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가 도시국가의 전체적 흐름을 읽는 넓은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배움’은 지식의 습득을 의미하기보다는 자신의 관점과 존재 방식을 변형시키기 위한 훈련에 가까운 의미를 띱니다.

더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지혜와 절제를 동일시합니다. 그에 따르면 “아름답고 좋은 것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과 추한 것을 알고 피하는 사람은 지혜롭고도 절제 있다고”(162쪽) 불리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행하는데, 무엇이 좋은지를 알면서도 나쁜 것을 행하는 자는, 사실 그가 무엇이 좋은 것이며 올바른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음을 그의 행위로 증명하는 셈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서 진리의 문제는 곧장 도덕적 가치의 문제로 전환된다던 피에르 아도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인간은 참된 것을 알아야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지만, 그러한 앎은 도덕적인 삶을 통해 현현합니다.

“또한 아름답고 훌륭한 것을 배우는 즐거움과, 그것에 힘입어 사람이 자기 몸을 잘 조절하고 가정을 성공적으로 꾸려나가고 친구들과 국가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고 적군을 물리칠뿐더러 가장 큰 이익과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활동들에 매진하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런 활동들에서 비롯하는 즐거움은 자제력 있는 사람의 몫이고, 무절제한 자는 거기에 참여하지 못한다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가까운 쾌락을 추구하는 데 열중해 있기에 그런 활동들을 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누가 더 그런 활동들을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크세노폰, 《소크라테스의 회상록》, 숲, 233~234쪽)

이 부분에서 뜬금없이 뼈를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다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매번 가장 가까운 쾌락에 열중해 있는 자는 당연히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명하게도 그는 자신의 삶에서나 자신이 읽는 책에서나 자기 인식을 변형하고 확장할 계기들을 붙잡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좋은 것인지, 참된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 질문하지 않고 단지 착하게, 도덕적으로 사는 것으로는 불충분합니다. 그러니까, 실천의 변형과 결합하지 않은 인식의 전환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사유의 확장과 결합되지 않은 도덕적 실천은 삶의 변환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갑자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같은 궤변으로 빠지는 느낌이네요.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인식과 실천의 문제, 참된 인식의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엔 플라톤의 소크라테스를 만나서 이 문제를 더 심화해보도록 해요.

다음 시간엔 《소크라테스의 변명》(아카넷)을 끝까지 읽고 만납니다. 거리두기가 4단계로 격상된 관계로 세미나는 온라인으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