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비기너스 세미나

뉴비기너스 시즌2 6주차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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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1-07-12 18:52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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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는 <소크라테스의 회상록>의 3권과 4권을 읽고 토론했습니다. 회상록의 후반부는 소크라테스가 ‘고매함을 추구하는 자’에게 어떻게 질문하고 비전을 제시했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데, 정치가, 장군, 자산가, 애정 같이 아주 구체적인 역할을 예로 들면서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것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공통적으로 어떻게 자신과 타인을 잘 “통치”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함에서 타인을 잘 통치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실천’하고 익혀서 최종적으로 어떻게 훌륭함에 이를 것인가에 대해서 꼼꼼하게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질문은 어떻게 앎을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포괄적인 교과서 같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그리스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에게 삶의 양식과 분리된 ‘앎’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었던 까닭에 덕을 아는 자는 이미 그렇게 앎을 실천하고 있으므로 앎과 무지의 구분은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는 자의 구분과 동일할 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앎은 곧 실천이므로, 훌륭함을 아는 자는 훌륭함을 행하고 있는 자가 됩니다. 고매함을 아는 자는 이미 고매한 자가 아니라 어떤 것이 고매함인지를 스스로 찾아가고 그것을 실험하고 훈련하고 있는 자입니다. 이 시대에는 앎, 배움, 실천, 훈련, 수행, 절제는 거의 같은 의미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앎은 체화되어야 완성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그 자신은 대화 속에서 앎을 구현했던 것 같습니다. 대화 속에서 무지를 깨닫고 앎을 추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을 산파술이라고 했나보다 하고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지’와 ‘무지’에 대한 견해도 ‘통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이고, 자기통지의 무능력인 무절제는 무지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무지와 무절제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어서 동시에 더욱 더 무지하고 무절제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무절제한 것이며 동시에 무절제한 것은 지혜와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유는 훌륭한 것을 행하는 것이며, 훌륭한 것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상태가 복종이라고 보았습니다. 훌륭한 것을 행하는 것에는 그것을 수련하도록 자기통치, 자제력을 조련해야 합니다. 자기목적을 위한 적극적인 절제는 ‘자기에게 이로움을 잘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건화샘이 이 대목은 니체가 자기적절함을 추구하는 자는 성공과 실패에서 좌절하는 자와 구별된다고 한 부분과 연결된다고 소개해주셨어요. ‘실패에 절망하는 자는 자기 안에 상상의 주인에게 복종하는 자와 같다. 자기 적절함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오직 수집되는 실험의 결과치일 뿐이다’ 그런데 저에게는 이 ‘자기적절함’이 무척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러면 자기적절함을 아는 것은 오직 실험을 통해 찾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되잖아요. 모든 것을 실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절함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까요? 체험이 없는 적절함은 자기합리화나 자기만족으로 드러나기 쉽지 않을까요? 자기목적에 맞는 적절함을 결정하는 것일까요? 다 의문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가장 순도 높은 적절함을 찾는다는 의미가 아니며, 삶의 조건을 통찰하는 것과 분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의견에 끄덕거려졌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적절함을 아는 것을 통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자기통치를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면 소크라테스는 행복을 실천의 문제로 가져온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자기통치를 완성시키는 것 중 하나였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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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7-15 14:00
    정말로 소크라테스에게는 앎, 배움, 실천, 훈련, 수행, 절제가 영혼의 돌봄이라는 하나의 실천적 맥락 속에 통합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적절함의 문제는... 어려운 질문이네요. 이번에 읽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