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세미나

[청문회] 3주차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3-26 11:32
조회
79
이번 주에는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 세 편을 읽었습니다. 토론하다 보니 저희만의 《장자》 내편을 하나의 스토리로 관통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가령, 〈소요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으나 ‘꼬불꼬불한 마음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겼죠. 이를 풀기 위해 〈제물론〉에서 인식론적으로 모든 것을 해체함으로써 마음의 확장을 시도했는데요. 그러나 마음의 확장이란 어떻게 보면 ‘나’라는 의식을 장례 지르는 것과 같은 일이기도 하다는 것, ‘나’라는 존재를 뒤흔드는 충격을 감수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으로 마무리됐죠. 그러면서 ‘유한한 한 존재의 삶을 어떻게 긍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기고 〈양생주〉로 이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양생주〉, 〈인간세〉, 〈덕충부〉에서 장자가 어떤 사유의 변화를 겪는지 얘기했는데, 시간이 모자란 탓에 〈덕충부〉에 대한 얘기가 미흡했습니다. ^^;; 다음 시간에 〈대종사〉, 〈응제왕〉을 토론하면서 모자랐던 〈덕충부〉를 보충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는 《장자》 내편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그려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시간이 기대되네요. ㅎㅎ

 

〈양생주〉 토론은 주로 편명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진행됐습니다. 일단 〈양생주〉에서 생(生)은 ‘나’라는 개체만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양(養) 또한 그러한 ‘나’의 삶만을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흔히 양생을 ‘개체적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정도로 생각하게 되는데, 장자는 그런 의미로서의 양생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양생주〉에 나오는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면, 양생은 개체적 삶의 지속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가 생각하는 양생은 너무 협소한 의미에서 통용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예기치 못한 사건을 당할 수 있고, 언젠가 수명이 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유한한 조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자는 이러한 조건 안에 있기 때문에 양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즉, 자신의 몸이 훼손되는 사건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이란 필연적 사건 앞에서도 양생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장자가 말하는 양생은 단순히 나만의 삶을 더 지속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가 벗어날 수 없는 생멸변화의 운명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당장 이러한 몸을 갖고 살아가지만, 〈제물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언제든 다른 개체로 변화하는 리듬 속에서 특정한 몸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몸의 해체는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몸의 합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장자가 말하는 양생이란 한 개체가 생멸변화를 겪으며 다른 개체로 변화하는 리듬에 부합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 내 몸에 무엇을 하는 것으로서의 ‘양’이 아니라 생멸변화의 리듬, 곧 자연을 긍정하는 것으로서의 ‘양’인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양’ 또한 몸에 일방적으로 가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으로서의 자신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아직 잘 정리되지 않는 지점은, 이러한 양생은 주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장자는 양생할 때 양친(養親), 부모 혹은 가까운 사람들도 ‘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포정해우(庖丁解牛) 스토리를 보면, 문혜군은 포정의 양생으로부터 양생의 도(道)를 배웁니다. 여기서도 포정의 양생이 문혜군이 양생하도록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양’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측면이 있는데, 아직 느낌만 있네요. ‘양’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니 ‘생’ 또한 집단적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형이상학적 차원으로서의 양생과 형이학적 차원으로서의 양생을 동시에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 잘 정리되지 않네요. 일단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호영향을 주고받아서 자연으로서의 생을 긍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남기기 때문에 〈인간세〉로 이어진다는 것으로 토론을 마무리했습니다.

〈인간세〉에서 핵심표어는 ‘날개 없이 날기, 지(知) 없이 알기’입니다. 〈인간세〉를 보면 진퇴양난의 상황으로서의 정치가 그려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자가 내놓은 해답은 얼핏 상황논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해도 어렵고, 저렇게 해도 어렵다면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그리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해라. 이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장자가 진정 말하고자 했던 것은 ‘감당해라’인 것 같습니다. 사회적 쓸모를 좇아서 부, 명예, 권력을 쟁취했다면, 부, 명예, 권력으로 인해 닥치는 어려움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따라서 장자는 〈인간세〉에서 정치의 어려움을 얘기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쓸모를 좇았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에 대해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를 얘기하면서 심재(心齋)를 강조한다든가 뒤에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 것도 쓸모를 좇으면 쓸모로 인해 화 또한 입게 된다는 역설을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장자 시대에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지식인들에게 큰 문제였기 때문에 정치가 비중 있게 다뤄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크게 보면, 장자에게는 쓸모를 추구하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인간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장자가 세속으로부터 도피한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도 있었는데요. ‘날개 없이 날기, 지(知) 없이 알기’ 구절 같은 것들이 세속에 살면서도 세속적 가치에 매몰되지 않는 지점들이라 생각됐습니다. 이것이 장자의 반정치가 보여주는 정치적인 지점인 것 같은데요. 장자식의 정치, ‘무용지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까?’라는 궁금증이 〈덕충부〉에서 나타난다는 얘기로 토론을 마무리했습니다.

자의적으로 읽는다는 생각도 없지 않지만, 저희 나름대로 장자를 재밌게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싶은데요. 다음 주면 어느새 《장자》 내편을 다 읽습니다. 간략하게 각자 장자에 대한 인상을 얘기해보는 것도 좋겠네요. 쌤들 덕에 장자가 새롭게 읽혀서 어떤 인상이실지 기대됩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만나요~
전체 2

  • 2021-03-26 20:56
    맥락을 놓치지 않는 세미나 정리가 눈에 확들어옵니다. ^^ 그런데 인간세의 ‘날개 없이 날기’ 에서는 유한한 인생을 가진 인간이 무궁한 지식을 추구함이난해하듯,, 날개가 없이 날기를 추구함도 도달하기 어려운 지점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담 시간에 다시 한번 얘기해보았으면 합니다.^^!

    • 2021-03-26 21:49
      그게 저희의 풀리지 않는 토론거리 중 하나였죠. 이와 더불어, 과연 붕새는 소요하는 존재인가, 아닌지도 ㅋㅋ 아마 이건 목표를 갖는 것이 어떤 지점에서 우리를 구속하는지를 얘기하면 좀 풀리지 않을까 하는데요. 어쨌든 문제지점은 계속 쌓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