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 세미나

[청문회] 4주차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4-02 13:49
조회
62
어느새 장자 내편을 다 읽었습니다! 3주만에 읽어서 좀 세세한 부분들을 건너뛴 감이 없지는 않지만, 다른 텍스트들을 읽으면서 장자를 환기할 수 있을 거예요!

공지하겠습니다. 다음 주에는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아리엘 키루의 대담집인 《고용은 끝났다, 일이여 오라!》를 읽어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장자를 읽을 때보다는 좀 더 문제의 포커스를 분명하게 해야 하니까, 각자 메모해서 [세미나] 탭의 [청년 세미나] -> [청년 세미나 숙제방]에 월요일 밤 10시까지 올려 주세요. 그리고 저희는 장자를 가지고 이야기를 할 거니까, 꼭 장자를 염두에 두고 읽어주세요!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_^

이번에는 〈대종사(大宗師)〉와 〈응제왕(應帝王)〉을 읽었습니다. 해석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대종사〉를 “위대한 도(道)를 스승으로 삼는다”라고 읽습니다. 여기서 ‘도’는 생성소멸하는 세상의 리듬 자체입니다. 그러한 리듬 자체를 스승으로 삼는다는 것은 나타난 모든 것으로부터 겸손하겠다는 것, 자신이 살아가는 지평을 배움의 장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그야말로 무한한 긍정의 태도가 보여서, 〈대종사〉를 읽으면서 감동받지 않을 수 없었네요.

〈대종사〉에서 저희가 집중한 에피소드는 변화를 긍정하는 자여의 이야기 부분이었습니다. 장자는 개체인 ‘나’의 해체조차 긍정할 수 있어야 ‘도’를 스승으로 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토론에서 끝내 해결되지 않은 지점은, 이렇게 ‘나’가 해체되더라도 그러한 해체를 긍정하는 ‘나’ 비슷한 무엇은 있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었습니다.
“아! 저 조물자는 또 나를 이처럼 구부러지게 하려는구나. (…) 차츰 진행하여 내 왼팔을 변화시켜 닭이 되게 한다면 나는 그것을 따라 새벽을 알릴 것을 구할 것이고, 차츰 진행하여 내 오른팔을 변화시켜 탄환이 되게 한다면 나는 그것을 따라 새 구이를 구할 것이고, 차츰 진행하여 내 꽁무니를 변화시켜 수레가 되게 하고 정신을 말이 되게 한다면 나는 그것을 따라 탈 것이니, 어찌 다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또 생명을 얻는 것은 때를 만나는 것이고, 잃는 것은 운명을 따르는 것이다. 때를 편안히 여기고 운명을 편안히 따른다면 슬픔도 즐거움도 끼어들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옛날의 이른바 ‘속박에서 풀려남(懸解)’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물(物)이 묶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물(物)이 하늘(天)을 이기지 못함이 오래되었으니, 내가 또 어찌 싫어하겠는가?”

여기서 자여는 왼팔, 오른팔, 하체 심지어 정신까지 변합니다. 몸이 변하더라도 그것을 긍정하겠다는 것은 어찌어찌 이해해도, 정신이 변하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은 생소했습니다. 우리는 자주 몸이 변하더라도 정신만큼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장자는 몸이 천지 자연의 리듬에서 벗어나지 않듯이, 정신 또한 동일한 질서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즉, 정신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변화된 것을 활용하는 또 다른 ‘나’가 있는 것 같다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닭이 된 왼팔, 탄환이 된 오른팔, 수레와 말이 된 하체와 정신을 ‘누가’ 쓰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였죠. 여기서 ‘나’가 그러한 변화를 겪어도 여전히 ‘나’라고 할 만한 주체적 인격을 얘기할 수 있는지 그게 아니라면 무엇인지 분분했습니다. 일단 〈대종사〉 전체의 맥락을 따라가면, 모든 것을 하나(一)로 인식하는 진인(眞人)이 등장합니다. ‘진인’은 〈소요유〉의 지인(至人)처럼 ‘나(我)’라는 분별적 의식을 해체한 인물입니다. 거칠게 말하면, 천지의 차원으로 자신을 확장할 수 있는 인물이 ‘진인’이자 ‘지인’입니다. ‘진인’과 ‘지인’에게 의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은 우리가 세계를 분별하고 고집하는 의식과 다를 것입니다.

정리가 잘 되지는 않네요. 하지만 죽음이란 사건을 긍정하는 문제가 〈양생주〉에서부터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중에 ‘죽음’을 키워드로 얘기하는 학기도 있으니까, 계속 읽어가자구요!

〈응제왕(應帝王)〉은 ‘제왕에 걸맞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장자는 제왕의 도(道)를 남들이 알지 못하는 신묘한 도술 같은 것으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도술을 익힌 자나 그것에 관심을 가지는 자는 모두 급이 좀 떨어지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사생존망(死生存亡), 화복수요(禍福壽夭)를 날짜까지 정확히 맞추는 계함과 그것에 혹한 열자가 거기에 속합니다. 아마도 이는 당대에 부국강병이나 양생의 특별한 비법이 따로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게 아닐까 한데요. 이러한 욕망은 지금 시대에도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효율적으로 돈 버는 비법, 건강 챙기는 비법 등등 온갖 비법들을 원하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사실 도(道)가 아닙니다. 장자는 ‘도’는 이미 세상에 드러나 있는데, 사람들은 드러나 있지 않은 특별한 것을 찾죠. 드러나 있는 사건들을 긍정할 수 있는 것, 나의 삶을 내 뜻대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는 것이 제왕의 자질이라는 맥락에서 〈대종사〉와 연결되네요.

〈응제왕〉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숙과 홀의 보답에 의해 혼돈이 죽는 비극적인 이야기인데요. 〈소요유〉에서 곤이 붕이 되어 날아가는 에피소드와 매우 대비되었습니다. 혼돈에게 대접받은 숙과 홀은 자신들처럼 일곱 구멍을 뚫어 감각을 가지게 해줬습니다. 그런데 사실 혼돈은 숙과 홀이 무엇을 해주기 전에도 충분히 잘 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구멍이 뚫리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있다는 것 혹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감각할 수 있는 잠재력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혼돈의 죽음은 이러한 잠재력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덧붙여, 문명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적에 집착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 자신의 삶도 지속될 수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미 잘 살고 있던 혼돈에게 숙과 홀의 보답은 ‘더’ 잘 살 수 있는 도움이 아니라 기존의 삶마저 파괴시키는 폭력이었습니다. 장자는 부, 명예, 권력 등 더함으로써 삶을 도모하고, 그것이 더 잘사는 길이라고 믿는 것이 그 자체로 폭력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의 정치 또한 ‘더하는’ 식으로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물질적 보충이 필요하지만, 더하는 것만을 정치의 목표로 삼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마음을 비우는 식으로 정치를 도모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들과 토론하면서 장자를 재밌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재밌게 보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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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4-03 19:09
    함께 장자를 읽다보니, 물이 묶어 놓았다는것이 형체를 부여 받음이라고 하는 나름의 해석지점이 생겨났습니다^^!
    깊이 있는 장자의 해석이 장자세미나와 세미나후기와 규장쌤의 세미나정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듯 합니다.^^!
    담 시간이 또 기다려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