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12월 8일 후기 및 15일 세미나 공지

작성자
현옥
작성일
2016-12-12 11:15
조회
454
12월 8일 후기 및 15일 세미나 공지

 

에티카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헷갈리는 부분이 역시 신체와 정신의 관계를 얘기하는 2부가 아닐까 싶어요. 각자 자신의 몸과 마음과 관련해서 생각을 하게 마련인지라...

중요한 질문은 역시 ‘내가 지각하거나 인식했다고 여겨지는 것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가’ 하는 것일 텐데요, 이 질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자면 ‘내가 다른 물체와 접속하여 그 결과로 어떤 지각작용을 형성했을 때 그 인식의 내용물은 과연 다른 물체와 나 자신에 대한 정확한(진실이라고 할 만한) 사실을 포함하는 것일까’ 하는 점입니다. 한 마디로 스피노자의 대답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신체는 눈으로 보기에는 다른 물체와 확연하게 구분되는 하나의 개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존재의 방식을 살펴보면 다른 물체에 의해 일정한 방식으로 운동을 전달받지 않고서는 작용할 수 없는(먹지 않고는 살 수 없듯이) 유한한 양태입니다. 게다가 우리의 신체 구조 또한 단일한 원칙하에 여러 구조가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는 방식이 아니라, 각기 본성이 다른 무수한 개체들이(간의 본성과 심장의 본성, 뼈의 본성과 피의 본성이 다르듯이) 단지 운동과 정지의 비율을 같이 하면서 공존하고 있는 복합신체의 형상입니다. 이리 보거나 저리 보거나 간에 인간은 무수한 관계망 속에서만, 오로지 관계의 덩어리인 채로만 실존할 수 있으며(다시 말해 나를 존재하게 하는 관계들을 빼놓고 나를 얘기할 수 없다는 것), 그 관계의 결과로 매순간 드러나는 하나의 모드가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의 정신은 자신의 신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에 대한 타당한 인식을 가질 수 없으며(오늘 내 간이 안녕한지, 컨디션이 왜 좋지 않은지를 알 수 없듯이), 따라서 그 신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시각각 내 신체에서 일어난 변화와 그 변화의 원인 및 과정에 대한 관념’을 내 정신이라고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제 정신을 갖고 살 수가 없다는 얘기기도 합니다. 내 신체도 알 수 없는 마당에 남의 신체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내 시각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그 판단을 확신하면서 살아왔다는 게 새삼 거시기하죠~^^)

그렇다면 이런 총체적 난국 속에서 대체 우리는 어떻게 나와 타자를 이해해야 하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일까요? 스피노자는 그 유일한 방식으로 ‘신체변용의 관념’을 얘기합니다. 남의 신체와 내 신체가 섞여서 일어나는 내 신체의 변용- 사과를 먹었을 때 내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 누군가와 접속했을 때 일어나는 변용-에 대해서 내가 형성하는 관념이 유일하게 그 단서가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이때에도 내가 내 신체를 모르고 타자의 신체 또한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가 아닌가요? 물론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때 우리가 참조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내 신체 자체나 타자의 신체가 아니라, ‘내 변용의 질서와 과정’이라는 겁니다. 외부의 물체에 대해 내 신체가 반응하는 방식 내지는 그 반응에 대해 내가 어떤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가 바로 나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겠지요. 동일한 사건을 겪으면서도 사람마다 겪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기도 하지만, 이때 ‘아 이렇게 다 다르구나’ 라고 인정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째서 다른가’를 이해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나는 지금 왜 이런 방식으로 변용하고 이런 관념을 형성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이런 방식으로 변용하고 관념을 형성하는 데는 정확한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게 스피노자가 神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얘기입니다. 神이 만물을 생산하는 질서와 연관의 법칙은 만물의 결합에 관계하며, 따라서 다른 물체와 결합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의 본성을 구성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이 결정한 대로, 정확한 결합법칙에 의거하여 외부물체와 관계를 맺으며 반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때, 몸은 경험상 그렇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겠는데, 그래도 정신은 내가 구성하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이 형성하는 모든 관념은 자신의 신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신체가 변용하는 질서 그대로 정신의 질서도 형성됩니다. 오죽하면 스피노자는 ‘정신적 자동기계’(지성개선론)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힘에 의해서 완전히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또 하나는 정확한 질서와 연관의 법칙(신체의 질서와 동일한)에 의해 관념이 생산된다는 의미에서 내 정신은 자동기계입니다. 이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 그건 두말 할 것도 없이 神이겠지요.

따라서 우리는 神에 대한 인식을 갖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신체변용의 관념 속에서 이 관념을 산출한 내재적 원인으로서의 神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원성의 관점에서의 사유이며 적합한 관념이기도 합니다. 어찌 보면 이게 스피노자 사유의 전부이기도 한 것 같은데, 우리가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이해하게 되기까지에는 긴 수련기간이 필요한 듯해요! 책읽고 글쓰는 과정자체가 바로 그런 수련의 시간들이 되겠지요!

 

다음 시간엔 네들러 7장(정념)과 에티카 3부 함께 읽습니다. 3부도 만만치 않습니다요!^^ 2부를 잘 참조하시면서 찬찬히 공부하셔요! 발제는 하동쌤, 간식은 우진쌤 맞나요?

한 주일이 너~무 빨리 지나가네요.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니, 저는 죽기 전에 제대로 좀 살아보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싶어요!^^ 담주에 즐겁게 뵈어요!

 

ՊiE
전체 2

  • 2016-12-12 17:06
    지난 주 세미나는 네들러의 책 6장 인식과 의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죠.
    에티카 2부 ‘정신의 기원과 본성에 대하여’와 부분적으로 상응하는 장입니다.
    개인적으로 금번 세미나에서 주의를 놓치지 않으려는 점은 신
    과 인간을 간극 없이 산출되는 인과에 따라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그 핵심이 사유의 인과질서죠.

    신도 사유하고 인간도 사유합니다.
    그런데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량에 의해 사유하지만
    인간은 인간 정신은 신체에 변용에 대한 정신의 능동적이어야 하는 – 산출할 수밖에 없는 관념 작용 -개념을 통해 사유합니다.
    스피노자는 이점을 무척이나 강조합니다.
    제 추측으로는 스피노자가 관념작용을 외부로부터 주어진 이미지 작용과 분별하지 못하기 십상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관념작용에 상응하는 연장 속성에서의 사물의 이미지를 관념의 대상이거나 관념의 원인이라고 손쉽게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오는 혼란을 극복하는 게 과제입니다. 이게 수련일지도 모르겠네요.
    신은 무한히 많은 속성으로 무한히 많은 영원한 본질들을 표현하는데 그 속성들은 분명 지 멋대로가 아니라 속성들마다 상응하는 방식으로만 표현합니다.
    연장과 사유 속성만을 인식하는 우리들로서는 이런 상응관계에 눈이 먼저 돌아가고 속성에 따른 인과의 질서에는 무지하기 쉽습니다.
    수동적인 지각의 순서 상 당연합니다.
    그래서 정신의 능동적인 작용으로의 관념이라고 애써 정의에 해명까지 붙여놓은 듯합니다.
    즉, 관념은 도판 위에 움직이지 않은 사물같은 이미지가 결코 아니며 그 자체로 긍정과 부정을 포함하는 활동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합니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납득이 되지 않아요. 납드기~)
    저는 네들러가 이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관념이 가지는 ‘지향성’을 끌어왔다고 봅니다.
    그러나 .....
    저는 관념이 포함하는 ‘긍정과 부정’을 관념의 능동적인 산출이라고 이해합니다.
    관념이 관념을 산출하는 것이지 관념에 상응하는 연장의 사물이 관념을 산출하지 않습니다.
    어떤 관념의 원인은 그 관념을 낳게 한 어떤 관념입니다.

    신 안에 모든 관념은 참되고 적합합니다.
    신은 고민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도 신의 무한지성의 일부입니다.
    위의 ‘일부’라는 표현을 양적인 개념으로 전체의 분할된 부분, 그래서 전체를 절대 알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안에는 분명 내재된 필연적 인과질서 안에서의 관념을 산출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 능력을 통해 산출되는 관념이 ‘적합한’ 관념이라고 이해합니다.
    복습을 위해...
    “적합한 관념이란 대상과의 관계없이 고찰되는 한에서 참된 관념의 모든 특성 또는 내(생)적 특징을 지닌 것으로 이해한다.”(E2, D4)
    그리고 이에 대한 보충으로 한 편지에서 “그것의 작용인을 표현해야 한다는 규칙에 따르는 관념”이 적합한 관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에게서 관념과 그에 상응하는 사물의 일치여부는 별로 중요치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너무도 자명한 것이니까요.
    따라서 정리7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사물)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라는 말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라 따로 말할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정리에서 강조한 부분은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도 사물들처럼 “원인의 질서와 연관”에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적합한 관념은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반원의 회전이라는 구의 정의에 대한 예를 보면 고개가 끄덕여지다가도 이런 추상적인 예만으로는 쉽게 납득하지 못합니다.
    지난 제 과제에서 우리의 정신을 ‘복합 관념체’로 이해하는 것도 복합체인 ‘몸’에 상응하는, 유효한 원인을 품고 있는 적합한 관념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해로부터 따라나오는 관념들 중 하나로 지금 이 순간 인식되는 고착된 ‘나’란 있을 수 없다는 당연한 이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명한 생각을 갖는 게 에둘러가게 되면 정말 먼 길일 수도 있죠.

    적합한 관념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스피노자는 ‘공통 통념’을 제시한 것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이를 위해 ‘양태’와 ‘독특한 실재’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지난 과제의 형태에 대한 편지글도 다시 옮겨봅니다.
    ‘공통’을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는 실체의 변용들, 곧 다른 것 안에 있으며 또한 이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을 양태로 이해한다(E1, D5).”
    “나는 독특한 실재를, 유한하고 규정된 실존을 갖는 것으로 이해한다. 만약 다수의 개체들이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여 그 개체 모두가 함께 하나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된다면, 나는 이것들 모두를 바로 그런 한에서 하나의 독특한 실재로 간주한다(E2,D7).”
    “그러므로 어떤 형태[경계]를 지각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이를 통해 그가 제한된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제한되는지를 인식한다는 것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규정은 그것인 바로서의 그 사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사물이 어디서부터 아닌지를 지시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형태는 한정(limitation)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모든 한정은 부정이기 때문에 형태는, 제가 말한 바와 같이, 부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편지 50)
    “인간 신체와, 인간 신체가 보통 그것들에 의해 변용되는 어떤 물체들에 공통적이고, 또 그것들[인간 신체와 어떤 물체들]에게 고유한 것은 그것들 각각의 부분과 전체 안에 균등하게 존재하며, 이것에 대한 관념 역시 정신 안에서 적합하게 존재할 것이다(E2, P39).”

    만약 양태를, 독특한 실재를 어떤 형태[경계]를 가진 것으로만이 아니라 하나의 작용에 협력하는 모두를 독특한 실재(사물)로 간주한다면 이로부터 ‘공통의 관계’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문득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구체적인 관계에서 오는 공통통념을 사유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생각은 다음 후기나 과제로 이어갈게요.
    어느 학인의 고민처럼 이리저리 휘둘리며 살아야 하니 후기조차 매조지지 못하네요.
    (그래서 능동과 수동도 통상의 이해와는 다른 인과가 숨어있다는 점을 보기도 하지만요.)

    • 2016-12-12 22:42
      잉? 이 무슨 아까운 아까운 일이? 쌤 여기에 깨알같이 말고요, 제대로 올려주시어요! 저처럼 '12월 8일 스피노자 세미나 후기'라고 제목 쓰시고요! 제발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