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12월1일 수업 후기

작성자
정은하
작성일
2016-12-15 15:24
조회
294
2주전 수업에 관한 늦은 후기 올립니다. 죄송합니다.

그날 「지성교정론」과 「에티카를 읽다」5장 인간을 읽고 토론하는 시간 이였습니다.

그때 사실 그리 중요한 주제는 아닌 것 같은데, 표상적 본질과 형상적 본질이 같은 것이냐 아니냐에 관해 오래 토론했습니다. ^^;

제가 쓴 지성교정론의 발제 내용 중, ‘사유의 형상적 본질인, 표상적 본질’ 이라는 표현 때문에, 동일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나왔었는데요. 사실 저는 그 용어가 사용되는 철학적 맥락은 잘 모르고, ‘사유든, 연장이든 그 자체의 실존을 지니고 있고, 그것에 기인해 그 고유의 물리적 법칙과 운동성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사용했었습니다. 단지 관념의 물질성을 ’표상적 본질‘, 연장의 물질성을 ’형상적 본질‘이라고 지칭한다는 차이 외에는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고요. 그 때 토론에서는 확실하게 결론이 난 것이 아니지만, 둘 다 ’대상적 실제‘를 갖는다는 의미로, 즉 ’그 자체의 실존역량‘을 지니고 그 자체안에 ’신의 질서‘를 지니고, ’다른 양태의 대상 또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의 맥락으로 형상적, 또는 표상적 본질이라는 말이 사용된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암튼 이 용어 자체가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념 이라는 것이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것 같습니다. 연장과 같이 공간을 차지하고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관념 또는 정신의 사유라는 것이 하나의 상상 또는 허구와 같은 것이라 생각되고, 우리의 의지로 자유롭게 어떤 것을 긍정 하든지 부정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 될 수 있는데, 그 자체로 실존하고, 다른 관념을 스스로 생산하고,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 운동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연장과 바로 동일한 운동법칙에 따라 전개 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바로 여기서 그 날의 또 다른 주제 ‘정신과 신체의 평행론’과 연결됩니다. 네들러의 책에서는, 동일한 어떤 것이 정신과 연장의 측면에서 동시에 두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처럼 쓰여 있지요. 그 예가 우리가 손을 바늘에 찔리면, 손이 찔려서 피가 나오는 신체의 움직임이 있고, 이것에 상응하는 ‘아픔’이라는 정신적 관념이 동시에 떠오르고... 즉 연장적 사건에 대응하는 사유의 관념이 1대 1로 하나씩 존재하는것과 같이 들리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현옥샘과 만두샘이 잘못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라는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평행론’이라는 이름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많고, 이것은 이후 스피노자의 해석자들이 임의로 붙인 이름일 뿐, 스피노자가 이야기 하는 속성간의 ‘동일한 법칙’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평행론은 속성간의 병렬적 관계 즉 하나의 연장에 대응하는 하나의 관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연장 각각 속성별 그 안에 양태가 서로 관계되하고 생성하는 법칙이 동일하고, 그 연쇄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라는 의미를 담고있습니다. 바로 사유든 연장이는 신의 질서인 필연성에 의해서만 ‘상호관계성’을 맺는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적합한 관념이란 바로 이 ‘관계에 관한 관념’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내 신체의 상태라는 것은 외부의 사물과, 그 사물과의 결합으로 생긴 결과인데, 이 ‘결합의 법칙과 원리’가 바로 신적 질서라는 이야기이죠. 그러니 내 신체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내재적 원인인 ‘신’을 통하지 않고, 단순히 타동적 원인인 외부 사물만 탓하는 것만으로는 계속 내 신체의 상태와 그것에 관한 인식의 간극만 커진다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내 신체는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을 마주침으로 해서 끊임없이 변용되는데, 이 변용의 관념에 관한 해석을 외부 사물에만 두면 부적합한 인식되고, 우리는 계속하여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인식의 수준에 머물 수 밖에 없다라는 사실은 알겠는데, 그럼 이 적합한 관념인 결합의 원리를 어떻게 파악 가능한 것인지는 아직 잘 이해가 되지는 않네요. 내 관념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과, 그것을 계속해서 의심해 보는 것 만으로도 큰 발전일 수 는 있지만, 그것이 스피노자가 이야기 하는 ‘지복’으로서의 앎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좀더 공부하면서 이부분이 좀 더 명확히 이해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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