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6.5 니나노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9-05-31 21:42
조회
73
190605 니나노 공지
然し、生きていると、疲れるね。かく言う私も、時に、無に帰そうと思う時が、あるですよ。戦いぬく、言うは易く、疲れるね。然し、度胸は、きめている。是が非でも、生きる時間を、生きぬくよ。そして、戦うよ。決して、負けぬ。負けぬとは、戦う、ということです。それ以外に、勝負など、ありやせぬ。戦っていれば、負けないのです。決して、勝てないのです。人間は、決して、勝ちません。たゞ、負けないのだ。
勝とうなんて、思っちゃ、いけない。勝てる筈が、ないじゃないか。誰に、何者に、勝つつもりなんだ。
그러나, 살아 있으면 피곤하지. 이렇게 말하는 나도 가끔 무無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끝까지 싸운다고 말하는 거야 쉽지만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작정했다. 살아있는 시간을 끝까지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싸운다. 결코 지지 않는다.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은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싸우고 있으면 결코 지지 않습니다.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은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다만 패배하지 않는 것이지.
승리하겠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는 게 좋다. 이길 리가 없지. 누구에게, 어떤 놈에게 이길 생각이란 말인가.

안고는 <타락론>에서 “살아남아라, 타락하라.” 라고 말합니다. 그는 일본도 무사도도 망한 자리에서 ‘인간은 타락한다’는 진실을 발견합니다. 주인을 위해 할복도 마다않는 무사도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이상과 허위에 기댄 거짓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그는 패전 후 일본에서 발견합니다. 일본과 천황폐하를 위해 언제든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고 호언하던 예순일곱 살의 장군들이 명예롭게 배를 가르기보단 줄지어 법정으로 끌려가기를 택했거든요. 무사도나 대일본제국은 결국 전쟁이라는 일시적인 상황이 만든 아름다운 환영에 불과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안고는 이점을 기꺼워합니다. 어떤 것에도 기대지 않고 얽매이지 않은 상태가 되어서야 인간은 자신이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이 반드시 조국에 충성하는 군인이나 일부종사 하는 연인으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니까요.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국민들이 방종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이기에 그렇게 타락하게 된 것이라고 안고는 강조합니다. 패전은 그 ‘인간’이 드러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죠. 안고는 여기서 인간은 더 타락해야 한다고, 그것이 인간을 구원할 가장 “편리한 첩경”이라고 단정합니다.
<불량소년과 그리스도>에서도 안고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이긴다’ 라든가 ‘언제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같은, 언제든 물거품처럼 사라질 아름다움에 종사하는 것은 인간의 진정어린 의무가 아니라고요. 안고가 보기에 인간이 승부를 걸어야 하는 건 ‘어떻게 멋지게 이기느냐/어떻게 아름답게 패배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끝까지 싸울 것인가’ 뿐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세상 끝난 것 같은 일본에서 안고는 오히려 ‘타락하는 인간’, ‘어떻게든 살아남는 인간’이라는 진실을 본 겁니다.
時間というものを、無限と見ては、いけないのである。そんな大ゲサな、子供の夢みたいなことを、本気に考えてはいけない。時間というものは、自分が生れてから、死ぬまでの間です。
大ゲサすぎたのだ。限度。学問とは、限度の発見にあるのだよ。大ゲサなのは、子供の夢想で、学問じゃないのです。
原子バクダンを発見するのは、学問じゃないのです。子供の遊びです。これをコントロールし、適度に利用し、戦争などせず、平和な秩序を考え、そういう限度を発見するのが、学問なんです。
自殺は、学問じゃないよ。子供の遊びです。はじめから、まず、限度を知っていることが、必要なのだ。
私はこの戦争のおかげで、原子バクダンは学問じゃない、子供の遊びは学問じゃない、戦争も学問じゃない、ということを教えられた。大ゲサなものを、買いかぶっていたのだ。
学問は、限度の発見だ。私は、そのために戦う。
시간이 무한하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아이들의 꿈과 같은 그런 허풍을 진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란 자기가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다.
너무 호들갑 떠는 게 아닌가. 한계. 학문이란 한계의 발견에 있다. 호들갑 떠는 건 아이들의 몽상이지 학문이 아니란 말입니다.
원자폭탄을 발견하는 것은 학문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놀이입니다. 이것을 제어하고, 지나치게 써서 전쟁 하지 않고, 평화로운 질서를 생각하고, 그 한계를 발견하는 것이 학문입니다.
자살은 학문이 아닙니다. 아이들 놀이입니다. 우선 한계를 아는 것이 필요한 겁니다.
나는 이 전쟁 덕분에 원자폭탄은 학문이 아니고 아이들 놀이는 학문이 아니고 전쟁도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호들갑 떠는 일을 과대평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문은 한계의 발견이다. 나는 이를 위해 싸운다.

안고는 <불량소년과 그리스도>를 '학문'으로 끝맺습니다. 어떻게든 어엿하게 살아보려는 불량소년 정신도, 그런 불량소년이 증거로 삼는(혹은 증거로 만드는) 그리스도도 아닙니다. 안고는 모든 것을 끝장내 줄 것 같은 만능의 진리 같은 것은 애초에 없다고, 다만 더듬거리며 뭔가 삶의 스텝이 하나씩 끝나는 것 같을 때마다 그 다음 한계를 알아가는 학문만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단번에 전쟁을 끝낸 원자폭탄은 그야말로 강력하고 절대적으로 보이지만 안고가 보기에 그건 과대평가된 아이들의 허풍일 뿐입니다. 그런 허풍에 넘어가면 인간은 ‘원폭과 패전 때문에 일본인이 타락했다’고 또 다른 환상을 만들어 가겠죠.
안고는 원폭 이후 발견되는 일본과 인간을 직시합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타락하기에도 약해서, 또 천황이니 전쟁이니 무사도 같은 환상을 만들 게 자명합니다. 가령 1948년, 전쟁도 끝나고 천황폐하에 대한 충정도 끝난, 선민샘 말마따나 ‘남들은 다 바빠 죽겠는 시기에!’ 자살에 성공(?)한 다자이는 계속해서 ‘어엿한’ ‘훌륭한’ 삶에 집착했습니다. 그 훌륭한 연극 같은 삶을 마무리하겠다고 잦은 시도와 암시를 남겼고요. 안고는 다자이의 그 자살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 같습니다. ‘어엿한’ ‘훌륭한’ 삶이라고 다자이가 집착한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갈채에 기댄 것이었으니까요. 그의 죽음은 안고가 보기에는 ‘허약함’이었지요.
그럼 허약한 인간은 계속 환상을 만들고 안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안고는 <타락론>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자신의 무사도와 자신의 천황을 고안해내기 위해서는 사람은 올바르게, 타락해야 할 길을 온전히 타락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본 또한 타락할 필요가 있다. 타락해야 할 길을 온전히 타락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에 의한 구원 따위는 겉껍질에 불과한 허황된 거짓이다.” 이 ‘온전한 타락’이 <불량소년과 그리스도>에서는 ‘학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어딘가에 구속되겠지만 그것을 직시하는 수밖에 다른 구원이 없다는 것이 안고의 사상 같습니다.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더 많은 연관관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걸까요? 스피노자도 어린아이는 자신이 한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자유로워 보여도 결국 무지 속에 갇혀 있다고 했죠. 환상에도, 무지로도 도피하지 않고 자신의 윤리를 구성하기. 안고는 이를 전쟁과 원자폭탄을 통해 배운 겁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욕망에 대하여>를 읽습니다.
과제는 첨부파일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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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01 13:34
    구원은 없다. 거기에서부터 학문과 소설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는 그저 써다 버리는 키였어요. 이 글의 제목이 '불량소년과 그리스도'인 것이 '안고답게' 불경스러웠습니다.
    저는 48년이라는 시점이, 원폭이라는 사건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와서 많이 놀랬습니다. 근대의 한계, 삶의 한계를 맞닥뜨리는 것보다 한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의 중요함을 실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