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신상담

6.26 니나노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9-06-15 17:25
조회
71
<마농 레스코>(1731)는 가톨릭 신부였던 아베 프레보(Antoine François Prévost, 1697년~1763년)의 소설입니다. 안고는 신(神)이나 절대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던 프레보가 천성의 창부인 마농에 대한 소설을 쓰는 일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거라고 합니다. 신부였던 프레보가 어쩌다 삐뚤어져서(?) 창부에 대한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신부였기 때문에 <마농 레스코>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죠. 프레보와 같은 반역과 의심이야말로 “사상을 제대로 발전시키는 단계”인 것입니다.
마농은 인고(忍苦)를 모르고 또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어떻게 보면 ‘악덕’의 결정체입니다. 하지만 사회 질서의 그물을 벗어나는 ‘악덕’이야말로 인간이 구원받는 단초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안고는 말합니다. 만약 ‘사회 질서’로 인간을 옭아매고 인간의 동물성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건 인간이 아닌 제복이나 예법의 화신을 생산하게 될 거라고 말이죠. 안고는 자아의 욕망과 사회 규약의 속박 사이의 모순과 마찰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생활’이라고 말합니다. 안고는 인간을 개인의 욕망과 사회 규약 사이를 오가는 존재로 보는 것 같습니다. 사회 규약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인간이 금방이라도 타락해서 동물이나 다름없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오버’ 하는 거라고 안고는 말할 거고요. 왜냐하면 우리가 사회가 ‘미덕’이라고 칭송하는 정의롭고 올바른 것, 또 ‘악덕’이라고 치부하는 욕망에 충실한 면은 모두 인간이 갖추고 있는 자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고는 매번 ‘인간은 ~해야 한다’라는 당위에 빠질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아름다운 것과 즐거운 것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이다. 사치와 호사를 사랑하고, 졸부는 속악한 대저택을 짓고 유감없이 졸부 취미를 발휘하는 것, 그것이 만인의 본성이며 따라서 추호도 경멸해야 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아름다운 것과 즐거운 것과 사치를 사랑함과 동시에 올바른 것 또한 사랑한다. 인간이 올바른 것, 정의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은, 그것이 동시에 아름다운 것과 즐거운 것과 사치를 사랑하고 남자가 미녀를 사랑하고 여자가 미남을 사랑하는 것 등과 병존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며, 나쁜 것 또한 원하는 마음과도 병존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간의 윤리의 근원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카구치 안고 산문집>, [데카당 문학론], 지식을만드는지식, 84면)
아무래도 <욕망에 대하여>는 <데카당 문학론>(1946)을 많이 소환하게 되네요. 같은 해에 쓴 글이라 그런가?^^;; 안고가 생각하는 인간은 ‘아름다움과 호사를 사랑하는 동시에 올바른 것 또한 사랑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이때 ‘올바름’은 국가나 오래된 도덕관념이 아닌 ‘생활’에 기반한 것이겠고요. 인간의 윤리는 국가도 관습도 아닌 인간 자신의 자연에서 구성되어야 한다고 안고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もし人間が自我に就て考へるなら、自我の欲望と社会の規約束縛の摩擦や矛盾に就て、考へるといふ生活が先づ第一にそこから始まるのは自然ではないか。日本人とても例外ではない。全ての人々が考へるのだ。けれども一般に人々はかう考へる。古い習慣や道徳を疑ぐることは自分の方が間違つてゐるのだ、と。そして古い習慣や道徳に自我の欲望を屈服させ同化させることを「大人らしい」やり方と考へ、さういふ諦めの中の静かさが本当の人間の最後の慰めであり真善美を兼ね具へたものだといふ風に考へるのだ。(선민샘)
私は不幸にして、さういふ考へ方のできない生れつきであつた。私は結婚もしないうちから、家庭だの女房の暗さに絶望し、娼婦(マノンのやうな)の魅力を考へ、なぜそれが悪徳なのか疑ぐらねばならないやうなたちだつた。その考へはいはゆる老成することなしに、益々馬鹿げた風に秩序をはみだす方へ傾いて行くばかりであつた。だが、私には分らない。今もつて何も分らないのだ。
만약 인간이 자아에 대해 생각한다면 자아의 욕망과 사회의 규약 및 속박 사이의 마찰과 모순과 대해 생각하는 생활이 가장 우선시되어야 하며,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일본인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오래된 습관과 도덕을 좋지 않다고 의심한다면 그런 자신이 잘못되었다 여긴다. 그리고 오래된 습관과 도덕에 자아의 욕망을 굴절시켜 동화시키는 것을  “어른다운” 행동이라고 여긴다. 그러한 체념 속의 고요함이 진짜 인간의 마지막 위안이며 진선미(眞善美)를 함께 갖춘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한다.
나는 불행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천성을 지녔다. 나는 결혼도 하지 않았을 때부터 가정이나 아내의 암울함에 절망하고 창부(마농과 같은)의 매력을 생각하며, 왜 그것이 악덕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성질머리였다. 그러한 생각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철들지 않고 더욱 바보처럼 질서를 빠져나가는 방향으로 기울어질 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모르겠다. 지금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

다음주는 한정샘 일정이 있으셔서 쉽니다. 26일 만나요~^^
과제는 첨부파일을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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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6-17 13:49
    안고는 자신 안에서 우글거리는 모순을 직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서부터 문학은 시작된다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무엇을 해야 한다'가 아니라 '나는 이것을 원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윤리를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전체적으로는 역시 '청춘의 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