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10. 29 세미나 후기(옥상조)

작성자
감자
작성일
2016-11-02 22:30
조회
324

산시로는 구마모토를 과거의 공간, 돌아가선 안 될 공간으로 자기 앞 날의 행로에서 지워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막연히 새로운 세계이리라는 기대를 안고 온 도쿄에서도 한창 과거를 탈피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어디서나 공사 중인 도쿄의 모습은 산시로를 놀라게 합니다. 그 공사는 그곳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도, 안위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서구 300년의 활동을 고작 40년이라는 기간에 이뤄내기 위한 공사, 서구에 뒤쳐지지 않기 위한 공사입니다. 공사 중인 건 도쿄의 외연만이 아닙니다. 노노미야를 처음 만났을 때 산시로는 그를 현실 세계와는 조금도 접촉하지 않는 골방의 지식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노노미야의 머릿속에서도 공사는 격렬하게 진행 중입니다. 학계 역시 공사 중인 도쿄와 마찬가지로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고, 노노미야는 그 흐름에 뒤쳐져선 안 된다는 위기감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노노미야를 현실세계와 담쌓은 인물로 볼 수 있을까요. 이응쌤은 산시로보다 먼저 구마모토에서 상경한 노노미야가 산시로처럼 어벙한 상태로 도쿄에 와 도회적인 감각들을 조금씩 체득하는 과정을 거쳐서 종국에는 여동생까지도 연구 분석하듯 볼 수 있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건화는 엉거주춤 하고 있는 산시로의 모습이 마치 노노미야 같은 도시인이 되어가는 과정 속 일시적 혼란이고 곧 자연스럽게 도시에 녹아들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과연 산시로가 노노미야처럼 세련된 도시인이 될 수 있을까. 혹 근원적으로 이질성 같은 걸 느끼고 있는 게 아닌가. 엉거주춤하고 있는 것 자체가 갓 상경한 촌뜨기라서 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산시로가 스스로 뭔가 하려고 했던 게 거의 없었고, 그 뭔가 하지 않으려는 것 자체가 산시로의 의지처럼 보인다. 그래서 <산시로>에서 이렇다 할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도 산시로가 끌려가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했습니다. 이응쌤도 산시로가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계속 입을 다무는데, 그 상황에 적합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말을 하지 않는 게 어쩌면 끌려가는 걸 차단하는 행위일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산시로는 의지를 갖고 어떤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상황에 끌려 다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다보니 말을 하지 못하고, 어쩌다보니 돈을 건네주지 못하고……. 이응쌤은 산시로가 의지적으로 끌려가지 않는다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일차적으론 산시로가 재빠르게 상황파악을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예컨대 기차에서 만난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된 상황에서도 어벙하게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다가 일이 닥치고 나서야 뒤늦게 알기 때문에 온전히 의지적인 면모로만 읽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란다쌤은 그게 산시로의 시대착오적인 면모 같고, 메이지 40년에 메이지 원년과 비슷한 멘탈을 가지고 있다는 건 정말이지 시대착오적이지만 그런 면모가 왠지 모르게 산시로에게는 힘이 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기차 안에서 ‘러일전쟁’을 매개로 공통적인 감각을 형성하는 노인과 여자와는 달리 산시로는 그들의 대화에서 비껴나 그들을 관찰합니다. 또 산시로는 길 잃은 미아를 봤을 때에도 미아를 도와주진 않지만 노노미야나 히로타처럼 그를 비평하지도 못하는 마음의 소유자입니다. 거침없이 대학과 사회를 비판하는 요지로 같은 청년들에 비해서 산시로는 엉거주춤하고 불안한 정서를 도쿄 생활의 주된 정조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길 잃은 어린 양, 행인, 방황하며 떠도는 자와 같은 인물들을 소세키의 전기 3부작과 후기 3부작을 포함한 많은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나갈 수도, 그렇다고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없어 문 밖에서 서성이는 이들(<문>)이 느끼는 이질감과 거부감, 불안은 무엇일지 계속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네코와 산시로의 사랑에 대한 얘기도 나누었는데요. 이야기 중간에 나왔던 ‘pity is akin to love’ (가엾다는 건 반했다는 것 이니라), ‘가엾다’는 건 어쩌면 어떤 사람을 나보다 낮게, 어여쁘게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강자가 약자에게 느끼는 감정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산시로는 미네코를 보면서 가엾다거나 어여쁘다는 감정보다는 ‘알 수 없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무서운’ 감정을 느낍니다. 도쿄행 기차에서 만난 묘령의 여인과 후지산, 미네코 등 산시로에게 두려움의 감각을 유발하는 이들은 산시로의 상식, 과거 구마모토의 경험으로는 해석 불가능한 정체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세키는 ‘pity is akin to love’ 라는 문장을 던져놓고 전혀 가여워 보이지 않는 미네코를 산시로의 사랑으로 그리고 있는 걸까요?


란다쌤은 소세키의 많은 작품들에서 삼각관계의 구도가 만들어지고 나서 주인공이 사랑을 깨닫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데 산시로의 미네코에 대한 사랑도 노노미야를 경유하고 나서야 가능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산시로가 미네코를 두 번째로 만났을 때 까지도 미네코는 무섭고, 알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주로 미네코의 색체,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있었을 뿐 산시로의 감정적 끌림에 대한 언급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산시로가 노노미야가 준 리본을 단 미네코를 보고나서 그와 노노미야 사이의 경쟁관계가 만들어졌을 때, 노노미야로부터 미네코의 마음을 획득하려는 욕망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혹 미네코가 남자 둘 사이에서 교환 가능한 뭔가가 되고 나서야 ‘반한다’는 게 가능한 거 아닌지.


<산시로>에선 히로타 선생의 사랑(?!)도 엿볼 수 있었는데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단번에 반하는 <취미의 유전>도 히로타 선생도 그렇고 한 번 봤는데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가 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란다쌤은 그 사랑에 빠지는 찰나를 주의 깊게 봐야하는 것 같다면서 메이지 개화를 추진했던 모리 아리노리의 장례식 자체가 히로타에게는 쇼킹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그녀 옆에 붙어있는 그런 상황들, 게다가 그 다음에 어머니까지 죽는 일이 벌어지기에 그 주변 상황들로 인해 그녀가 더 특별한 존재가 된 건 아닐까요.




 토론 끝무렵에 '노악가'  얘기가 나왔습니다.  히로타 선생은  ‘노악가’(자신의 치부나 결점을 일부로 드러내는 사람)라는 말로 요즘 젊은이들을 표현하는데요. 요즘 젊은이들의 솔직함은 소세키가 <문예와 도덕>에서도  다룬 내용이지만 <산시로>에서 '노악가'가 나온 맥락하며,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위선을 행하는데 노악으로 한다는 등 '노악가'를 둘러싼 히로타 선생의 '론'들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ㅠㅠ

전체 1

  • 2016-11-04 01:35
    오. 미네코에 대한 사랑이 노노미야를 경유하고 나서야 가능하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 했습니다. 그러면 미네코의 애정이 결국 노노미야와 산시로가 아닌 어떤 인물에게 향했을 때, 그때 느낄 산시로의 감정은 무엇이려나? 뭔가 미네코에 대한 감정이 순수한 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노미야에 대한 라이벌 의식도 아니라면....... '그 후'와 '문'에서 마저 확인할 수 있을까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