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세키와 글쓰기

11.5 란다조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6-11-09 14:56
조회
259
 

이번 주에는 『그 후』를 함께 읽었죠. 결석이 많아서 세 명이서 단란한 토론을 했습니다(ㅠㅠ). 『그 후』는 역시 재밌었지만, 어째서인지 계속 헤매게 되는 것 같네요.

 

-권태

우선 이응쌤이 다루셨던 ‘권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응쌤은 자족적인 안온한 삶의 틀 안에 있던 다이스케가 히라오카 부부, 특히 미치요와의 접촉에 의해 “자신이 만든 틀 밖으로 나오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 후 다이스케는 스스로 책임을 가지고 하는 선택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다이스케의 변화는 실상 대사건 때문이 아니라 권태, 혹은 권태에 대한 자각과 같은 어떤 것에 의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와의 마주침에 의해 “어떤 사람을 만나도 반응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는, 내부에서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를 감지하고 그로부터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란다쌤은 다이스케의 권태를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란다쌤은 다이스케가 게으르게 자기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자연스럽게 주어진 길을 거부하고 오히려 권태를 멀리하기 위해 아주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이스케의 고등유민으로서의 삶은 자각하지 못한 채 반복하고 있던 어떤 것이 아니라,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그가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삶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안온한 삶에 갇혀있던 다이스케가 익숙한 태도를 버리고 독립하는, 성장소설의 구도로 『그 후』를 읽기는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수와 다이스케 또는 사토리 세대와 다이스케

란다쌤은 다이스케가 산시로에서 언급되는 (히로타 선생이 말하는)노악가 정신을 체화하고 있는 인물로 보셨습니다. 타자본위를 극단적으로 거부하고 존재가 곧 목적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이기주의, 개인주의의 화신이 다이스케라는 것이지요. 그는 패션뿐만 아니라 사상의 측면에서도 시대의 첨단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란다쌤은 다이스케와 지금의 백수를 비교하셨습니다. 둘은 비슷한 듯 다릅니다. 란다쌤은 둘 모두 일도 안하면서 바쁘다는 사실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백수들은 권태로운 일상을 소비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이것저것 하기 때문에 바쁘고, 다이스케는 존재와 목적을 일치시키기 위해, 권태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바쁘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응쌤과 저는 다이스케가 백수라는 특정 군상만이 아니라 지금의 젊은 세대의 보편적인 특징과 닮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의 2~30대들의 다른 세대와 구분되는 특징은 ‘자기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국가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이념을 위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진보에 대한 믿음도 없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환상도 딱히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 세대에 ‘깨달음’, ‘득도’라는 뜻의 ‘사토리’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한국의 경우도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고 생각됩니다. 출세하는 것에도, 큰돈을 버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 저축을 하거나 미래를 대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월급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낌없이 투자하는. 물론 모든 젊은 사람들이 이렇다는 건 아니지만, 과거에 비해 이런 삶의 방식이 표면에 드러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걷기 위해 걷는 것’을 목표로 삼는 다이스케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혼에도 출세에도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의 신체를 돌보고, 미적 취향을 충족시키는 것에 관심을 쏟는 다이스케의 모습은, 지금에 와서는 보다 일반화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이스케와 지금의 2,30대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폐적인 성향과 냉소주의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항상 그렇듯 느낌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다이스케의 이기주의를 어떻게 볼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했습니다. 란다쌤은 다이스케의 미치요에 대한 사랑이 철저한 자기애라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란다쌤은 이때의 이기주의를 ‘자기 성실성’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셨는데, 다이스케가 모든 것을 버리고 미치요를 선택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이스케는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도금을 벗겨내고자 했지요. 그런데 동사서독 때 채운쌤 강의를 다시 떠올려 보면 다이스케의 미치요에 대한 사랑은 ‘연민’의 형태를 띠고 있고, 연민이라는 감정은 항상 소유욕과 관련됩니다. 자신을 초과하지 않는 대상,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대상에 대해서 작동하는 것이 연민이라는 감정이죠. 그렇기 때문에 다이스케는 나약해져 있는, 병들고 아픈 미치요에게 끌립니다. 두 번째 읽어도 여전히 잡히지 않는 다이스케였습니다...

 

-자연스러움

란다쌤은 소세키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주제이기도 한, 교환 가능성의 문제를 가지고 글을 쓰셨습니다. 다이스케에게 불안이 있다면 그것은 화폐와 같은 특정한 매개를 통해서만 모든 관계가 작동하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느낀 데에서 온다는 것이 란다쌤의 분석이었습니다. 화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거리조정하고(다이스케와 다이스케의 아버지 사이의 관계를 성립시키는 아버지의 돈과 다이스케의 복종) 친구와 친구 사이의 관계(히라오카 부부와 다스케 사이를 매개하는 돈)도 가능하게 합니다.

다이스케는 불안의 직접적인 원인이 경제사정에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란다쌤은 이것이 단순히 러일전쟁 이후의 인플레이션을 지시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이상의, 존재에 대한 불안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지요. 다이스케의 불안은 모든 것이 매개물에 의해 교환될 수 있는 상황, 그리고 매개물의 존재에 의해서만 다른 것들과, 그리고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불안이라는 것입니다. 이전에 다이스케는 스가누마나 히라오카와 같은 매개자를 통한 관계 속에 미치요를 두었지요. 소설의 마지막에 다이스케는 매개물들을 경유하지 않고 미치요를 마주하고자 합니다. 주사위를 던진 것이죠. 그것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매개 없이 만나는 일이기도 했으리라는 생각도 듭니다.
전체 1

  • 2016-11-10 08:54
    다이스케를 지금의 백수와 비교하는 게 인상적이네요. 소세키 소설을 보면 다이스케처럼 구시대와 신시대의 가치관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물들이 지속적으로 나오는데, 그걸 분석해봐도 재밌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