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4월 12일 : “또 하나의 세계, 또 다른 삶의 양식” 후기

작성자
애면글면
작성일
2019-04-14 23:59
조회
147
비하인드 사진전

바야흐로 2주차에 접어든 “우리가 만난 이슬람” 세미나. 지난 금요일은 “또 하나의 세계, 또 다른 삶의 양식”이라는 주제로 건화쌤과 민호쌤께서 각자 준비한 발표를 듣는 날이었습니다. 본격적인 발표에 앞서, 비하인드 사진전(?)이 열렸습니다. 지난 2월 19일에 열렸던 영상&사진전에 참여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로, 참여했던 분들에게는 이번 여행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터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 내부의 그리스도 성화, 이맘 자데 모스크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들 ... 채운 선생님 진행 아래, 다양한 사진과 더불어 그에 담긴 사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사진전은 계속됩니다.) 샌드위치와 케밥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서 페르시아의 흔적 곳곳을 소요했던 소생팀! 테헤란 대학교에서 만났던 청년들, 그들이 연결해준 교수님과의 대화들. 이슬람 사원에서 만난 율법학자(울라마)와 가졌던 긴 대화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던 에피소드.. 그 중에서도 사원에서 경건히 기도하는 이들과, 이리저리 뛰노는 아이들이 한데 어우러진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사진에서 부연된 설명인지 좀 헷갈리지만, 중세 서양에서는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공존이 이뤄졌지만, 둘의 본격적인 분리가 이뤄진 것은 근대 이후라는 것이죠. 적어도 사진 속에서 비춰진 이슬람 사원 내의 풍경은 제게도 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특정한 요일과 공간에서만 이뤄지는 예배와 찬양의 엄숙함은 영성을 일상에서 분리시킵니다. 하지만 그 날 봤던 사진은 묻는 것 같습니다. 종교적 실천은 정말 일상의 것과 별리된 어떤 것일까? 그것은 제가 종교를 공부하면서 관념적으로 짚고 넘어갔거나, 구체적으로 사유하지 못한 지점이었습니다.

이슬람 도덕의 계보

건화쌤의 발표는 ‘아브라함의 종교’로써 같은 일신교지만 다른 이해를 가진 종교, 기독교와 이슬람의 비교에서 출발합니다. 유일신을 섬기고, 국가적인 종교로 기능해왔다는 공통점이 각각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있지만, 신체적인 층위에서 이 둘은 다르게 감각되었다는 고백이 이목을 끌었습니다. 기독교에서 사제의 권위는 절대적이고, 설교적 권위와 거룩함을 위시한 배타적인 분위기가 교회라는 공간을 숨 막히듯 둘러싸고 있었다면, 이슬람 모스크를 방문할 때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신과 대화하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충전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는 언급에서 방금 전에 본 사진들이 떠올랐습니다. 이슬람 교인들이 추구하는 삶의 양식은 종교적 외피를 토대로 세속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신자들의 표상과 다른 감각을 전해줬다는 것이죠.

저도 니체가 쓴 《도덕의 계보》를 화요일 아침마다 함께 읽고 있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종교를 ‘신’의 문제가 아닌 ‘인간적인’ 문제로 바라봅니다. 특히나 기독교를 비판하는 니체의 관점은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신체적 차원의 증상으로서 종교를 본다는 것은, 초월에 관한 표상으로 종교를 규정하지 않고, 종교 자체를 현실적인 고통에 관한 해석의 산물로 삼겠다는 힘-의지의 작용입니다. 새내기 시절에 종교학 개론을 배우면서 제가 공부한 이론 또한 종교의 정의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기능적 측면에서 종교를 정의하면, 종교는 인간에게 닥친 사건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범주라는 것이죠. 고통의 문제에 응답해왔던 것이 종교의 임무였던 반면, 니체는 종교의 모습에서 다시 인간적인 것을 발견합니다. “인간이 견디지 못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닌, ‘고통의 무의미함’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고통의 문제를 죄와 부채의 문제로 치부합니다. 고통과 씨름하는 문제를 ‘죄’를 저질렀기 때문으로 본다면, 인간이 종종 마주치는 크고 작은 갈등은 끊임없는 죄책감과 부채감을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이때 모든 고통은 원죄에 따른 가책(채무)의 양산으로 여길 뿐이죠. 니체에게 이것은 고통을 ‘신들의 장난’으로 치부하면서 영혼의 자유를 누렸던 그리스인들과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아들이되, 이를 해석하는 자력을 기르고자 했던 불교적 교리와 너무도 다른 지점인 것입니다.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되 고통을 ‘도덕’의 문제로 삼지 않았던 이들. 반면, 니체는 기독교를 이렇게 진단했을 것 같습니다. “이보다 더 노예적이고 관념적인 종교가 있을까?”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코란>에서는 다른 엔딩을 맞이한다는 설명은 잔잔한 충격입니다. 낙원에서 추방되지 않고, 그들의 회개가 신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죠. 따라서 이슬람에는 원죄의식이 없다는 설명이 인상적입니다. 더불어, 내세가 현세적 고통의 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설명은 이에 대한 저의 궁금증을 유발했습니다. 이슬람 교인들에게 내세관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자, 건화쌤은 내세관에 대한 믿음이 이슬람교에 있긴 하지만 내세가 현세적 가치관, 즉 결여된 것에서 특정한 보상을 바라고자 하는 관념이 적용되지 않는 세계인 것 같다고 답했습니다. 이외에 이슬람 교인들이 신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 ‘저 세계’에 있는 ‘우상’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내재신의 면모’를 갖췄다는 설명은 독특합니다. 여기서 건화쌤은 여행 중 만났던 아지미에게 들었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슬람 모스크를 방문한 소생팀이 아지미에게 ‘기도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말하자, 아지미는 “당신들의 신과 대화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신과 인간을 매개 없이, 매뉴얼 없이 연결하는 것은 이슬람 신학에서 비롯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윤리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고통’의 문제를 원죄나 심판 같은 도덕적 개념과 매개하지 않고, ‘일어남’ 자체의 긍정으로 이끈다는 것이죠. 40년만의 대지진을 함께 겪었지만 오직 비탄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4년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에 열광하였던 이란인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 中) 이밖에 ‘더 고민해볼 문제’로 IS의 경우처럼, 이슬람에 내재한 파시즘의 도덕을 새로운 가치의 추구가 아닌, 서구 자본주의적 문화의 반작용으로 사유한 점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통의 해석’과 관련한 질의응답에서, 채운 선생님은 북유럽 사회의 높은 자살률이 ‘고통의 무의미함’을 못 견디는 사태를 말해주고, IS와 같은 단체에 서구 청년들이 동조하는 것이 ‘대의를 위한 죽음’을 말해준다면, 둘은 같은 본질을 공유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고통의 무의미함을 견디지 못한 인간이 기독교에 귀의하여 고통을 채무적인 감각으로 귀속시키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지요. IS의 유입이 그들을 단지 ‘타자’화하는 것에 그칠 뿐, 자살에 이르게끔 만드는 삶을 발명해낸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과의 연관 속에서 그들을 진단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타자에 대한 기예, 환대

이번 소생 프로젝트에 시동을 걸었던 계기 중 하나는 당시 국내에서 이슈가 되었던 예멘 난민 문제였다고 합니다. 이슬람 문화를 돌아보았던 민호쌤이 타자와 환대를 고민하게 된 흔적들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해를 끼칠지도 모를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고 밥까지 내어준다”는 환대, 그것은 정말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일까요? 민호쌤의 고민은 세미나에 참여한 많은 분들에게도 하나의 화두였습니다. 환대의 어려움은 타자에 대한 표상에서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그동안 ‘원만한 관계’라고 여겼던 많은 관계에는 알고 보면 ‘보답할 수 없는 베품’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는 고백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환대를 허용하지 않던 ‘원만한 관계’가 얼마나 ‘취약한 관계’를 만들 수 있는지를, 민호쌤은 이븐 칼둔의 《무깟디마》와 우리에게 ‘아라비안 나이트’로 알려진 《천일야화》,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마지막으로 우치다 타츠루와 강상중의 대담을 인용하면서 지면에 미처 옮기지 못한 고민을 말로 이어갔습니다. 이에 호응하듯 질의응답 시간에 많은 선생님들은 환대의 어려움에 관한 소회와 그것을 어려움으로 여겼던 자신에 대한 고해를 공유했습니다.

채운 선생님은 타자에 대한 환대의 문제를 발생적 차원에서 보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의견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환대를 의무적으로 요청했던 이슬람 사람들을 탐구하기 위해 ‘사막’이라는 척박한 땅(‘환경적 요인’), 그리고 ‘알라’의 앞에서의 평등한 존재에 대한 관념(‘교리적 요인’)을 살펴보는 것은 그들이 환대를 어떤 ‘윤리’의 일환으로 삼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환대의 문제를 오늘날의 윤리로 다시 요청하는 까닭은, 일상화된 위기(‘금융위기’)와 같이 안정된 보호막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혹은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배척으로 내면을 위협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는) 사회적 상황들, 그리고 여행자 및 디지털 유목민과 이민자들처럼 유동적 인구(‘떠돌이’)를 양산하는 자본주의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음을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환대의 문제는 ‘낯선 자’들을 마주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갈등이 생겨난 순간을 삶의 윤리로 삼기 위한 지침입니다. 환대는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흔히 내세우는 인도주의(‘휴머니즘’)를 넘어섭니다. 환대로 맺은 관계는 ‘저 사람이 내게 좋은 것을 해줬으니 나도 좋을 것을 해줘야지’라는 식의 교환 관계를 넘어선 증여 관계입니다. 《천일야화》에서 어느 이발사 이야기를 인용한 민호쌤이 말했듯, ‘행복하게 끝나는 것이 환대라면, 그것은 진정한 환대가 아니다’는 말, 그리고 재산의 약탈까지 포함한 자세로써 ‘무조건적 환대’를 얘기했던 데리다의 견해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결국 환대의 문제란 사막처럼 척박한 나의 무능과 마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환대가 하나의 윤리로 요청되는 사회적 조건들은, 나의 ‘무능’에 대한 감각을 새롭게 길러내기 위한 예열과정이 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혜원쌤(“‘주는 덕’이란 무엇인가 : 이슬람의 자카트”)과 지영쌤(“섭생의 도, 굶기의 윤리 : 라마단에 대한 단상”)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많이 보러 와주세요.
전체 5

  • 2019-04-16 02:14
    에구머니나! 이케 정성스레 쓰시느라 을매나 애면글면 하셨스까!! ㅎㅎ 저는 딱 두 번 짧게 만난 '이슬람님'에게 홀딱 반했어요^^ 너의 방식대로 너의 신과 대화하라는, 그 명랑하기 짝이 없는, 투명하고도 따뜻한 모스크의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전혀 두려움없는 마음으로 환대하는 '이슬람님'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팔계파인 저는 이번 금요일 '굶기의 윤리'가 조금 압박(?)을 느끼는 부분이지만, ㅎㅎ 그래서 더욱 기다려집니당~~! 나도 이슬람팀과 함께 갈껄 그랬쒀!! 엉엉ㅠ

  • 2019-04-16 15:40
    정말 또 하나의 세계, 또 다른 삶의 양식을 맛만 보고 있네요. 쩝. 세상은 넓고, 내가 모르는 세계는 어찌 이리 많은지. 귀동냥으로 듣는 이슬람. 재미가 쏠쏠합니다. 내겐 너무나 당연한 기브 앤 테이크가 환대 앞에선 뻘쭘해지네요. 새로운 세상이 선사한 신선한 충격은 내가 사는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돌아보게 합니다. 담시간엔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풀려나올 것 같아 기대됩니다.

  • 2019-04-16 17:37
    글게요 을매나 애면글면 하셨을까ㅋㅋ 댓글알바 혹시 내가 아는 두부김밥 샘 ^^ ?
    세미나가 얼마나 영성충만^^했는지 느무 자랑들하셔서 후기로는 궁금증이 채워지지 않네요 ㅠㅠ 금욜에 엉덩이가 들썩들썩 할 듯 합니다 ~

    • 2019-04-16 17:58
      들썩이면 가야지. 고고

  • 2019-04-16 20:46
    저녁을 든든하게 먹은 탓에 중간 중간 졸다가 놓친 부분이 있었는데, 한역 쌤이 꼼꼼히 챙겨주시네요.
    이번주 금요일 세미나는 주제도 주제인만큼 ( 섭생의 도) 공복으로 참여할까 합니다.
    누예고치 실타래 뽑듯 한올 한올 뽑아낸 한역썜의 섬세한 후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