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세미나

4월 26일 : '이슬람의 시간과 공간을 걷다' 후기

작성자
애면글면
작성일
2019-05-06 20:01
조회
185


1970년대 말에 일어난 이란의 이슬람 혁명은 서구식 근대화의 모델을 추구했던 팔라비 왕조(레자 샤)를 무너뜨리고, 결과적으로 종교적 지도자 호메이니를 집권시킵니다. 그런데 이 혁명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무장하지 않은 민중이 무장한 체제를 동요시키고, 저항이 분열 없이 확산되었으며, 샤에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특정한 목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경제발전으로 안락한 생활을, 더 많은 권리의 확산을 원치 않았던 이상한 혁명에 철학자 미셸 푸코도 이내 흥미를 느낍니다. 그리고 푸코는 혁명의 파토스가 채 가시지 않은 이란에 취재차 머물면서 그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던 힘의 근원을 탐색했다고 전해집니다.

첫 번째 발표를 맡은 정옥샘도 이슬람 혁명이 지닌 이상한 힘에 대한 관심에서 발제를 준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옥샘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들을 수 있었어요. 학교 진입로를 꽉 메운 플랜카드, 선배들의 권유로 들어간 세미나에서의 공부들, 메케한 최루탄 연기와 함께 거닐던 시위현장의 풍경 ... 무려 20년씩이나 운동에 헌신하셨던 정옥샘의 과거는 제가 부모님에게 들었던 7-80년대 학생운동의 면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한때는 이전 세대 청년들이 부르짖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더 많은 일자리를 운운하는 요즘보다 더욱 고귀한 욕망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지금 세대와 이전 세대들이 처한 시대적 조건이 다르긴 하지만, 그럼에도 더 많은 제도적인 혜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혁명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와 관련해서 채운 선생님은 아직도 ‘혁명’을 고민하는 것이 제도적 문제로, 정권을 교체하는 문제로 사유되고만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혁명을 인간이 누려야할 혜택이 얼마나 더 보장되고 획득하느냐를 결정짓는 계기로만 볼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식으로 혁명성을 배치하려는 욕망을 문제적으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는 것이죠. 이슬람 혁명의 의의는 호메이니라는 또 다른 지도자의 등장으로 요약될 수 없습니다. 호메이니 역시 반대파를 숙청하거나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에 제약을 거는 등, 비판받을 여지를 남겼던 지도자였으니까요. 다만 이슬람 혁명이 흥미로운 점은 더 많은 혜택을 보장받기를 원하지 않는 방식의 혁명이자, ‘더 많은 것을 누리지 않기 위한’ 혁명이었다는 사실에서, 그러한 요구들이 시민들에게 자발적으로, 대대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에서 발견됩니다. 푸코가 흥미를 느꼈던 점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요? “봉기를 일으키는 이란인은 말했다. ‘이 부패한 인물을 바꿔야 한다. 이 나라의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바꿔야 한다. 아마도 이것이 봉기의 핵심인 것 같다.” (슈발리에 필립, 조성은 역, <정치적 영성, 푸코와 이란>, 《철학과 문집》, p.344)

‘우리에게 ~을 달라’가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구호에서 전해지는 혁명에 관한 느낌은 자못 새롭고 때론 낯설게 다가옵니다. 이슬람 혁명의 주동자들은 이란의 시민들이자, 그들은 또한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종교적 감각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실제로 소생팀이 이슬람 사원에서 만났던 법학자(울라마)는 혁명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삶의 양식’(Lifestyle)으로 풀어냈다고 합니다. 아침이 되기 전에 새벽기도를 마치고, 주변 사람들이 아프면 축원해주고, 자기 전에 다시 기도에 임하는 등의 일과를 수행하는 이란인들의 일상에서 영성은 특별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무슬림들이 혁명을 사유하는 방식도 먹고 자고, 다른 누군가와 만나서 대화하는 식의 담백한 생활 양식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모스크, 신성의 시공을 거닐다’는 제목으로 시작한 두 번째 발표는 혜림쌤이 글을 준비하면서 느꼈던 여러 고민을 함께 나눈 시간이 되었습니다. 혜림쌤은 모스크라는 공간과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신체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글로 풀어보고 싶었지만, 잘 안되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시장이 있으니 사람들이 장을 보고, 교회가 있으니 기도하러 가듯이, 건축가가 의도했던 기능에 맞게 사람들이 공간을 써야한다는 의식이 강했고, 설계에 있어서도 건물의 외형을 중시했던 관념이 자리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혜림쌤이 여러 모스크를 방문하면서 중요하게 느꼈던 것은 사람들이 공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공간의 쓰임은 물론, 건물을 둘러싼 공기가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모스크 안에서는 율법상으로 허용된 행동들만 엄숙하게 행할 것 같았었는데, 막상 둘러보니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피곤한 이들은 몸을 뉘어 쉬고 있었고, 어떤 이는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천진하게 뛰놀고 있었더라는 것이죠. 주어진 규정에 머물지 않고, 공간의 용도를 다채롭게 활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인상을 받았던 것은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첫 번째 발표회가 있던 날에 보았던 몇몇 사진이 기억나더군요. 혜림쌤에게도 그 모습이 남다른 인상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모스크에 가야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방향을 틀어서 그곳을 영적인 공간으로 만들어내는 무슬림들의 사고방식도 재밌었습니다. 무슬림들이 나침반을 들고 다니는 이유는 메카가 위치한 방향을 알기 위한 것이지만, 이것은 한편으로 어느 장소든 이들에게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영성은 자기가 위치한 방향 하나를 바꾸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 대목은 예전에 민호쌤이 절탁NY 공지에 썼던 일리치의 말씀, “혁명이란, 자기 생각 하나 바꾸는 것이다”를 떠올리게 하네요.) 혁명이든 영성이든, 그 중심은 지금 이 자리에서 자기가 어떤 것을 보고 느끼고 있는지, 자신들의 지금과 여기가 무엇과 관계하는지에 따라 사유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건물의 외벽은 굉장히 수수하고 어딘가 볼품없어 보이지만, 안마당과 이완(*모스크를 들어가기 전 입구에 반구 형태의 천장을 한 공간)에 정교하게 장식된 아라베스크 문양들이 특징인 이스파한의 저메 모스크도 기억에 남습니다. 외면을 중시하지 않고, 내부로 향할수록 더욱 견고하게 다져진 웅장함은 마치 타자를 두려움 없이 환대할 줄 아는 이슬람인들의 성향과도 어딘가 닮아있는 듯 보입니다. 어떤 것이 와도 대수롭지 않게 수용해낼 줄 알고, 한편으로는 뭔가를 내세울 것 없이도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채운 선생님은 벽은 높고 문은 작지만, 내부로 들어가면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생활하는 구조가 펼쳐지는 건축양식에서 이슬람인들은 공과 사에 대한 감각이 남다른 것 같다는 것을 말씀하기도 했죠.

저는 요즘 ‘몸과 정신은 분리해서 사유될 수 없다’는 말을 공부하면서 거듭 마주치곤 합니다. 건물에 나타난 공간 구성이 그곳을 쓰는 자들의 마음을 어떻게 말해주는지, 반면 사람들의 씀씀이는 공간에 어떻게 반영되어 나타나는지, 이래저래 서로 생각할 점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어느덧 ‘우리가 만난 이슬람’ 깜짝 세미나도 끝났군요. 후기가 늦어서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앞으로 소생 프로젝트의 일거수일투족에 꾸준한 관심과 애정을 부탁하면서, 여기서 이번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발표 직전까지 머리를 싸매면서 원고를 다듬던 소생팀, 금요일 저녁마다 같이 고민하고 얘기 나눠주신 많은 선생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전체 4

  • 2019-05-06 22:16
    4주에 걸쳐 진행되었던 이슬람 세미나에 대한 감동적인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참 놀랍고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이슬람문화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 풍부한 영감을 전해주었습니다. 이런 세미나를 기획하신 채운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귀한 생각을 멋진 글로 풀어내셨던 소생팀 여러분, 정말 고생하셨고 고맙습니다. 또한 사회도 보고 이렇게 마지막 후기까지 정리하느라 애쓰신 한역쌤, 애쓰셨수~~^.^ 근디, 이거 호정쌤이 쓰기로 한 거 아니었나? ㅋㅋ

  • 2019-05-07 19:41
    깜짝 세미나 이후 이슬람이 부쩍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충실한 후기도 넘 좋네요. 전 호정샘이 쓴 줄 알았는데. ㅎㅎ

  • 2019-05-08 10:19
    혁명이 무엇을 남겼는지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혁명을 가능케 했던 것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이란인들의 소박함 당당함이 아니었을까요.

    어떤 것이 와도 대수롭지 않게 수용해낼 줄 알고,
    내세울 것 없어도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당당함이라는 구절을 조용히 생각해봅니다.

  • 2019-05-08 10:31
    한역샘 그동안 꿀진행 감사했습니다ㅋㅋㅋ "‘우리에게 ~을 달라’가 아니라, ‘우리는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를 외치는 혁명... 철학하는 월요일에서 읽었던 <코뮨이 돌아온다>도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