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선악의 저편 5주차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11-30 10:59
조회
69
소니 12월 3일 공지
어느덧 (내일이면) 12월이네요! 내년에도 소니 함께 해주시길~^^

이번 주에는 《선악의 저편》 6, 7장을 함께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어떠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저는 이번 6, 7장이 특히 재밌게 읽혔습니다(에세이 주간이 끝나서 그런 걸까요?).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선악의 저편》을 ‘귀족학교’에 비유하면서, 이 책이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고 말하는 한편, 자신이 ‘현대성’을 비판하고 있음을 강조했죠. 바로 그 현대성에 대한 비판이 돋보인 것이 바로 이번에 읽은 6, 7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6장에서 니체는 ‘학문과 철학의 위치변경’이라는 현상을 통해 현대성의 병적인 징후를 포착합니다. 그러고 보면 니체는 정말 ‘모두 까기 인형’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플라톤 스피노자 등등의 철학자들을 비판해왔고, 쇼펜하우어나 칸트 등 동시대의 형이상학자들의 오류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지적해왔습니다. 생리학과 심리학 등을 섭렵하며 이들이 정신과 인식에 부여한 특권을 해체했죠. 그러나 니체는 철학을 포기하고 과학으로 향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니체는 늘 ‘학문적 노동자’라는 말로 ‘객관성’을 자임하는 당대의 실증주의자들이나 공리주의자들을 비판했습니다. ‘학문’이나 ‘철학’과 연관되는 사람 치고 니체의 비판을 완전히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렇지만 니체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비판했던 것은 아닙니다. 니체는 오로지 ‘어떻게 다른 가치를 입법할 것인가?’라는 질문 속에서 자신의 비판을 전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205절에서 니체는 철학자란 결국 가치의 입법자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학문적인 인간’이나 ‘이상적인 학자’, ‘탈세속적인 몽상가’, ‘신에 도취한 사람’ 등등으로 오해해왔지만, 사실 그들은 주어진 가치를 파괴하고 자신의 가치를 창조해낸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때 가치의 입법으로서의 철학이란, 영리하게 삶을 회피하기 위한 기술 따위가 아니라 삶을 더 없이 강렬하게 겪어내기 위한 수단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즉 니체는 어떻게 인식을 위한 인식이라는 도그마와 공리주의적 유용함이나 실증주의적 객관성 같은 쩨쩨함으로부터 ‘의지’를 구출할 것인가를 고민했던 것입니다. 삶을 좀먹는 도그마들로부터 벗어나 끊임없이 모험하며 삶이라는 ‘좋지 않은 게임’을 계속하기 위하여.

그래서 니체에게 철학자와 학자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자기극복’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 또한 ‘학문적 노동자’의 단계에 한 번은 머무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로부터 떠나기를 반복합니다. “아마도 그 스스로 비판가이며 회의론자이고 독단주의자이며 역사가이고, 그 외에 시인이며 수집가이고 여행가이며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며 도덕가이고 예견하는 자이며 ‘자유정신’이며 거의 모든 유형의 인간이어야만 했을 것”(188)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즉 철학자란 끊임없이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되기를 시도하는 자, 실험자이자 실험동물인 자입니다.

필연적이게도(?)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는 학자의 공부인가, 철학자의 공부인가라는 이야기가 나왔었죠. 저는 두 경우가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학자적인 공부를 하자고 연구실에 온 건 아니지만, 자주 그런 순간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관성에 이끌려 텍스트를 읽고 적당히 관념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때. 그런데 아주 가끔씩 제가 더 이상 이전처럼 감각하고 평가하고 관계 맺고 있지 않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도 있습니다. 너무 소박할지 모르지만 이런 순간에 우리도 조금씩 스스로를 극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7장에서는 주로 여성에 관한 니체의 언급에 대해 이야기 나눴던 것 같습니다. 분명 니체의 말들이 지금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니체가 늘 말하는 것처럼 보편적으로 올바른 것이란 없고, 우리가 니체를 읽는 것은 그가 모든 것에 대해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르게 보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여성이 ‘점원’이 되는 것은 결코 여성의 해방이 아니라는 니체의 지적이 놀라웠습니다. 단순히 여성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는 대개 권리를 획득하는 것을 자유나 해방과 등치시키곤 하는 것 같습니다. 소비자로서, 국민으로서, 개인으로서 스스로의 권리를 온전히 누리는 것. 물론 권리는 중요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우리를 소비자로, 국민으로, 개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권력에 대해 질문할 여지가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요?

다음주에는 《선악의 저편》 8장을 읽고 만납니다. 간식은 미영샘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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