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선악의 저편 5주차 후기

작성자
이미영
작성일
2018-12-07 02:07
조회
106
12월 3일 소리 내어 읽는 니체 5주차 후기

 

소니 5주차 수업은 『선악의 저편』 제8장 ‘민족과 조국’편을 같이 읽고 토론하였습니다. 이 장에서 니체는 많은 예술가들과 유럽의 각 나라들에 대한 다양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세밀하고 폭넓은 시선을 통해 그 당시의 문화를 이루는 힘의 배치를 읽고 사유하는 철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니체는 예술을 어떻게 보았는가?

 

우리는 예술을 대할 때 반응적인 느낌으로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고 예술가의 능력과 작품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예술을 통해 그 시대상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이지요. 니체는 예술은 예술가에게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 징후를 말해주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예술은 어떤 민족의 시대적 욕망이나 조건을 드러내는 한 양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구도 아래 삶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인간들을 구제해 주는 것으로 예술적 능력을 꼽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능력이 삶의 고통과 부정적인 세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인간의 삶은 이런 예술적 능력 덕분에 감당할 수 있게 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가로서의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창조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예술적 현상으로 정당화될 수 인간의 삶은 여전히 생성과 고통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전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 니체의 철학적 주제는 삶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삶의 조건 중의 하나로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모색하게 됩니다.

니체가 처한 시대적 조건을 살펴보면 독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통일국가를 이루고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려는 때였습니다. 이러한 힘의지는 인간 개인의 자유와 평등은 무시되고 엄한 규율과 잘 훈련된 군대를 앞세우는 군국주의 길을 걷게 만듭니다. 독일 국가는 이를 위해 민족성, 즉 마치 고유하게 흐르는 독일 적인 어떤 것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니체는 그 당시 예술에서도 이러한 경향성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니체가 숭배했던 바그너와의 관계가 틀어진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바그너의 민족주의적 성향, 프랑스인과 유태인에 대한 경멸적 태도,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이상으로 되돌아가는 그에게 환멸을 느꼈던 것이지요. 그러나 나치가 바그너 음악뿐만 아니라 니체의 사상 또한 차용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합니다.

 

신체성

 

247장에서 니체는 “독일인은 소리 내어 읽지 않고 귀에 들리게 읽지 않고 다만 눈으로 읽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고대인들은 자기 자신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었는데 이는 “음성의 모든 팽창, 굴절, 전환과 템포의 변화를 가지고 읽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문장체와 구어체의 법칙은 똑같았고 이러한 법칙은 고대인의 폐부의 강함과 지속, 힘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그들의 신체성이 언어화되고, 언어가 다시 그들의 지성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는 주의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무수한 힘들이 가로지르며 투쟁의 과정이 전개되는 곳입니다. 기후에 따라 다른 신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것이 삶의 태도 및 정신의 고양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면 일조량이 많은 남부는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면이 많은 반면 일조량이 적은 북부는 음울하고 어두운 태도를 보입니다. 이러한 경향이 생리적 조건으로 이어져 삶에 대한 태도와 결부되는 것이지요. 민족이나 예술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독일의 습하고 우울한 기후와 사회적 조건들이 많은 음악가와 철학자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될 수도 있었겠습니다.

니체는 오랫동안 정신과 신체를 분리하여 위계를 만들었던 상황을 전복시킵니다. 그가 말하는 신체는 아주 역동적이고 복합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체에는 사유하는 정신과 느끼는 감각이 있으며, 그런 것들을 추동하는 여러 힘들과 정서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힘들과 정서들이 우리의 신체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려고 지금 이 순간에도 투쟁을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평화의 상태가 ‘자아’ 혹은 ‘주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민족성

 

그들이 조국에 속했던 것은 그들이 전면에 있었을 때, 약해졌을 때, 노령에 있었을 때이다. - ‘애국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단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휴식을 취했던 것에 불과했다. (p263. 256)

 

니체는 애국심을 자기 삶의 충실성이 아니라 단지 휴식을 취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휴식이란 어느 한 곳에 고양되어 취해있을 뿐 다른 것들은 물론 자기 자신조차 배제시키고 있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애국심이 최고로 고양되었다고 느꼈던 2002월드컵 때의 감정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혹 고양된 공통적인 정서가 우리의 역량을 증가시키는 듯한 환상을 일으키지는 않았을까요. 요즈음에는 우리나라나 민족, 한국인에 대한 자부심을 찾기 힘들고 오히려 ‘헬조선’ 이라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비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구조적인 사회 문제가 있겠지만 스스로의 힘을 믿지 못하고 고통에 대한 처방으로 자신의 허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니체는 애국심이나 민족성에 매몰되지 말고 획일화되지 않은 사고의 다양성을 통해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구성해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니체의 가면인 차라투스트라는 많은 민족이나 많은 나라들이 각기 다른 가치의 서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서판은 각기 다른 조건과 이웃민족과의 관계를 통해 가치를 창조해내는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서판의 기록을 통해 저마다의 가치 목록만큼 많은 선악의 목록들이 존재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불어 보편적인 선악의 기준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바로 그 시대의 역사와 종족, 문화에 따라 수많은 선악의 기준들이 존재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보편적 기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고 우리 시대, 우리 문화만을 한정시켜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리고 어떤 선악의 기준에 복종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그런 기준의 평가자이고 창조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니체의 국가에 대한 비판을 통해 그는 국가란 인간의 생리적인 부분을 억압하고 조직적 위계와 규범에 따른 행동들을 강제함으로써 출현한 것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은 생리적인 부분에 빗장을 채우고 외부의 억압에 모든 촉을 세우는 의식적인 부분이 강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힘의 고양을 위해 무리를 형성하려는 의지를 가졌습니다. 국가는 모든 사람을 평준화 시키고 왜소하게 만듭니다. 스스로 만든 가치의 서판이 없지만 마치 있는 것처럼 믿고 의지하게 만듭니다. 원래부터 부여된 민족성이 있다고 거짓으로 동원하고 선동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국가가 부여하는 민족성은 허구입니다. 각 민족의 속성은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전체 1

  • 2018-12-09 10:59
    예술가나 예술 작품을 하나의 징후로 해석하는 니체의 관점은 굉장히 낯설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것 같습니다. 가끔씩 다른 예술가나 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평가가 독단적이라거나 종잡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사실 그때 니체는 어떤 징후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네요. 꼼꼼한 후기 감사합니다 촘촘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