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소니 선악의 저편 7주차(마지막 시간)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12-11 15:59
조회
120
벌써! 《선악의 저편》을 다 읽었습니다. 이제 다음주, 공통과제 발표 및 채운샘 강의만 남겨두고 있습니다. 불교팀 + 영숙샘의 환상적인 조합도 이제 곧 마지막이라는 게 벌써부터 아쉽습니다(ㅠㅠ). 다음 시즌도 함께해주세요(제발!).

이번 주에 읽은 9장에서 니체는 ‘고귀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고귀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귀족 계급의 이미지나 ‘세련됨’, ‘고상함’이라는 단어와는 조금 다른 뉘앙스를 갖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그는 “모든 고도의 문화가 지상에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명확히 보아야 한다면서, “고귀한 계층은 처음에는 항상 야만인 계층”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고귀함이란, 세련된 생활습관이나 고상한 태도, 화려한 교양 같은 것보다는 “불굴의 의지력과 권력욕을 소유하고 있는 약탈의 인간들”이 느끼는 정신적인 우월감에 더 가까운 어떤 것입니다. 고귀함은 스스로를 가치를 결정하는 자라고 느끼는 강한 인간들이 행하는 자기예찬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러한 강력한 자기 긍정과 넘치는 힘의 충동.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고귀함입니다.

이에 대해서 지영샘께서는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을 가지고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이븐 할둔 역시 전야민(유목민)들이 가지고 있는 제도화 되지 않은 어떤 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븐 할둔은 이 힘을 ‘아사비야(aṣabīya)’라고 부르는데, 어떤 집단을 결속하게 하는 동력이라는 점에서 ‘연대의식’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번역어 때문인지 아사비야는 애국심의 원형 내지는 기원 정도로 오해되기도 하는데, 사실 이는 전야민에 고유한 국가화·제도화 되지 않는 힘입니다. 니체의 개념을 가지고 말하자면,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하는 한 부족이나 민족이 느끼는 거리의 파토스와 같은 어떤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사비야나 고귀함, 거리의 파토스 같은 것들을 이야기 할 때 이븐 할둔과 니체가 공통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인간의 평준화와 왜소화일 것입니다. 니체는 지난 8장에 이어서 그가 마주하고 있는 새로운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는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게 하는 한정된 제약 조건들의 해체라는 상황입니다. 자본주의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니체의 시대는 사람들을 계급이나 전통, 종교 등등의 고정된 코드로부터 이탈하게끔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보았듯 니체는 이것을 인간의 해방이나 진보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인간들이 극히 재주가 많고 적응에 뛰어난 노동자, 즉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는 부품 같은 존재들로 되어가는 것을 비판했죠.

고귀함의 문제 또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62절에서 니체는 이러한 ‘새로운 조건’에서는 더 이상 특정한 도덕적 명령이 힘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대체로 하나의 “종족은 똑같은 불리한 조건들과의 오랜 투쟁” 속에 놓여 있었으며, 그들은 그러한 투쟁 속에서 스스로를 육성하고 자신들의 가치를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 시켰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는 ‘새로운 조건’ 속에서는 끊임없는 적응만이 요구될 뿐 하나의 종족이 고정되고 강해지게끔 하는 ‘똑같은 불리한 조건들과의 오랜 투쟁’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니체가 근대 국가는 가치를 입법하는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모든 것을 평준화하는 기계일 뿐이라고 말했던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요.

니체는 지금 “낡은 육성의 속박과 강제”로부터 풀려난 ‘개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양’이나 ‘교육’과 같은 눈속임이 아니라 자신의 입법과 자기 향상, 자기 구원을 위한 ‘기교와 간지(奸智)’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니체가 말하는 기교와 간지란 무엇일까요? 비속함에 대해 말하는 268절에서 그 힌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니체는 언어를 공유한다는 것이 결국 체험을 공동으로 갖는 일임을 말합니다. 언어란 우리의 내면을 표현하는 투명한 매개체 같은 것이 아니라 오랜 집단생활의 결과물이며 거기에는 우리의 감각이나 체험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하는 힘이 작동하게 된다는 것. 따라서 우리가 언어를 통해 사유하고 언어를 통해서 우리의 체험을 의식하게 된다고 할 때,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에게는 쉽게 전달할 수 있는 평균적인 공동의 체험들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새로운 가치와 삶의 양식을 실험하는 일(니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요원해지겠죠. 사실 니체가 기교와 간지라는 말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는 자기 언어에 대한 의심이 개인으로서 가치를 입법하기 위한 기교의 일종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주 공지하겠습니다. 말씀드렸듯, 다음 주에는 모두 공통과제를 써오셔야 합니다. 어떤 개념이나 챕터를 자기 언어로 설명해보시는 것도 좋고, 자신의 고민이나 질문을 가지고 글을 푸셔도 좋습니다. 읽으면서 생긴 질문을 쓰셔도 좋지만, 단순히 ‘~는 뭘까?’를 나열하는 식이어서는 안 되겠죠. 그러면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시간은 그대로 1시에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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