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카프카

11.2 공지~

작성자
이응
작성일
2017-10-27 19:34
조회
63

<첫번째 시련> <작은 여인> <어느 단식 광대> <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



# 어떻게 인간을 넘어갈 것인가

<어느 단식 광대(1924)>에 실린 단편들은 카프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듬었던 글입니다. <어느 단식 광대>를 교정하던 당시 카프카는 후두결핵으로 투병 중이었고 아무런 음식물도 삼킬 수 없었기에 굶어 죽은 셈이기도 했지요. ‘굶기를 열망하는 단식 광대’가 관념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하나의 실천처럼 다가오는 것은 이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먹어야 굶을 수 있습니다. 굶는걸 끝까지 추구하면 죽게 되지요. 어떻게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투쟁의 형식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세미나를 통해 얻은 바로는, 굶는다는건 인간성 자체를 질문하고, 존재 전체를 걸어 인간과 생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단식 광대는 무대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사람들에게 굶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헌데 광대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굶어가고 있는’ 모습 뿐만이 아닙니다. 그동안 인간을 채우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인간이 무엇에 열광했는지, 그것들을 덜어낼 때의 인간이란 무언지를 보여주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철장과 같은 무대에 갇힌 단식 광대를 구경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단식광대가 보여주는 ‘인간을 넘어서려는 인간’이란 사람들에게 버겁기 때문일까요? 단식광대는 관객을 끌어들여 인간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고자 했지만, 끝까지 자신을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관객은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단식 광대>를 통해 카프카가 말하는 예술이 무언지, 삶이 무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카프카에게 이 두가지는 분리될 수 없는 무엇이었던 듯 합니다. 생의 문턱 앞에서 자기 존재를 다 던졌던 카프카. 실로 카프카의 예술가들은 자신을 소진시키는 일에 아낌이 없지요. 자기 자신을 씹어내는 고통, 글을 쓴다는 것은 카프카에게 굶기와 비슷한 행위였다고 생각됩니다. 단식광대는 인간을 넘어서고 싶어했고, 이 실험을 계속 해볼 수 있으리란 확신이 들 때 죽습니다. 의미심장하지요.

단식광대가 있던 자리를 채우는 것은 아무 부족함이 없는 야생동물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뜯어먹는, '자유라고 할만한 것도 필요치 않은 충만한 상태'는 단식의 반대극부라 할 수 있지요. 또한 사람들이 열망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 삶, 노래, 비일상

요제피네는 아주 작은 종족의 쥐입니다. 쥐는 태어나자마자 어른이 되고 생의 주기가 아주 짧지요. 아주 작은 종족이라는 것은 '작은 문학' 혹은 '소수 민족'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런 세계에서 요제피네라는 쥐는 예술가로 칭송받지요. 헌데 그녀가 부는 휘파람이란 다른 쥐들도 일상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요제피네가 휘파람을 특히 더 잘 분다고 할 수도 없지요. 우리 자신에게서는 전혀 감탄하지 않는 것을 그녀에게서 감탄하고 위로를 얻는 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요제피네가 아무도 관심두지 않았던 일상적인 것에 자신을 완전히 내맡긴 채 부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상적인 것은 낯설고 비일상적인, 그러면서도 왠지 익숙하여 마음을 울리는 어떤 것으로 다가오게 되지요.

요제피네의 종족은 말합니다. 그녀가 노래하는 것은 너무도 우리다운 것이고, 한때 우리와 같은 것이라고. 때문에 이 종족은 문제가 생겼을 때 언제나 요제피네의 노래를 듣고싶어합니다. 이제는 잊어버린 우리다움을 담고 있는 그 노래를요. 종족은 노동에 동참하지 않는 요제피네를 비난하면서도, 그녀의 휘파람소리에 이끌립니다. 노동하는 이들에게 종종 요제피네의 휘파람소리는 헛되게 보일지라도 종족들에게 불가항력적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이 있지요.

예술가는 일상 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던 것을 포착하고 그것을 노래합니다. 그 작고 연약한 소리에는 노동하는 자신들의 존재 조건이 바람들 타고 부유하지요. 그 음악을 듣는 동안 한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버거운 삶의 무게가 잠시나마 공중을 부유하고, 종족은 서로에게 어깨를 기댑니다. 요제피네의 노래에 감명하는 것은 아마도 이들이 겪는 어떤 짐과 관련이 있겠지요.



카프카는 예술을 통해 삶의 본질적인 것을 현시하게 만들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질문하게 합니다. 그 문제 속으로 관객을 초대합니다. 예술이란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런 국면을 제시하게 하지요.

쓰면서 길을 잃고, 입구도 출구도 없고, 어쩌다 들어가서 못 나오고. 폴 오스터의 말처럼 카프카는 심연의 가장자리를 향해 기어가고, 일단 거기에 다다르자 앞 뒤로도 움직이지 못한 채 달라붙어 있는 듯 합니다. 굶기를 통해, 쓰기를 통해 구멍을 열어두고, 그것을 봉해버릴 힘조차 갖고 있지 않아 모든 구멍들을 미완으로 열어두는 일, 그게 카프카가 생을 통해 보여준 실험이 아니었을까나요? ^^


이번주 후기와 다음주 간식은 성연샘~ (벌써 올려주셨네요!)

<여성의 애독서>, <기도자와의 대화>, <술 취한 자와의 대화>, <브레스치아의 비행기>, <어느 청춘 소설> ... 보영

<영면하게 된 어느 잡지>, <리하르트와 자무엘>, <큰 소음>, <마틀라르하차로부터>, <양동이를 탄 사나이> ... 지니샘

<다리>, <마당문 두드리는 소리>, <이웃>, <튀기>, <일상의 혼란>, <산초 판자에 관한 진실>, <사이렌의 침묵> ... 성연샘

수경샘은 이 세 파트 중 맘에 드는 것 아무거나 ^^

그럼 다음주에 만나요~~~
전체 1

  • 2017-10-27 21:32
    카프카 최후의 작품은 <단식광대> 토론하면서 좀 울컥하기도 했었고, 하나의 생이 단 하나의 질문으로 압축되는 <법 앞에서>의 장면도 떠올랐습니다.
    딱 맞는 말입니다. '어쩌다 들어가서 못 나오고.' ^^
    카프카의 세계, 그것은 거대한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