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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 달이 된 오누이 & 노간주나무

작성자
김현정
작성일
2017-10-16 08:00
조회
35
<해와 달이 된 오누이 & 노간주나무>

이 두 이야기 속에서는 엄마의 자식에 대한 편집증적인 집착이 보인다. 먼저 <해와 달이 된 오누이>를 보자.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 동화는 호랑이가 된 엄마와 자신들을 잡아먹으려는 엄마를 피해 달아나는 오누이의 이야기다. 그런데 엄마는 어쩌다가 자식들에게 호랑이가 되었을까?

산골에 남매를 데리고 사는 홀어머니. 그녀는 문을 열어서 아무나 집에 들여선 안 된다고 자녀들에게 당부한 후, 일을 하러 집을 나선다.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이 당부에서 남매에 대한 타자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하는 엄마의 소유욕과 집착이 엿보인다. 이후 일을 하러 나온 집 밖에서도 온통 자식들 생각뿐이다. 자신에게 먹으라고 건네준 메밀범벅도 아이들 먹이려고 못 먹는다. 이를 본 주인이 자식들 몫으로 따로 챙겨줄 정도다.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는 빨리 가서 남매에게 메밀범벅을 먹일 생각으로 가득하다. 메밀범벅을 한 그릇씩 퍼주는 상상을 하면서 고개를 하나씩 넘는다. 그런 상상과 생각들이 급기야는 그녀를 집어삼킨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포장된 엄마의 집착이 그녀를 호랑이로 만든 것이다. 호랑이가 된 엄마의 집착은 소유욕으로 변질되어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자식들까지 집어 삼킬 참이다.

이에 아이들은 저항한다. 자신들을 향한 엄마의 편집증적인 접근을 거부하고, 방어한다. 더 이상 자신들이 느꼈던 안정적이고 편안한 엄마의 목소리가 아니고, 엄마의 손이 아니다. 그리고 점점 자라나는 자식들은 더 이상 예전의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로만은 만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이들의 저항에 엄마는 감기라는 꾀병, 밀가루처럼 매끈거리는 태도로 자신의 욕망을 포장한다. 집 안에서 방어에 실패하자, 아이들은 집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래도 엄마는 끈질기게 뒤쫓는다. 도망하는 아이들과 그를 쫓는 엄마는 사춘기를 맞은 자녀와 부모사이에서 흔히 보이는 구도이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삐딱해졌다고 느끼며, 자녀와 소원해진 거리감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 다가서려는 노력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이 이야기 속의 호랑이가 그랬듯이 ‘거꾸로 비는’ 꼴이며, 결국은 파국이 필요하다. 소유욕과 집착의 화신, 호랑이가 죽어야만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하늘’처럼 새로운 마음의 자리를 마련하게 되고, 엄마와 아이들은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해가 된 누나와 달이 된 동생 그리고 구름이 된 엄마처럼 말이다.

<노간주나무>에서도 엄마의 이런 식의 소유욕과 집착이 드러나는 듯하다. 다만 여기서는 거부와 저항이 반대로 엄마에게서 나타난다. 집 밖인 학교를 다니는 아들에 대한 집 안, 엄마의 구박인 것이다. 더 이상 집 안의 존재, 내 품 안의 자식이 아닌 아들에 대한 분노와 구박으로 엄마의 집착이 변형되어 있다. 이것은 미취학 아동인 집 안의 딸과는 차별된 대우로도 드러난다. 완벽한 소유물이자, 자신의 분신인 자식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은 바로 딸인 것이다. 그래서 재산을 물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생각과 뜻을 달리하는 자식은 자식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태도는 아들을 부정하고 죽이게 된다. 집 안에서 죽어서 아버지에게 먹힌 채, 아들은 여동생의 도움으로 노간주나무 밑에서부터 세상을 떠돌게 된다. 그리고 노래한다.

‘우리 엄마는 나를 죽였고, 우리 아빠는 나를 먹었네’ 딱히 엄마의 소유욕과 집착으로 인한 불화가 아니더라도 아버지로 대변되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고 장성한 자녀들은 집을 떠나게 되며,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죽음이다. 우리는 출생과 동시에 세상과 접촉하며 사회의 질서를 배워나간다. 무질서에서 질서로, 무규정적 상태에서 규정적 상태로의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무질서와 무규정적인 상태의 죽음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규정적인 사회화 과정은 원초적 상태가 잠식당하는 것, 곧 먹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는 나의 생명을 낳았다기보다는 죽인 것이고, 아빠는 나를 키웠다기보다는 잡아먹은 것이다.

위와 같이 두 이야기를 ‘엄마의 집착과 소유욕’을 중심으로 생각해보았다. 똑같은 부모임에도 아버지보다 엄마에게서 이런 집착과 소유욕이 두드러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엄마의 몸을 통해 태어나고, 엄마의 몸으로 양육되어, 엄마와 정서적 애착관계를 1차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리라. 이와 유사하게 직접적인 신체적 접촉과 정서적 애착은 부부관계에서도 이뤄진다. 그런 만큼, 엄마와 자녀관계에서 나타나는 소유욕과 편집증적인 집착의 문제는 부부관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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