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3강 "세 가지 '종합'이란 무엇인가"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2-28 14:07
조회
177
3강 차이와 반복 : 세 가지 종합이란 무엇인가

《안티 오이디푸스》는 스피노자적인 영감이 충만한(!) 책이라고 합니다(채운샘은 이 책을 스피노자의 존재론 + 맑스의 역사 유물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렇다면 이때 스피노자적 영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철저한 자연주의’입니다. 이때 자연주의란 인간이나 문명, 산업 등과의 구분 속에서 성립된 자연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과정’으로서의 자연입니다. 스피노자적 자연주의는 ‘지금 여기’의 장 바깥에 놓여 있는 초월적인 것들을 모두 부정합니다. 스피노자의 ‘신=자연’의 세계에서 초월적인 신, 역사의 방향성, 고정 불변하는 목적 같은 것들은 완전히 제거됩니다. 스피노자는 모든 것을 ‘작동’의 관점에서 보도록 하죠. 들뢰즈-가타리가 즐겨 쓰는 말을 빌리자면 모든 것을 ‘생산’의 관점에서 보도록 합니다. 초월적인 의미나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목적의 생산만이 있고, 주체가 선험적으로 주어진 주체가 아니라 매번의 마주침 속에서의 주체의 생산만이 있는 세계. 스피노자적 자연주의는 모든 초월적 사고와 그러한 전도된 사고 속에 작동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주 인용하는 사무엘 버틀러는 ‘기계’에 대한 독특한 사유를 통해 인간중심적 사고를 넘어가도록 해줍니다. 우리는 흔히 유기체적인 사고에 입각해서 기계와 생물을 구분하죠. 이처럼 우리의 신체를 자기 동일성을 지닌 독립적 단위로 바라볼 때 우리는 결국 온갖 미심쩍은 초월적인 개념들을 다시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 사무엘 버틀러는 인간과 기계, 유기체와 비유기체의 작동방식이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계의 작동과 재생산에 인간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단순히 인공적인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죠.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연 안에 있는 모든 존재가 작동하고 재생산되는 방식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기계의 재생산을 돕는 주체가 인간이라면, “식물이 재생산하게 도와주는 주체는 바로 곤충이며, 자신과 완전히 이질적인 요인에 의해 수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식물의 한 과가 모두” 죽을 것입니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로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미소(微小) 동물들에 의해 살아가고 또 생식하죠. 기계든 인간이든 타자성(외부)을 내부에 함축하고 있으며, 그러한 외부적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고 또 스스로를 재생산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기계도 인간도 단일한 중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기계와 인간의 차이라면 그것은 복잡성의 정도에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기계보다 훨씬 많은 것들과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고, 또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죠. 그러나 이것을 본질적인 차이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난 시간부터 살펴보았던 들뢰즈 가타리의 ‘기계’ 개념에는 이러한 ‘작동’의 존재론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계 개념은 ‘과정’이라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작동으로서의 세계가 거부하는 관념 중 하나는 바로 ‘기원’과 ‘종말’입니다. ‘기원’과 ‘종말’이라는 관념은 있음(有)과 없음(無)의 대립적으로 보는 관점 속에서 파생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상상 속에서 종말이란 주로 인간의 종말이죠. 혹은 지구의 종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파괴와 종말 또한 다른 관점에서 보면 또 다른 생산일 뿐입니다. 작동과 더불어 생산하고 생산되는 세계에는 ‘시작’도 ‘끝’도 없습니다(無始無終, 生生不息의 세계).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스피노자가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말한다고 해서 세계의 무의함과 무목적성 그 자체를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생산과 차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종합’입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우리는 차이들을 ‘종합’함으로써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세한 차이들을 생략하고 그것들을 범주화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행위도 구성할 수 없을 것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과정의 무한한 지속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멈춤도 아닌, 과정의 ‘완성’을 사유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체나 사회 같은 기존의 범주들을 단순히 부정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관점에서 그러한 범주들을 새롭게 사유합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세 가지 종합’의 의미입니다.

“여기 욕망 기계들이 있다. ― 그 세 부품은 일하는 부품들, 부동의 모터, 인접 부품이며, ― 그 세 에너지는 리비도, 누멘, 볼룹타스이고, ― 그 세 종합은 부분대상들과 흐름들의 연결 종합들, 독자성들과 사슬들의 분리 종합들, 강도들과 생성들의 결합 종합들이다.”

들뢰즈 가타리는 ‘연결 종합(생산의 생산)’, ‘분리 종합(등록의 생산)’, ‘결합 종합(소비의 생산)’이라는 세 가지 종합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종합들이 모두 ‘생산’의 관점에서 이야기된다는 것이죠. “생산은 즉각 소비이며 등록이고, 등록과 소비는 직접 생산을 규정하며, 그것도 생산 자체의 한가운데서 생산을 규정”한다는 것. 즉 ‘세 가지 종합’은 끊임없는 능동들과 수동들의 생산(생산의 생산)과 욕망들이 분배되는 평면(조건, 배치...)의 생산(등록의 생산), 그리고 느낌의 차원으로서의 주체의 생산(소비의 생산)의 동시적인 사유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먼저 생산의 생산, 연결 종합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앞서 이야기한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가리킵니다. 첫 번째 종합은 ‘…그리고…’, ‘그 다음에 …’라는 연결 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고’입니다. 그러니까 존재A와 존재B가 있어서 둘 사이에 접속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접속, 즉 ‘그리고’에 의해 A는 A로 B는 B로 생성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입은 그것이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서 먹는 입, 말하는 입, 싸는 입 등으로 생성되죠. 그리고 이때 음식, 말, 토사물 등도 동시에 생성됩니다. 이처럼 연결의 종합 속에서 생산물과 생산하기는 동시적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생산하기인 동시에 생산물이죠. 연결의 종합 속에서 본다면, ‘나’라는 본질은 없고, 내가 생산하고 있는 모든 것과 나를 생산하고 있는 모든 것을 통해서만 ‘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끊임없는 연결 접속만이 있는 세계에 ‘기관 없는 신체’라는 낯선 개념을 도입합니다. 이는 생산의 생산과 더불어 생산되는 또 다른 차원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생산물과 생산하기의 동시성으로서 끊임없는 연결접속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러한 작동과 생산의 정지 및 응고됨으로서 미분화(未分化)된 거대한 대상이 형성됩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이러한 방식으로 생산된 것을, 이런 방식의 조직화를 거부하는 힘으로서의 ‘반생산’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 연결과 접속이란 끊임없이 플러스 값을 갖는 ‘증식’과는 구분됩니다. 이는 기계들의 고장과 접속의 단절을, 즉 ‘반생산’을 함축하는 개념이죠. 바로 이러한 접속을 끊어내는 힘, 접속을 변환하는 힘을 사유하기 위한 개념이 바로 기관 없는 신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관 없는 신체가 생산 자체에 반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생산 자체에 내재된 반생산, 삶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죽음을 표현하는 개념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란 욕망 기계들에 대한 반작용이자 생산 과정에 내재해 있는 틈, 여백, 단절의 계기입니다. 생산의 생산으로서의 연결종합은 항상 분화되지 않은 차원, 절단되지 않고 남아 있는 틈과 더불어 작동합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등록과 기입의 표면을 형성합니다. 분명 기계들은 채취-절단을 수행하기 위해 코드를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과 모든 방식으로 접속하지는 않죠. 우리가 코드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가령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접속은 코드를 전제하는 동시에 코드의 이탈을 야기한다는 것이죠. 접속은 늘 ‘횡단’을 수반합니다. 때문에 매번의 독서는 코드를 전제하는 동시에 코드의 이탈을 야기합니다. 다른 모든 연결 접속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억압하는 사회와 저항하는 욕망이라는 이분법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등록과 기입의 표면을 사유하기 위해 이들은 기관 없는 신체라는 기이한 개념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닐까요? 기관 없는 신체의 위에서는 “욕망의 흐름들을 코드화하고 기입하고 등록하여” 흐름들을 수로화하는 사회체가 구성되는 동시에 언제나 그러한 수로화로 환원되지 않는 누수(漏水)현상이 일어납니다. “‘기관 없는 신체’는 등록의 표면이지만, 이는 언제나 그 등록(코드화)의 틈새에서 탈코드화하는 흐름들을 내포”(채운샘 강의안)합니다.



다음 주 간식은 고영주샘과 김태욱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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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1 00:29
    지금 여기, 과정의 완성을 사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