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4강 "욕망과 혁명"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3-07 10:33
조회
116
이번 주에는 들뢰즈-가타리의 욕망 개념과, 그 개념이 정신분석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의 지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강의들에서 살펴보았던 들뢰즈-가타리의 우주, ‘작동’만이 있는 기계들의 우주는 스피노자적 영감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생산되는 기계들의 우주에 ‘완전성’이라는 개념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완전히 갖춰진 상태’를 상상합니다. 가령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에 대한 원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 부모가 재벌이었다면…, 내 부모가 더 나은 인격을 지녔더라면…, 내가 더 나은 교육을 받았더라면… 하고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유년기’를 상상할 것입니다. 이때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 대한 관념이 만들어지는 것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그 시기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현재를 ‘갖춰야 할 조건들이 결핍된 상태’로 인식하는 것과 동시적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자체로 완전한 어린 시절 같은 것은 없죠. 완전성이란 사실 현재를 ‘결여’로 파악하는 데에서 비롯된 표상에 불과합니다. 스피노자는 전능하고 전지하고 무한한 신에 대한 표상이, 사실은 현존재의 무능력, 유한성, 무지를 결여로 보고 또 그것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관점에 의해 만들어진 부적합한 관념임을 폭로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적합한 관념에 사로잡힐 때 인간은 결여로 가득 찬 자신의 현존을 슬퍼하며 완전한 신에 복종하거나, 어떻게든 신에 가까워지고자 부질없는 노력을 계속 할 수 있을 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존재를 결여의 상태로 파악하는 사고방식은, 결국 그러한 결여가 제거된 상태에 대한 표상을 볼모로 잡고 있는 권력에 복종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저편의 세계에 대해 설교하는 기독교의 사제, 역사의 방향 운운하는 근대 지식인, 우리를 쓸모없게 만드는 현대사회의 전문가 등등은 결여를 주입함으로써 복종을 이끌어냅니다. 그리고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정신분석가들 또한 ‘결핍’이라는 무기를 휘두르는 현대의 사제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결여의 사고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없기 때문에 욕망한다’라는 부정의 운동과 싸울 것인가? 이것이 들뢰즈-가타리의 욕망 개념에 깔려 있는 문제의식입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욕망을 ‘주체와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욕망한다’라는 식의 사고방식은 욕망으로 하여금 결여된 ‘그것’을 향하게 하고 또 언제나 ‘나’라는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들뢰즈-가타리가 보기에 이러한 구도는 욕망의 혁명적 역량을 탄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욕망은 “대상을 지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주체 내부에 있지도” 않습니다. 욕망은 “이미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서 구성해야만 하는 하나의 판, 입자들이 발산되고 흐름들이 결합하는 장소인 그 판에 완전히 내재되어” 있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욕망을 ‘생산’의 관점에서 보려고 합니다. 욕망은 주체에 귀속되지도 않고 대상을 향하지도 않으며, 어떤 구조를 재생산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생산하기/생산되기의 부단한 과정이 펼쳐지는 장을 구성하는 동시에 그러한 장 속에서 구성됩니다. 대상은 욕망의 외부에 있지 않고 욕망 기계들의 접속/절단의 과정 안에서, 욕망과 더불어 생산됩니다. 그리고 주체는 그러한 생산과정에서 잔여로 생산되는 생산물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반생산조차 그 내부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생산의 관점에서 보기. 모든 것을 욕망의 절대적 긍정성 속에서 사유하기. 우리로 하여금 똑같은 문제의 구도를 되풀이하도록 하는 주체주의와 결여의 사고로부터 벗어나 “특정 술어에서 벗어나 연결 접속하고, 다양한 정서들을 가로지르는 사물들의 역량을 긍정”(채운샘 강의안)하기. 이것이 들뢰즈-가타리가 고민했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을 비판하면서 딱 두 가지만 지적했습니다. 하나는 정신분석학이 욕망의 생산을 전부 바수어 버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발화체의 형성을 모조리 박살낸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가족의 틀에 가두어버림으로써 욕망의 생산적 역량을 축소시켜버립니다. 이때 무의식이란 주체의 소유물이 되어버리죠. 결여로 가득 찬 주체의 유년 시절에 대한 추억. 그리고 이렇게 무의식을 주체에 귀속시킬 때 정신분석은 욕망에 대해 정상/비정상을 판결하는 심판관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욕망은 그 사회성과 역사성을 모두 상실해버리게 되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이 욕망으로부터 생산성을 박탈하고 ‘나’로 환원되지 않는 발화체의 형성을 파괴함으로써 기존의 구조에 복종하는 주체들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신분석이 만들어낸 틀들로부터 욕망을 해방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이 짱이야!’, ‘욕망만 믿어!’라고 말했다는 뜻은 아닙니다(이러한 어법에서 욕망은 이미 대상화되어 있죠). 이들은 사회적인 것을 부정하거나 도외시하는 방식으로 욕망을 ‘자연상태’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무의식은 소유 되어서도, 치료되고 제어되어서도 안 되며, 오로지 생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무의식은 지금 이 순간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장 속에서, 주체에 환원되거나 기존의 구조들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생산되는 중에 있다는 것. 때문에 문제는 사회적인 틀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참된 욕망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기존의 구도로 환원되지 않는 욕망의 선을 발명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혁명이란 ‘욕망의 완전한 해방’같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시도와 실험을 통해서 특정한 방식으로 욕망을 흐르도록 하는 배치와 싸우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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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3-08 19:42
    욕망을 결핍으로 보면 그냥 체념하게 되는데,
    생산의 관점에서 보니 욕망이 구조에 갇히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해석가능하다는 점에서 뭔가 실천적인 측면이 부각되는 것 같아요. 특정한 방식으로만 흐르는 욕망의 배치와 싸우는 과정에서 기존의 구도로 환원되지 않는 욕망의 선을 발명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