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5강 "무의식은 공장이다"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3-20 17:09
조회
137
문득 예전에 봤던 《위즈weeds》라는 미국 드라마가 생각이 났습니다. 드라마는 심장마비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이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남편의 보험금을 밑천 삼아 대마초(weed) 사업에 뛰어들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낸시는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야망이 넘치고, 남들을 쉽게 이용하며, 법이나 도덕을 가볍게 여기는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주위로 온갖 위험천만한 사건들이 펼쳐지죠. 그런데 제가 이 드라마를 보며 이상하다고 느꼈던 건, 낸시가 끝끝내 ‘가족’이라는 영토만큼은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낸시의 모든 불법적이고 부도덕한 행동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목적에 의해 행해지고, 또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정당화됩니다. 멕시코 마약왕을 상대하고, 마약 단속국 요원을 유혹하고, 살인 누명을 쓰고 감옥까지 갔다 온 무시무시한 낸시가, 집에 돌아오는 순간 ‘엄마’라는 규범적 역할에 발목을 잡힌다니! ‘나는 정말 좋은 엄마인가?’, ‘내 아들이 나 때문에 삐뚤어진 건가?’, ‘평범하게 살았더라면 내 아이들이 더 행복했을까?’ 낸시는 이렇게 자문하며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시청자들은 낸시의 ‘인간적인’ 모습에 공감하며 그녀와 함께 눈물을 훔치겠죠.

그런데 ‘가족’이란 원래 이런 걸까요? 죄책감, 결여감, 집착과 질투, 원한 등등의 끈적끈적한 감정들로 얼룩진 이 모습들이 가족의 본질 같은 걸까요? 그리고 인간의 욕망이란 본래 이처럼 가족을 향하고 가족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걸까요? 물론, 아닙니다. 커트 보니것이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600명의 친한 친척을 갖게 되는 이보 족의 아이에게 ‘가족’이란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일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엄마-아빠-나’라는 구도가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그 아이에게는 수많은 엄마들과 아빠들이 있을 것이고, 수많은 또래들로 이루어진 그 나름의 사회가 있을 것입니다. 커트 보니것은 ‘가족 문제’가 사실은 돈이나 섹스나 자녀양육 같은 것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핵가족화 자체로부터 비롯된 문제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와 반대로 정신분석은 근대적 가족 모델을 보편화합니다. ‘엄마-아빠-나’로 이루어진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무의식의 근저에 위치시킴으로써 모든 문제를 가족으로 환원시키고, 다시 가족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죠. 정신분석에서의 치료란 가족에 의해 병든 이들을 다시 가족으로 돌려보내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며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무의식은 원래 그런 게 아냐!’, ‘오이디푸스는 거짓말이야!’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은 분명 '작동'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어떻게 작동하느냐 하는 질문이죠. 따라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이란 근대가족이 보편화되어 있는 조건 속에서만 제대로 작동하는, 그리고 욕망과 무의식으로 하여금 그러한 조건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의 치료란 사실 욕망의 위험성을 제거하고 주어진 영토 안에 가두어 두는 일이라는 것. 물론 아이에게 엄마아빠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들뢰즈-가타리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엄마아빠는 엄마아빠로서 경험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프로이트의 제자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아이는 ‘전체 대상’을 모릅니다. 아이는 ‘엄마’가 아니라 젖꼭지와 관계합니다. 그리고 이때 젖꼭지는 ‘엄마의 젖꼭지’가 아니며 심지어 ‘젖꼭지’라는 고정된 대상조차도 아니죠. 만족을 주는 좋은 젖꼭지와 고통을 주는 무서운 젖꼭지는 아이에게 하나의 전체적인 대상으로 통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들뢰즈-가타리는 멜라니 클라인의 논의를 수용하여 욕망에는 ‘인칭’과 ‘주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엄마아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엄마아빠’라는 인칭으로 환원되지 않는 ‘세계’를, ‘우주의 흐름’을 경험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처럼 ‘우주적 존재’로 살아가는 우리의 실존을 ‘엄마-아빠’의 문제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너무나 하찮은 것으로 축소하고 평가절하하는 일이 아닐까요?

들뢰즈-가타리는 정신분석이 어떤 조건 속에서 어떤 효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가 기껏 발견한 무의식을 억압된 욕망의 저수지로, 의식에 의해 억눌려 있는 어둡고 기괴한 무엇으로 이미지화할 때, 결국 그는 ‘국가적 인간의 생산’에 복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은 억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에만, 말실수나 꿈 등을 통해서만 드러나죠. 그렇다면 왜 억압되어 있을까요? 그것이 금지된 것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 무의식과 욕망은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억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적절히 억압되고 승화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오이디푸스화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죠. 따라서 치료란 결국 오이디푸스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고, 근친상간 욕망을 단념하는 것입니다. 위험하고 불순한 욕망을 사회적으로 승화시키는 것. 정신분석의 치료란 건강하고 정상적인, 즉 제도적인 인간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던 것이죠.

일단 실험하라! 인칭화되지 않는, 자연이자 힘의지이자 생명 그 자체인 욕망을 긍정하라! 이것이 들뢰즈-가타리가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명랑한 책을 통해 우리에게 건네고자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욕망을 긍정할 것인가? 그것은 의식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철회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욕망이 길들여지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 부여잡고 있는 의식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안에 스며들어 있는 이상주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상을 만들어냅니다. 완벽한 가족, 완벽한 삶, 완벽한 사회 등등을 믿으며 그렇지 않은 현실을 비방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주의는 사실 의식에 대한 집착에 다름 아닙니다. 자신의 의식을 중심으로 세계를 재편하고 모든 우연과 사건, 그리고 미지의 것으로서의 삶 자체에게 우리의 고정된 의식에 복종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이상주의입니다. 그리고 이때 이상주의자는 자신의 의식에 포획될 수 없는 모든 것을 (결국은 삶 자체를, 그리고 무의식을) 부정하고 탄압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있죠. 그러나 삶을 불행으로 물들이는 것은 (혹은 우리를 ‘행복/불행’이라는 이분법적 해석의 구도에 갇혀 병들게 하는 것은) 삶 자체가 아니라 우리의 이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자신의 이상주의와 싸울 수 있을까요? 실험하고 시도한다는 것은 뭘까요? 그것은 이상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인식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미지의 것으로서의 삶 자체에 우리를 내어주는 일일 것입니다.

D.H 로렌스는 이상을 버리고 지혜를 길러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때 지혜란 “이론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상태”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고 존재의 복잡성과 여러 가지 본질을 아는 상태이고 우리하고 가까운 자들과의 심오한 관계를 아는 상태”입니다. “또 이것은 첫째로 우리의 영혼을,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곳에 생동감 있는 동적 관계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로렌스가 말하는 지혜란 말끔한 이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삶을 회피하지 않고 겪어내는 과정에서 얻게 된 ‘해석의 역량’과 비슷한 무엇이겠죠. 그리고 이러한 해석의 역량으로서의 지혜란 끊임없이 이상을 만들어낼 뿐인 인식의 확실성을 부정함으로써만, 그것이 깨지고 그것에 균열이 가해지는 과정을 겪어냄으로써만 이르게 되는 어떤 상태일 것입니다. 의식과 싸우며 지혜를 연마하는 것. 이번 주 강의를 들으며 이것이 우리가 생명의 본질을 실현하는 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체 2

  • 2019-03-20 19:34
    끊임 없이 이상을 만들어낼 뿐인 인식의 확실성을 부정하기,,,
    흐르는 욕망인 무의식에 자꾸 펜스를 치는 인식 또는 의식과 싸우고 지혜를 기르는 과정이 중요하겠네요
    바로 그거 하자고 이렇게 공부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 2019-03-20 21:10
    욕망을 '인칭화되지 않는 생명 그자체'로 보는 관점이 뭔지 모를 해방감을 주는 것 같아요. 강의 끝자락에 '무의식에 갇혀 두려워하는 것보다 영토를 벗어나는 실험을 일단 해봐라'는 말이 뭔가 신탁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ㅎㅎ 가족주의에 메몰 된 인식의 노예가 아닌 생명의 유동함을 표현하는 삶! 오랜만에 이상을 품게 만드네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