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6강 "무의식의 종합과 反오이디푸스" 후기

작성자
키키이림
작성일
2019-04-01 00:06
조회
144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6강 "무의식의 종합과 反오이디푸스" 후기

들뢰즈 가타리는 혁명적인 무의식이 있는 게 아니라 무의식 자체가 혁명적이라고 했습니다. 무의식에 대한 저의 이미지는 이랬습니다. 무의식은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오지 못한 억압되어 있는 어둠의 창고 같은 것입니다. 정태적이고 어둡습니다. 지극히 프로이트적이죠. 그런데 우리의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비판하며 오히려 의식이 무의식의 작용되는 정신의 일부라고 합니다. 즉, 무의식은 모든 생산이 이뤄지는 평면의 장입니다. 욕망 기계가 삐거덕삐거덕 계속 움직이며 생산하고 오작동하는 전체입니다. 또한 채운 센세는 스피노자의 자기 원인이자 완벽한 내재성을 가진 신으로 이해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완전한 자연, 생산하고 생산되는 자연 그자체입니다. 생산 안에 오작동과 이탈하는 것을 내재하고 그 안에 틈과 여백이 있어 균열을 내고 도주로를 만들 수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천문해석학인 별자리에서 우연과 변수를 겪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12하우스로 구분하는데 그 중 12번째 하우스가 무의식의 하우스입니다. 감옥, 수도원 혹은 잘못 쓰는 하우스로 해석하다가 최근에는 이타심의 하우스의 바꿔가고 있지만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과 문제의식이 떠올랐습니다.

무의식의 세 가지 종합과 상이한 용법들

3강에서 욕망기계의 세 가지 종합을 배웠는데요, 이제 무의식이 어떻게 종합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무의식의 연결, 분리, 결합이 오이디푸스의 방식과 오이디푸스가 아닌 방식으로 어떻게 종합되는지 2가지 용법으로 소개되었습니다. 2가지를 좋아하는 들뢰즈 가타리는 이분법을 벗어나고자 하면서 이분법한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이때 2가지는 기능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기능하느냐 저런 방식으로 기능하느냐의 2가지 극한의 사례를 말하는 것이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선택지 2개가 아닙니다. 접속에 따라 무의식의 종합은 두 극 사이를 끊임없이 진동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하나의 용법을 선택하면 하나를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두 가지를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요.

생산의 연결종합은 온전하고 특유한 사용 VS 부분적이고 비-특유한 사용으로 접속되어 나타납니다. 차이의 조직화나 구성을 종합이라고 합니다. 접속하면서 만들어내는 종합 중 온전한 인물로 접속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방식이 있습니다. 온전하고 특유한 사용에서 욕망은 하나의 고정된 주체, 즉 특정한 성으로 명시된 자아와 온전한 인문들로 규정된 완전한 대상을 동시에 받아들입니다. 오이디푸스적 종합입니다. 그러나 후자는 빠는 힘과 빨리는 젖, 젖가슴의 접속만 있지 인칭적 차원이 작동하지 않습다. 부분적이고 비-특유한 사용은 차이들은 여전히 차이이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같은 것으로 회귀합니다. 남녀의 성으로 비유했을 때, 우리는 축척된 통계로는 이성애자이지만, 알게 모르게 동성애자이며, 결국 스치는 느낌으로는 횡단성애자입니다. 인물화하지 않고 실제로 그 마주침에서 무엇이 오고가느냐를 보면 N개의 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남자와 남자가 만났을 수 있지만 A라는 남성의 암컷과 B라는 남성의 수컷이 교류하고 있을 수 있다는 거죠. 전자의 종합으로는 이성애, 남남, 여여로만 구분될 수 있지만 후자의 종합으로는 무수히 많은 성적 교류가 있는 거죠.

분리 종합의 두 가지 사용은 배타적, 제한적 사용 VS 포괄적 비제한적 사용입니다. 분리종합은 사회적 장에 등록 기입되는 것인데요, 오이디푸스적 분리 종합은 배타적, 제한적으로 접속합니다. 특정방식의 기입과 금지의 결과로 오이디푸스가 생기는 것입니다. 분리종합의 배타적 사용 속에서 인물들로 나타납니다. 반면 정신분석학에서 오이디푸스로 환원되지 않는 분열증은 분리 종합의 미지의 힘, 더 이상 배타적이지도 제한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충분히 긍정적, 무제한적 포괄적인 하나의 내재적 사용으로 드러냅니다. 분열자는 모순되는 것들의 종합을 분리 종합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 종합의 배타적, 제한적 사용을 그것의 긍정적 사용으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순되는 것들을 더 깊이 파 내려가 동일시함으로써 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나눌 수 없는 거리를 조망함으로써 분리를 긍정합니다. 사회적으로 남성 여성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분리 속에 갇히지 않고 다른 것들과의 접속을 통해 변형하는 거죠. 남자이지만 여성성을 주파합니다. 이것이 ‘횡단성’ 혹은 ‘되기’의 존재론입니다.

여자 되기는 여자로 위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위치에 있는 여자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을 발명하고 불가능한 것을 나눕니다. 타자와 나 사이의 거리를 긍정적으로 주파하는 것입니다. 제주의 예멘 난민으로 한창 이야기가 많았는데요. 난민은 국경 밖에 있고 나는 국경 안에 있는 기입으로 분리가 생깁니다. “난민은 이방인이니까 피해를 줄 거야”라고 하는 것은 배타적인 방식의 접속입니다. 그러나 나도 언젠가 저들처럼 떠돌아다닐 수 있고 가끔 떠돌아다닌다는 걸 느낀다면 난민에게 나눌 수 있는 것을 발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괄적이고 비제한적 사용입니다. 여기서 타자와 관계 맺는 윤리인 환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난민은 등록된 분리지만 그 분리 속에 갇히지 않고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빚이 있어 신세를 갚으려 주거나 협박을 해서 마지못해 주는 것은 환대가 아닙니다. 떠돌다가 내 근거리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기꺼이 뭔가를 주는 것이 거리를 긍정적으로 주파하는 환대입니다.

마지막 결합종합을 통해 주체가 생산됩니다. 결합종합의 두 가지 사용은 분리 차별적, 일대일적 사용 VS 유목적 다의적 사용입니다. 일대일 대응적인 것은 개체 차원의 것을 고스란히 사회적인 차원과 일대일 대응해서 동일시합니다. 도처에서 아버지의 형상을 찾게 되는 거죠. 회사의 아버지와 동일한 형상의 상사를 찾고 군대에서 사령관을 찾는거죠. 그러면서 나와 아버지를 동일시하면서 주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반면 다른 힘들로 자기를 경험하는 것이 유목적 다의적 접속입니다. 분열자는 자신을 어떤 인물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 없는 몸 위에서 발생하는 어떤 힘의 상태들, 이 몸을 가로지르는 효과들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이되는 인칭화 되지 않는 신체성입니다. 모든 힘의 효과로 자기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분열자의 신체는 미세한 감광판 같은 몸, 즉 기관 없는 몸입니다. 존재와 동일시가 아니라 새 깃털처럼 가벼운 것과 동일시하는 것이죠. 이를테면 부시맨의 신체성처럼요. 부시맨은 아내가 친정에 갔다가 돌아오는 것을 신체로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아내가 들쳐 멘 아이의 무게를 자신에게서 느끼면서요.

여기서 정신분석학의 심각한 의식의 전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의 조건들 속 기입 표면 위에서, 좌표 노릇을 하는 부모 이미지들과 관련해 규정 가능한 자아를 정립하는 것은 등록의 종합입니다. 여기서 인물들을 억지로 분별하는 하나의 삼각형화가 있습니다. 이 삼각형화는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행하는 것,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 추리해서 이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바로 이것이 욕망되어 있었다고 결론내립니다. 애초부터 욕망은 금지되어 있다고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하는 거죠.

그러나 욕망의 결여와 금지는 외삽된 것입니다. 엄마 아빠라는 인칭화를 모르는 욕망에게 어떻게 근친상간이 있을 수 있나요? 금지로 욕망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삼각형화된 것이 금지를 만듭니다. 욕망은 금지를 모릅니다. 다만 흘러갈 뿐입니다. 오이디푸스의 모순과 금지 이전입니다. 즉 오이디푸스적 기입이 등록의 종합 속에서 강요되면, 반드시 생산의 종합에 대해 반작용하고 온전한 새 인물들을 도입함으로써 이 종합의 연결들을 심히 변형하게 됩니다. 그냥 흘러 다니는 것 밖에 모르는 욕망에게 온전한 사용을 강요하면 연결들이 변형됩니다. 금지와 분별하는 것을 억압과 탄압이라고 합니다. 무의식적 차원의 억압과 의식적 차원의 사회적 탄압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출발이 아니라 조작을 통한 결과입니다.

체운 센세는 요즘 오이디푸스화가 극한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쪽에는 견고한 오이디푸스화가 있는 반면 가족이고 뭐고 해체되고 돈만 있는 극단적으로 해체되고 있다고 진단하셨죠. 또 애완동물과 인간사이의 새로운 오이디푸스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셨어요. 애완동물을 모두 우리 아이라고 부르고 자신을 엄마아빠라 부르는 모습에서 고개가 끄덕거려지더라고요.

모든 무의식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이다

독일 드레스덴의 고등법원장인 슈레버는 자신을 여성이라 느끼는 특이한 남성입니다. 그의 망상과 발작의 자전적 기록인 『신경환자의 전기』를 읽은 프로이트와 들뢰즈 가타리의 진단은 확연히 다릅니다. 프로이트는 남자가 자신을 여성으로 간주하는 망상은 거세공포 때문이라고 봅니다. 거세의 실패는 아버지와 아버지로 상징되는 법, 국가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생긴다고 보죠. 슈레버의 아버지는 아이를 강하게 길러야 한다는 히틀러적 교육관을 가진 폭력적인 사람이라 거세를 수용할 여지가 없어 자신을 신과 아버지로부터 사랑받는 여성으로 대치하는 동성애적 욕망으로 변모했다고 봅니다. 프로이트는 하나의 병으로 봅니다. 반면 (우리의 채운 센세의) 들뢰즈 가타리는 슈레버에게서 기관없는 몸을 읽어내죠. 유기적 상징적 신체에 반하는 욕망의 생산이 이루어지는 기관 없는 몸이요. 그의 풍부하고 미분화되고 성스러운 망상은 아버지로 환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문제 삼는 것은 언제나 기능과 효과입니다. 온갖 다양한 것을 가족으로 환원하는 오이디푸스화는 어떻게 기능할까요? 사회, 특히 자본주의 사회가 잘 돌아가게 합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좀 순진한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들뢰즈 가타리의 反오이디푸스는 부모의 삶과 사랑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 아이는 가족 안에서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랍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온갖 욕망적 삶을 살며, 욕망의 대상들 및 욕망의 기계등과 온통 비가족적 관계를 맺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건 욕망적 생산에서 부모의 위치와 기능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요. 거꾸로 욕망기계들의 모든 작동을 오디이푸스의 제한된 코드로 복귀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로 닫아버리는 것을 문제 삼는 것입니다. 가족이 문제가 아니라 가족을 모든 인간관계의 출발점으로 삼는 가족주의를 문제 삼는 것이죠.

정신분석학은 종교를 넘어선 것 같지만 종교적인 것을 무의식에 주입했습니다. 융은 원형으로 돌아가 종교를 무의식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프로이트는 모든 무의식을 가족 삼각형 안에 가두고 오이디푸스화하면서 종교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이 없다고 하면서 오이디푸스를 신격화한 것이죠. 이럴 때 들뢰즈 가타리는 맑스의 선언을 상기합니다. “신을 부정하는 자는 이차적인 것 밖에 하고 있지 않은데 왜냐하면 이는 인간을 신의 자리에 놓기 위해 신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신론은 신을 비판하는 것으로 신을 상정하는 유신론과 같은 장에 있습니다. 신의 자리에 우상화하는 다른 무언가, 인간, 돈 등을 놓는 것이죠. 그러나 욕망은 신의 실존이라는 부정을 경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의식은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초부터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의식은 고아인 동시에 우상화를 모르는 무신론자이며 직접적으로 고아이며 직접적으로 무신론자”입니다. 무의식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산입니다. 태초에 욕망이 있었습니다. 이런 맑스의 유물론적 사유에 동의하고 프로이트의 오이푸스에 반하는 들뢰즈 가타리의 분열분석학을 유물론적 정신분석학, 즉 정신분열분석학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무의식을 오이디푸스의 삼각형 안에 가두는 것은 무의식을 사유화하고 독점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츠 파농의 연구가 보여주듯 식민지 알제리 정신병자는 오이디푸스화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식민지인들의 외상을 백인과의 관계없이 가족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흑인들의 자기부정과 열등의식을 어떻게 흑인들의 오이디푸스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식민지라는 알제리의 사회적 처지 속에서 제국주의의 힘 관계없이 해석될 수 없습니다. 가족은 그자체로 사회적 장입니다. 모든 무의식은 사회적이고 역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채운 센세는 내 욕망을 사회적 힘이 어떻게 관통하고 있는 지 아는 것, 이미 형성된 지층을 신중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회적 장이 가족을 관통하는지 아는 것이 혁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앙티오이디푸스를 일상에서 작동시켜라

채운 센세께서 1강에서 던졌던 미션과 질문이 아직 생생합니다. “이 책을 작동시켜라 그리고 현실적 작동으로 일상적 혁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물어라“ 두둥!!! 욕망기계와 기관없는 신체의 개념을 작동시킨다면 무의식은 무엇인가를 묻지 말고 무의식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라는 주체를 관계 속에서 생각하고 나의 생각과 느낌, 감정은 이 관계들의 잔여물일 뿐이다 라는 생각은 작동되다가 안 되다가 합니다. 이 시가 좀 다르게 읽히긴 했습니다.

물길의 소리 / 강은교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 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의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햇살을 핥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을 모르고 뛰어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닙니다. 물소리의 환영을 부수는 데는 한 마디면 족합니다. 그는 분열자 같죠? 그가 던진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다시 뒤섞이고 해체”됐습니다. “그렇군. 물소리는 물이 돌에 부딪치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로 물소리를 벗어난 부분적이고 비특유한 연결사용이 읽혀지고 이 다양체 안에 물과 소리는 수많은 대상들로 절단되고 다시 재생산하며, 다시 절단하는 거대한 흐름들을 이뤄진다고 느껴졌습니다.

앙티오이디푸스 책을 읽을수록(저희 세미나팀은 아직 1장도 다 못 읽었습니다만) 한마디로 단순화시켜 정의하는 것이 조심스러워지더라고요. 이분법을 벗어나 가로지르기, 경유하기가 어떤 것인지 느끼기 힘들어요. 어떤 힘들이 끊임없이 나를 훑고 지나가는 것으로 나를 느낄 수 있을까요? 인칭화하지 않고 부분대상들과 특성들의 결합과 해체로 어떤 사건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DH 로렌스의 <무의식의 판타지>에서 무의식의 활동과 욕망의 생산을 긍정하는 것은 일체의 이상과 싸우는 것이자 삶을 실험과 끝없는 과정으로 만드는 과정이라 한 것을 힌트삼아 붙잡고 가보려 하지만 어렵습니다.

이 수업의 또 다른 묘미는 들뢰즈적인(?) 듣보잡 문학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뭔가 읽고 나면 이상한 힘이 나를 관통한 느낌이 이런 건가 살짝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래서 더 풍성하게 규정을 가로지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쉼표만으로 이어진, 그래서 언어화된 영토를 벗어나는 언어를 보여주는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600명의 친한 친척을 가진 이보 족 아이를 보여준 커트 보니것 <나라없는 사람>, DH 로렌스 <미국 고전 문학 연구>의 완벽한 관계라는 표상을 걷어차는 통쾌함,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 <어서 와, 잘가>의 늙지 않는 소년 윌리까지요.

다음 시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본주의를 들고 판다고 하니 더 기대됩니다.
전체 2

  • 2019-04-03 10:20
    오... 12번 하우스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뢰즈 가타리를 별자리 해석에 접목하고 계신 건가요!?
    정신분석이 어떻게 종교적 권력(?) 종교적 해석(?)을 다시 동원한다는 건 재밌었습니다.
    우린 정신분석과 그다지 친숙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을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 영향 하에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2019-04-03 15:00
    모든 생산이 이루어지는 평면의 장으로서의 무의식, 그리고 미세한 감광판 같은 몸. 욕망에 대해 신체에 대해 다르게 생각해보아야 겠습니다.
    그리고 책을 작동시킨다라고 하는 것은, 감광판으로서의 내 느낌, 인식을 살펴보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나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