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7강 “자본주의로부터, 자본주의 바깥을 사유하기 : 원시 영토 기계”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9-04-04 14:53
조회
173
이번 주에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3장 “미개, 야만, 문명” 중 ‘원시 영토 기계’에 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채운샘이 종종 언급하신 《안티 오이디푸스》의 ‘새로운 인류학’이 이 부분에 해당합니다. 예~~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 이 부분이 너무 어렵기도 했고, 별로 중요하지 않아 보이기도 해서(어려워서 그렇게 보였던 거겠죠) 그냥 대충 훑고 넘어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정신분석을 비판하는데 인류학까지 필요했을까? 너무 멀리 간 거 아닌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즉 근친상간 욕망)가 무의식의 바탕에 있지 않다는 것을 원시사회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증명하고자 했던 걸까? 등등의 생각이 스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강의를 들으며 조금 감을 잡게 된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를 자본주의와 정신분석에 ‘대한’ 반응적 비판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시도한 것은 정신분석과 자본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인간과 역사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의 도구를 만들어냄으로써 자본주의와 정신분석학으로부터 도주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인류학, 사회체 분석도 앎 자체를 도주선으로 만들고자하는 이러한 시도의 일부라고 할 수 있겠죠. 이번 강의를 들으며 《안티 오이디푸스》가 ‘다르게 사유하려는 경이로운 노력’의 산물이라는 말을 조금씩 실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3장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앞선 장들에서 설명한, 욕망과 무의식의 종합들이 사회체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원시 영토 기계, 야만 전제군주 기계, 문명 자본주의 기계(그런데 이 것을 목적론적 진화의 단계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가령 원시 영토 기계는 문명 자본주의 기계를 억압하면서 작동하는가 하면, 문명 자본주의 기계 안에서 야만 전제군주 기계가 작동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형에 대한 분석에 작동하고 있는 질문은 “욕망하는 생산이 어떻게 특정한 사회적 조건 속에 기입되는가?”입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선차성을 끊임없이 강조하지만, 그것이 ‘사회’를 무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욕망은 언제나 특정한 배치 속에서, 특정한 사회체에 기입되면서 작동합니다. 욕망은 그 배치에 의해 특정한 방식으로 조건 지어지고, 또 그 배치는 욕망-생산에 의해 구성되는 중에 있죠. 때문에 단지 법을 어기고 관습을 깨고 금지를 위반하는 것을 도주선의 발명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욕망이 어떤 방식으로 조건 지어지고 있는지를, 그 욕망이 기입되는 사회체를 신중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들뢰즈 가타리가 인류학적 작업을 시도한 것도 바로 이러한 고민 때문이었겠죠.

그렇다면 사회체를 분석함에 있어 ‘욕망하는 생산’을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욕망이 이미 사회체 속에 기입되고 있다면, ‘욕망의 선차성’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들뢰즈 가타리는 ‘언제나 달아나는 것들이 있다’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욕망이 선차적이라는 것은, 욕망은 결코 사회체로 모조리 환원되지 않고 늘 그로부터 빠져나가는 중에 있다는 뜻입니다. 사회체의 작용과 포획으로 환원되지 않는 ‘누수’가 항상 일어나고 있다는 것. 이는 비판과 저항에 대한 푸코의 생각과도 연결이 되는데요, 푸코에 따르면 권력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습니다. 푸코는 권력을 일종의 유동체로 생각했습니다. 지배자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소유되고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물론 여기에는 사회체 전체를 가로지르는 미세한 관계의 그물눈들이 이미 침투해 있겠죠) 속에서 생산되고, 또 그들을 가로지르며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생산하는 유동적인 힘. 이렇게 권력을 유동체로 파악할 때 저항이란 ‘억압하는 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관계로부터 이탈하는 힘을 조직해내는 것이 되겠죠. ‘욕망의 선차성’에 대한 들뢰즈 가타리의 사유에도 다른 혁명의 이미지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제도적 혁명, 권력의 교체가 아니라 달아나는 힘들을 조직하는 것으로서의 혁명.

《안티 오이디푸스》 3장은 일종의 계보학적 작업이라고 합니다. 채운샘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본주의라는 ‘끝’으로부터 회고적으로 계보학을 구성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끝’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은 굉장히 독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은 물론 자본주의를 역사의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 속에서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는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인가? 그러나 이것도 충분한 설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자본주의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이전의 사회체들이 작동하기 위해서 억압해야만 했던 “탈코드화된 흐름들 위에서 구성된 유일한 사회기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란 모든 사회구성체의 음화(陰畵)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며, 역사의 ‘끝’인 한 것입니다. 자본주의란 이전의 모든 사회체가 억누르고 있던 악몽의 실현이라는 것.

자본주의는 이전의 사회체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던 ‘이름붙일 붙일 수 없는 것’, 코드화되지 않는 것을 내버려두고, 그것들 위에서 작동합니다. 자본주의는 ‘신분’이라는 코드를 떠난, 화폐로 교환될 수 있는 추상적인 부의 흐름(사유재산)과 영토성으로부터 벗어난 노동자들의 흐름(노동력)의 결합에 의해 성립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채운샘은 칼 폴리니의 《거대한 전환》을 추천해주셨습니다). 자본주의는 고정된 코드와 영토로부터가 아니라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하는 흐름들로부터 잉여가치를 이끌어내는 유일한 사회체인 것이죠. 때문에 자본주의는, 다른 사회체들이 늘 억압하고 외부화해야 했던 ‘위기’를 내재화합니다. 자본주의는 늘 자신의 한계와 위기에 도달하고 그때마다 욕망의 흐름들을 가로막는 벽을 조금씩 밀면서 작동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마침내 자본주의는 자신의 모든 흐름과 더불어 달나라에 이를 것”(《안티 오이디푸스》, 71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문명 자본주의 기계가 이처럼 다른 사회체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의식 속에서 다른 사회체들을 구성하는 원리를 역추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자체의 작동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는 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즉 이들의 사회체 분석은 자본주의라는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전사(前史)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기계 자체를 낯설게 보려는 시도라는 것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원시 영토 기계를 볼 때, 우리는 이 사회체에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기입과 등록의 표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목적론적 도달점으로 놓고 볼 때 원시사회는 마치 아직 재화의 독점이 뚜렷이 이루어지지 않은, ‘단순교환’ 체계로 이해됩니다. 역사 이전의 자연상태를 상상하게 되죠. 이것은 자본주의를 목적지에 놓고, 자본주의에 부합하는 요소들의 유무를 따지거나 그것의 발전단계를 논하는 식의 전도된 추론의 결과일 뿐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의 관점에서 원시사회는 자본주의의 전단계로서의 자연스러운 단순교환의 체계 같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출현을 저지하고 억압하는, 자본주의와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사회 기계입니다. 여기서 기입의 표면의 역할을 하는 것은 ‘땅’입니다. 원시 영토 기계에서 땅은 단순히 노동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생산력들로 복귀해서 그것을 전유하는 충만한 몸으로 기능합니다. ‘어머니 대지’ 같은 말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이때의 대지는 모든 것들이 그로부터 나오고 또 되돌아가는 근원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체에서 중요한 것은 ‘육체적 각인’이었습니다. 문신이나 낙인 등등을 통해 신체에 영토를 기입하는 것. 끊임없이 신체가 영토에 소속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또 각인시키는 과정 속에서 원시 영토 기계는 작동했습니다.

원시 영토 기계는 토지의 몸 위에서 혈연과 결연을 조직합니다. 이때 결연과 혈연의 과정에서 ‘근친상간’이라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원시사회는 모자간 남매간의 근친상간을 금지합니다. 왜? 프로이트라면 근친상간을 욕망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죠. 인간은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레 근친상간의 욕망을 갖게 되고,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버지의 법’에 의해 억압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라고.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의 설명은 전혀 다릅니다. 근친상간이 욕망되고 있기 때문에 근친상간 금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욕망은 금지와 더불어 구성된다는 것.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혈연’과 ‘결연’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설명입니다. 우리는 흔히 원시 사회를 ‘혈연 중심’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런데 이들에 따르면 ‘혈연’이라는 사슬이 이어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러한 “사슬들을 흐르게 만드는 결연의 블록들”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죠. 혈연이라는 코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결연이라는 비대칭적 교환에 의해 끊임없이 흐름들이 수혈되어야 합니다. 근친상간 금지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이 거기에 있었음을 증언하지 않습니다. 근친상간이 금지되어야 했던 것은 토지의 몸 위에서 결연과 혈연을 동시적으로 조직한다는, 원시 영토 기계의 작동 원리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혈연 자체의 성립을 위해서, 혈연 안에 머무르는 것이 금지되어야 했다는 것이죠.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 실제로 ‘금지’되고 ‘억압’되는 것은 근친상간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내공상태’라고 합니다. 인칭을 갖기 이전의 생명 그 자체. 금지의 이전(이것을 시간적인 이전으로 파악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은 인칭화되지 않은 욕망의 생산만이 있는 상태, 즉 ‘엄마-아빠-나’가 아니라 ‘낳음’ 자체만이 있는 상태입니다. 많은 신화들에서 혈연의 기원으로 제시되는 것은 ‘알’이죠. 시조는 대개 알에서 태어납니다. 이때 알이란, 아직 외연을 갖지 않은 잠재적 상태, 힘 그 자체이자 강도 그 자체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합니다. 억압되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내공상태라고. ‘엄마-아빠-나’라는 ‘인물’의 차원은 이러한 내공적 상태의 억압과 더불어 구성되는 것이라고. 들뢰즈 가타리는, 정신분석이 욕망과 무의식의 근저에 오이디푸스를 외삽함으로써, 우주적 차원과 공명하고 있는 우리의 무의식을 가족이라는 협소한 영토로 축소시켜버리고 있음을 고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기계의 재생산과 결부되어 있겠죠. “우리의 민주적, 산업적 사태의 질서, 귀엽고-작은-내-새끼-보고-싶은-엄마my-dear-little-lamb-I-want-to-see-mommy라는 스타일”(D.H 로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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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4-08 01:47
    들뢰즈가 인류학을 언급한 것은 자본주의를 단순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군요. 사회체와 욕망과의 관계를 다르게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금지와 함께 욕망이 구성되고, 법과 함께 죄가 구성되고. 그런데도 언제나 도주하는 것들이 있고!